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민정 展

 

버닝 댄스

 

순결한 것들_깨진유리, 마, 황토, 백토 위 혼합재료_150x110cm, 2024

 

 

아트스페이스 보안 2

 

2024. 12. 6(금) ▶ 2024. 12. 31(화)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33 | T.02-720-8409

 

www.boan1942.com

 

 

불의 춤이 남긴 것들

2022년 겨울과 봄 사이 우리는 수원 레지던시 공간에서 처음 만났다. 작업실 문을 열었을 때 우민정은 허리 높이의 단상 위에 틀을 놓고 흙을 바르고 있었다. 이 장면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매체와 기법에서부터 시선을 사로잡는 그의 작업은 평면 매체로 불리지만 조형적 요소를 머금고 있다. 천위에 올려진 흙의 물질성이 강하게 드러나며 이를 새기거나 깎는 조각적인 방식이 차용된다. 화면의 구성 역시 평면적이나 안료와 흙이 뒤섞여 만들어진 물감층이 겹겹이 쌓여 깊이를 만들어낸다. 우민정의 작업에서 회화와 조각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은 의미가 없다. 각 특성은 서로 대립하기보다는 공존을 모색한다. 이는 형식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주제를 탐구하는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작업을 통해 “선과 악, 생성과 소멸, 분노와 정화, 절망과 희망, 있음과 없음”처럼 상반된 개념들을 데려오지만, 이들을 대립적인 관계로 고정하기보다는 상호적 관계 속에서 풀어내고 있다.

이번에 선보이는 전시 《버닝 댄스》는 우민정이 몇 년간 천착해 온 지도 그리기의 결말이자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신화나 영화, 소설 등을 통해 그가 수집한 기억 속 다양한 장면들은 일상과 연결된 세상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만들며 상상력과 만나 하나의 지도가 되었다. 가장 아래에는 물이, 가장 위로 올라가면 빛-별이, 그 바로 아래 불이 있다. 그리고 중앙부에서 꿀과 벌, 뱀, 저울과 제물, 코끼리와 나비 등 다양한 도상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그동안 작가는 지도 아랫단에서부터 차례차례 올라오며 이야기를 풀어냈고 이제 이 긴 여정의 끝에 도달했다. 이번 전시는 불에 닿아 펼쳐지는 그간의 열망이 모여 만든 공연과도 같다.

 

 

순결한 것들_탄 종이, 마, 황토, 백토 위 혼합재료_150x110cm, 2024

 

 

“종종 가만히 앉아 벽을 쳐다보며 그 벽 너머를 상상해보고, 벽을 뚫고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우민정은 굵고 튼튼한 실로 만들어진 직물인 황마(jute) 위에 흙을 깔고 그 위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에게 흙으로 만든 판은 일종의 벽이다. 그는 벽을 우리의 시간을 머금은 공간으로 상정한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생의 섭리 아래 우리를 둘러싼 벽은 이러한 시간을 기억한다. 따라서 그가 생각하는 벽은 하나의 단단한 덩어리가 아니라 레이어(layer)가 쌓여 만들어진 구조인 것이다. 가장 아래층부터 편평히 바른 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균열을 드러낸다. 그 균열은 화면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배경의 공간감을 선사하는 역할을 한다. 작가는 단단해진 벽의 표면을 긁어내며 이야기를 새긴다. 파인 홈 사이사이로 다양한 빛깔의 안료가 채워지면서 만들어내는 양감은 그의 작업이 가진 촉각성을 더욱 끌어올린다. 또한 그에게 벽은 희뿌연 창처럼 그 너머를 그려볼 수 있고 상상해 볼 수 있는 세계와도 같다. 안료를 황토나 백토와 함께 개어 묽게도, 불투명하게도 만들면서 여러 판을 하나하나 끼워 넣듯 화면을 채우는 방식은 수많은 이야기가 쏟아지는 가운데 우리로 하여금 ‘막’과 ‘막’ 사이의 틈새를 발견하게 만든다. 전시장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수직으로 높게 뻗은 벼락, 끝이 보인다. 높이가 2.5미터에 달하는 이 작품은 아래로 멋지게 점프하거나 위아래를 순환하며 유영하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이들 뒤로는 벼락이, 또 그 뒤로는 불과 연기가 겹쳐진다. 화면의 가장 뒤편에는 장식적으로 보이는 도안(design)이 양옆으로 새겨져 있다. 헤엄치는 군상들은 막과 막 사이를 넘나든다. 2020년 개인전 《PASTRY》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적층의 화면 구성은 그가 꾸준히 탐구해 온 방식이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그에게 도달한 파편적인 서사와 장면들은 ‘페이스트리’처럼 얇게 쌓여 닫힌 세계를 확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 ‘막’들은 서로 조화롭게 구성되기도 하고, 때때로 충돌하기도 하는데 그 중심에 물과 불, 그리고 그 사이 벌의 질서가 나타난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왼편에는 공중에 떠있는 세 개의 흙벽이 자리하고 있다. parodos_비상, epeisodion_춤, stasimon_낙하는 개별적으로도 연속된 이야기로도 작동한다. 인간으로 묘사된 이들은 욕망을 좇는 존재로 은유 되는 ‘벌(bee)’이다. 이들은 그의 지도 중앙부에서 열심히 꿀을 모으며 꼭대기를 향해간다. 이 과정에서 군상은 물길을 거슬러 위로 헤엄쳐나가거나 아래로 다이빙하기도 하고, 불을 가운데 두고 원형으로 돌며 춤을 추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작가는 수영이나 달리기, 장애물 넘기 등의 스포츠 경기에서 차용한 장면들로 다양한 안무를 만든다. 우민정의 작업에서 ‘춤’은 단순히 조형적 동작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승과 하강 사이에서의 긴장감과 역동성, 리듬감을 드러내는 유기적인 흐름을 의미한다. ‘비상’과 ‘낙하’ 역시 그의 작업에서 시작과 끝이라는 선형적 구조가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고 되돌아가는 순환을 나타내고 있다. 불을 만나 재가 되어버리고 나면 끝이 날 줄 알았지만, 그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맞이할 수도 있는 희망과 생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글쓰기를 ‘죽기를 배우는 것’으로 비유하기도 했던 엘렌 식수가 그랬듯 우리는 “밖으로는 죽음을 친구로 받아들이고 내 안에 살아있는 망자를 품고 사는 것”일지 모른다.

