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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유(Wang You) 展
Blame the Blazing Sun

The Castle Act I_Oil on canvas_250x200cm_2024
TANG CONTEMPORARY ART Seoul
2025. 2. 7(금) ▶ 2025. 3. 15(토)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로 75길 6
https://www.tangcontemporary.com

The Castle Act II_Oil on canvas_250x200cm_2024
“몸을 가진다는 것은 평면을 전환하고 공간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목소리를 가진다는 것이 음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는 것과 같다.”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지각의 현상학』 “모든 매체의 맥동은 나의 꿈의 회로로 피드백되었다.” -돈 드릴로(Don DeLillo), 『아메리카나』
누가 처음으로 그림을 발명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왕유(Wang You)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림을 발견했다. 어린 시절 취미로 시작해 지금은 직업 화가로서 활동하고 있는 그녀는 정식 미술 교육을 받은 예술가는 아니지만, 전문적인 틀을 벗어나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다. 반 고흐(Van Gogh)가 “나는 지치지 않고 그림을 그리며, 그림을 통해 배운다”고 했던 것처럼, 그녀 역시 그림을 통해 배우고 창조해 나간다. 학문적 규칙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왕유의 작품은 자유롭고 대담하며 열정적이다. 빈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자신이 만들어낸 평행 우주로 바라본다. 그곳은 직관적 공간으로, 상상력을 자유롭게 풀어 놓고, 다듬어지지 않은 감정을 형성하는 장소이다. 왕유의 말처럼, 그림은 그녀에게 있어 낙원이다. 왕유에게 있어 '세계관(worldview)'이라는 개념은 '놀이터(playground)'라는 단어에서 유래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왕유에게 있어 그림은 매체 전통의 역사적 부담도, 문화적 정체성의 정치적 불안도 없는 것이다. 그녀의 시선에서, 왕유는 그림을 살아 있는 존재로 보고, 이는 다양한 시대와 문명을 초월하는 생명의 확장으로서 예술가들이 세상과의 공생에 진정으로 답할 수 있게 한다. 왕유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가들을 나열한 적이 있다. 초기 르네상스의 프레스코 화가인 베노조 고졸리(Benozzo Gozzoli)와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에서 시작해, 중국의 고분 벽화와 둔황(敦煌) 벽화를 거쳐 들라크루아(Delacroix), 마네(Manet), 반 고흐, 피카소(Picasso)로 이어진다. 그리고 브뤼겔(Bruegel), 엘 그레코(El Greco), 석도(石濤), 왕희지(王羲之)를 지나, 현대 화가 피터 도이그(Peter Doig)와 앨리스 닐(Alice Neel)에까지 이른다. 이처럼 시간과 지리적 경계를 넘나드는 목록은 겉으로 보기엔 즉흥적인 대화에서 비롯된 듯하지만, 사실 왕유의 시선은 미술사와 문명사를 선형적 서사로 보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과거의 거장들을 현재 속에 평등하게 놓고 자유롭게 넘나들며, 여러 낙원을 거닐고 멈추었다가 다시 걸어 나아가는 듯하다. 그 이야기는 세잔(Cézanne)에서 잠시 멈춘다. 왕유는 세잔의 작품이 넘을 수 없는 경지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며 경외감을 표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세잔이 이성적이고 깊이 있는 성격의 소유자라고 여기며, 자신의 성격과 다르다고 언급한다.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녀는 무심코 자신의 ‘자아’를 끌어들인다. 이와 연결되듯, 왕유는 ‘자기’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을 즐기는 화가로 보인다. 이는 그림의 전통적인 장르인 ‘자화상’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오늘날의 미디어 중심 사회에서-토마스 마초(Thomas Macho)가 언급한-얼굴의 사회(facial society)는 끊임없이 얼굴을 생성하는 스펙터클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이미지에 대한 집착, 아니 갈망은 사적인 얼굴에 대한 소유권을 공공의 영역으로 넘겨주는 결과를 낳는다. 그에 반해 ‘얼굴의 증식’은 비인격화를 심화시키고, 자아의 시각적 이미지는 점차 고정화되고 단순한 상징으로 전락해 가고 있다. 그렇다면, ‘자아’란 무엇일까? 데카르트(Descartes)는 ‘이성적’이라고 할지라도, 얼굴과 자아의 표현 사이에 본질적인 관계가 있음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는 “내가 얼굴을 소유했다”고 말하며, 그것이 “시체에도 있는 신체 부분의 전체 구조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보면, 화가가 ‘자화상’을 그리는 과정에서 의식적인 주체는 결국 하나의 객체화된 이미지, 즉 가면이 될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유사한 평행을 이룰 수 있다. 그렇다면 몸이 정말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 오직 살아있는 자들만이 그 몸의 위대함을 자연히 이해할 것이다. 데카르트가 신체를 정신으로부터 분리했듯이, 살아있는 신체는 그 자체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는 탐구를 이어가고 있다. '몸이 되는 것(being a body)'과 '몸을 소유하는 것(having a body)' 사이의 현상학적 구별은 인간 삶에서 경험적 주체로서의 몸과 객체로서의 몸 사이에 내재된 긴장을 반영한다. 프로이트(Freud)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자아는 무엇보다도 신체적인 자아이다; 그것은 단지 표면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가 표면의 투영이다.” 프로이트는 자아를 외적 차원과 내적 차원으로 구성된 것으로 이해했으며, 신체는 외부 입력과 개인의 내적 욕망 사이의 긴장을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왕유의 그림 속 ‘자기 이미지’를 다시 살펴보면, 엄밀히 말해 얼굴만을 순수하게 주제로 삼는 ‘자화상’을 거의 그리지 않는다. 그보다는 신체의 자세, 제스처, 그리고 의미적 맥락을 고려한 결합된 표현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얼굴은 자아의 표시라기보다는, 몸을 통해 자아의 능동성을 증명하는 도구로서 작용한다는 점에서 더욱 정확히 이해될 수 있다.