“저울로서의, 지렛대로서의 십자가. 상승의 조건으로서의 하강. 땅으로 내려오는 하늘은 땅을 하늘로 들어 올린다. (…) 올라가기 위해서는 낮아져야 한다”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중]

우민정은 불에 닿은 ‘벌’이 마주한 두 개의 선택지를 이야기한다. 높이 올라가고자 했던 열망 끝에 추락하게 된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는 이 추락이 적극적이고도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한다. 낙하에서 벌들은 이보다 아름답게 떨어지는 장면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유연한 몸짓으로 헤엄쳐 내려온다. 비상, 춤, 낙하로 번역된 한국어 앞에 붙은 원어들은 그리스 비극(tragedy)의 구성요소다. ‘파로도스(parodos)’는 관객들로 하여금 극에 몰입할 수 있는 시작 단계를 의미하며 ‘에페소디온(epeisodion)’은 우리가 에피소드(episode)로 알고 있는 단어의 어원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연극의 막을, ‘스타시몬(stasimon)’은 이야기의 흐름 안에서 다 같이 부르는 합창을 의미한다. 중력이 묶어두는 힘과 이에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 사이를 오가는 반복되는 순환과정에서 누군가는 불나방처럼 저 끝을 향해 올라갔을지도 모른다. 불을 만나 다시 중력의 힘 안으로 내려오는 것은 비극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비극은 희극이 될 수 있고 희극 역시 비극이 될 수 있는 요소를 가진다. 이처럼 ‘벌’들이 자유롭게 낙하하는 것은 어쩌면 다시 올라가기 위한 또 다른 도약일 수 있다.

 

이러한 순환 과정 속에서 우민정은 불과 함께 춤을 추는 존재들을 그린다. 전시장에 안쪽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가장 왼쪽부터 오렌지 껍질, 탄 종이, 깨진 유리 세 점으로 이루어진 순결한 것들이 있다. 개별 작업처럼 각각의 제목이 붙어 있지만, 유려한 곡선으로 이어지는 춤의 향연은 이들을 연결한다. 각 화면 가운데는 검은 불한 송이가 놓여있다. 이를 중심으로 인간 군상은 서로 손을 맞잡고 원형의 춤을 추고 있다. 이들은 불을 둘러싸고 곡예를 펼치듯 화면을 무도회 공간으로 바꿔놓았다. 사람들은 보통 무언가를 열망하면서 그것을 얻는 순간까지 기대와 상상을 품는다. 달콤한 향에 이끌렸지만, 막상 오렌지 향이 잔뜩 밴 껍질은 쓰다. 이러한 기대가 헛된 것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우민정이 말하는 그 ‘순결한’ 의미에 가까이 다가가 볼 수 있다. 반짝이는 유리 조각은 깨져 흩어지고, 타버린 종이는 재가 되어 부유한다. 아름다운 추락이 아닌 다른 선택지는 바로 가장 낮은 자리에서 모든 것을 비우는 것이다. 우리 안에 창조된 것은 파괴해야만 그 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는 시몬 베유의 말처럼 불에 타버린 ‘재’는 바로 이런 초월의 영역-은총에 다가가는 과정이다.

 

 

순결한 것들_탄 종이, 마, 황토, 백토 위 혼합재료_150x110cm, 2024

 

 

“우리 모두는 나 아닌 것으로부터 왔다”

그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보내준 첫 문장이다. 우리 존재들은 서로가 서로를 구성하고 지속적으로 재규정해 나간다. 나는 나로서만 구성될 수 없는 존재다. 우민정에게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자아를 덜어내고 모두 소거하는 여정이다. 마치 중력의 힘을 벗고 부유하는 몸짓은 그런 나와 우리를 둘러싼 관계를 비로소 보게 만든다. 만다라는 화면 중앙에 섬세한 세필로 그려진 불을 중심으로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군상이 바깥을 향해 확장되는 형상의 작업이다. 우주의 구조를 상징하는 원형을 돌고 돌며 수행하듯 이들은 양손과 발을 붙이고 몸을 포개며, 불을 쥐고 있거나 연기와 향(香)을 가지고 한쪽 발을 뒤따라오는 이들의 이마에 붙이며 원형 대열에 합류한다. 이들을 보고 있으면 고요한 이미지에서 어떠한 선율이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인간 군상은 ‘벌’의 무리로 펼쳐지고, 작가는 이들의 움직임을 박제하려는 듯 연속선상에 놓고 여러 차례 반복해서 그린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같은 모습인 듯 보이지만 미묘하게 다른 형상이다. 멀리서 볼 때 우리들 역시 모두 비슷해 보일 수 있는 것처럼 작가는 이를 두고 내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다른 사람이 내가 될 수도 있지 않겠나 라는 상상을 해보곤 했다고 말한다. 그가 자아를 벗어내려는 것도 결국 우리 존재를 초월하기 위한 시도이다. 이들의 다채로운 면모와 구성은 관람자로 하여금 손을 맞잡고 춤추는 군상들의 리듬에 합류하여 함께 걸어가듯 시선을 움직이게 만든다. 더불어 검게 타고 있는 불을 포착한 시선과 달리 중력과 겨루는 이들의 몸짓에는 마치 위에서 내려 보는듯한 시점이 부여된다. 이렇듯 그의 작업은 하나의 고정된 시점을 만들어내지 않는 평행적 배열을 통해 각각의 존재를 살필 수 있도록 만든다.

그의 지도에 등장하는 모든 도상은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각각이 지닌 상징을 해석하고 구조를 해체하는 것은 감상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우민정의 작업에서 서사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의 작업을 단순히 ‘서사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싶지는 않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한데 모여 있을 때의 종합적인 분위기다. 그의 작업에서 종종 도상들은 마치 화면 너머의 공간으로 이어지는 듯 묘사된다. 때로는 액자 속 이야기로 보이게끔 밧줄 혹은 식물의 모티프는 외곽선을 따라 그려지기도 하고 배경에 새겨지기도 한다. 이것은 마치 지도 속 실마리 역할을 할 것 같은 기대감을 주며 화면을 더욱 상세히 관찰하게 만드는 전략이 되기도 한다.

우민정은 그간의 작업에서 부조와 같은 입체감을 가지면서도 평면이라는 프레임을 벗어나지 않았다. 벽 너머를 향하고자 했던 작가의 열망은 2차원의 평면 안에서 이어지는 공간을 만들었고, 이는 지난 2023년의 개인전 《연금술사의 기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실제 공간을 점유하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에서도 ‘동(銅)’으로 만들어진 기둥을 살펴볼 수 있다. 이들이 ‘금(金)’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불과 만나야만 한다. 연금술은 우주의 기본이라고 믿었던 4대 원소- 공기, 물, 불 흙을 연합하여 금을 만들기 위한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이들은 금이라는 결과물보다 그것으로 향하는, 그것이 되고 싶은 마음에 집중한다. 우민정은 오랫동안 위로 향하는 것에 집중했었다. ‘금’이 되기 위해, ‘빛’에 닿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올라가고자 했었다. 그는 중력에 대항하며 상승과 하강이라는 순환의 여정을 연금술이라는 상징과 결합시킨다. 이 과정에서 그림 속 이야기는 ‘질료’로서 벽 밖으로 나온다. 연금술의 진짜 목적은 금으로 향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제련하는 것에 있다. 우민정이 연금술을 차용한 것도 바로 이러한 지점이다. 금이라는 단순한 형질의 변화가 아니라 그 과정에 내재되어 있는 열망과 의지를 통해 비로소 닿게 되는 초월적 순간들을 마주하는 때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우민정은 지도의 가장 높은 곳까지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목표를 이루었다. 이것이 이야기의 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중력에 저항하며 저 너머를 향해 가고자 하는 과정에서 반복되는 추락은 우리의 삶의 여정을 은유하는 모습일 수 있다. 그의 작업 안에서 ‘재’가 되어버린 존재는 소멸이 아닌 생성을 말하는 것임을 이제 우리는 안다. 이는 욕망을 좇다가도 버리고 비워내는 수련의 여정을 통해 남은 ‘재’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이유이다.

 

최지혜(독립기획자/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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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41206-우민정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