Sleepless Boy_Acrylic on canvas_140x120cm_2024
왕유에게 그림 그리기는 신체적인 행위로, 그녀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춤과 유사하다. 두 예술적 행위 모두 움직임을 통해 자신의 에너지 흐름을 감지하게 만든다. 매체와 공간적 차원이 다르긴 하지만, 두 가지 모두 기법을 정제하고 자기 자신을 실현하기 위한 엄격한 자기 규율과 자아 실현을 요구한다. 왕유는 이러한 방식의 예술적 실천을 구현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처음에는 "스케치처럼 느껴지는" 그림을 그렸다고 설명한다. 선적인 색채의 터치로은 형태의 윤곽을 만들었고, 동시에 그림의 평면에서 공간을 조직하는 역할을 했다. 때때로 그녀는 배경에 넓은 공간을 남기거나 몇 가지 색채 블록으로 바탕을 이루기도 한다. 이러한 방식은 시각적 구조와 현실에 대한 감각 모두에서 즉흥적인 콜라주 느낌을 드러낸다. 왕유는 즉흥성과 직관, 상상력 사이의 공백이야말로 자신의 신체가 창작의 기회를 제공하는 방식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Change Life for Free>(2021)에서 왕유는 '인어'라는 문학적 이미지를 현실 상황 속에 삽입했다. 단순히 심리적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녀의 그림에는 더 명확한 회화적 관념, 즉 이른바 ‘극장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캔버스가 무대처럼 상상되었을 때, 왕유의 기존 예술 경험은 단순한 회화의 영역을 넘어선다. 춤, 연극, 영화 등 신체를 매개로 한 예술 경험들이 그녀의 회화 세계를 지속적으로 발효시키고, 피드백하며 확장시키고 있다. 왕유의 ‘사랑’을 주제로 한 그림에서 우리는 이를 더욱 명확히 볼 수 있다. 사랑은 그녀의 작품에서 하나의 생명적 사건으로 정의된다. <The Lost Years>(2023)에서는 남녀 간 우연한 만남이 삶의 경계를 관통하며 표현되기도 하고, <Too Much Has Been Forgotten>(2024)에서는 해변에서 녹아내리길 기다리는 물고기는 과거의 기억 속 무게처럼 파도에 휩쓸려 올라왔다가 새로운 기억으로 덮여 사라진다. 왕유는 이처럼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삶의 경험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주목하는 신체는 작가로부터 점차 관객에게로 확장되어 가고 있다. 이는 그녀의 작품이 개인의 표현에서 벗어나 관객과 소통하는 보편적 감각의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왕유의 <Where Your Gaze Touches>(2024) 연작에서는 관객의 시선 방향이 그림 속 인물들의 시선과 겹쳐진다. 드로스테 효과(Droste Effect, 이미지의 반복)이라는 수사적 구조는 단순히 트롱프뢰유(trompe l’oeil) 기법에 그치지 않고, 시각적 평면을 확장하려는 차원을 초월하려는 시도이다. 이는 현대극에서 "제4의 벽"을 깨뜨리는 개념과 유사한 몰입형 관객 경험을 제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유는 회화의 경계를 잘 인식하고 있으며, 우리는 다시 회화로 돌아가며 그 경계를 돌아본다. 즉, 환각과 현실, 상상과 현실이라는 이분법은 경계를 매개한다. 왕유의 시각 언어는 이러한 변화하는 상태와 함께 발전한다. <The Castle>(2024) 연작에서 왕유는 조각적이고 재현적인 요소를 통합하여 폴립티크(polyptych) 형식으로 네 개의 연속적인 장면을 통해 복잡한 인간 관계를 묘사한다. “천 명의 사람의 눈에는 천 명의 햄릿이 있다”는 말처럼 말이다. 이는 동명의 카프카(Kafka)의 소설을 떠올리게 하며, 모든 작품은 관객에 의해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왕유는 정말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지” 궁금해진다. 아마도 그것은 그녀의 화가로서의 불안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녀의 내면적인 욕망과 야망이거나, 혹은 ‘회화’가 재능과 힘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불멸을 추구하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겉보기에는, 우리는 이를 예술가의 ‘백일몽’으로 볼 수 있다. 왕유와 같은 예술가들은 종종 자신의 세계에 몰두하며 고립된 작업실, 즉 자신만의 요새(fortress)를 만들어 일한다. 헤겔(Hegel)은 『미학 강의(Lectures on Aesthetics)』에서 예술가와 인간 정신의 역할에 대해 논한다. 그는 관찰, 숙고, 그리고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표현함으로써 인간 정신이 진정으로 자아를 실현하게 된다고 제시한다. 그런 정신에게는 인간의 마음 속에서 생생해질 수 있는 어떤 것도 낯설지 않다. 이에 왕유가 카뮈(Camus)의 『이방인(The Stranger)』에서 "모두 햇빛 탓이다(Because of the sun)"라는 구절을 선택한 것은 인간 세계의 부조리를 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술을 통해 빛을 비추는 자신의 역할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렇게 해야만 그녀는 다른 사람
선동동 Sun Dongdong

The Lost Years_Acrylic on canvas_180x180cm_2024

Blame the Blazing Sun_Oil on canvas_200x180cm_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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