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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눈 展
불안정한 배치들
Unstable Arrangements
포켓테일즈
2024. 11. 26(화) ▶ 2024. 12. 14(토)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157, 9F
https://pokettales.com
이번 회화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이미지에 대한 규칙과 제한을 풀어버렸다. 전에는 최대한 인식이 가능하고 서사가 없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대했는데, 이런 방식에 의문을 느껴 좀 더 내 삶과 연계된 이미지를 혼합해, 화면 안에서 자율적으로 구성되도록 내버려 두었다. 좀 더 알아들을 수 없고 이기적인 방식으로 작업해 보기로 했다. 이는 회화가 어디까지 다다를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이 들어서였기도 하고, 결국에는 내 시선과 삶을 저며 전시하는 것과 회화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서였기도 하다. 내가 일관되게 생각하는 회화는 나라는 확신할 수 없는 개체의 시선으로 본 세상을 담는 것이었다. 확신할 수 없는 개체가 보는 의심스러운 세상은 오히려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하기 때문에 의미화된 것들을 쉽게 벗겨낼 수 있다.
대상과 사람들이 내게 강하게 의미를 주는 순간에 그 의미와 충격적 감각을 벗겨내는 것은 충격에 매몰되지 않고 풍경을 샅샅이 보기 위한 나의 발버둥에 가깝다. 대상을 처음 보는 것처럼 관찰하고 이 대상이 내게 왜 기묘한 감각을 주는지 곰곰이 생각하다 의미들을 차차 벗겨내다 보면 대상은 점점 처음에 내게 의미를 강요했던 것에서 벗어나 자신의 모습만을 보여준다. 모습만 남게 되면 대상은 껍데기처럼 얇아지고 내게 납작한 재료가 된다. 재료가 된 이미지는 내게 색종이처럼 놀이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굴러다니며 다른 이미지와 뒤섞이고 끝말잇기처럼 서로 연동돼 새로운 풍경을 재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
그럼 내게 충격을 주는 대상과 풍경이란 어떤 것일까? 주로 평이한 대상이 갑자기 다르게 인식될 때인 것 같다. 처음 보는 대상이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을 때라던가, 대상에 부여되어 온 의미를 돌연 비웃고 싶을 때같이. 예를 들어 최근에 자살 방지용 난간이 눈에 들어온 적이 있다. 난간은 자세히 보면 생김새가 우스꽝스러운데, 마치 손을 뻗어 뛰어내리려는 사람을 막으려는 팔 같았다. 그러나 그 높은 높이에도 불구하고 사이사이는 충분히 넓어 바람이 휑하게 통하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키보다 높은 난간이 사람을 덮칠 듯이 가로막지만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점이 내가 당시 느끼고 있는 세상의 웃긴 점이었다. 그것은 웃긴 껍데기에 가까웠다. 이름은 자살 방지용 난간이지만. 나는 난간을 만든 세상을 비웃고 싶다고 생각했다. 주로 낄낄거리고 싶은 마음은 야릇한 충동으로 다가와 그 대상을 사진 찍고 더 얇게 저미게 만든다.
그 외에도 최근 끌리는 소재는 크록스, 모여있는 사람들, 매나 고양이의 눈, 엮인 나무, 멧돼지 같은 것의 가죽, 섞은 물, 일몰 같은 것이 있다. 이것들은 내게 야릇함, 슬픔, 강렬함,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사실 그 대상들에는 큰 의미가 없고 그저 존재할 뿐임에도 말이다.
사물들이 전해주는 감응은 주로 그 사물에 부여되어 온 사회적 메시지, 그 사물과 얽힌 사람들의 일화, 매체에서의 쓰임이 복합적으로 한 번에 내게 다가올 때 발생한다. 이번에 그린 크록스 그림을 예로 들어보면, 그림에서 등장한 크록스는 내 아버지의 낡은 신발이다. 나는 그 크록스를 지켜보면서 불쾌감을 느끼고는 했다. 일단 형태가 못생긴 데다가, 아버지가 그걸 신고 맨발 걷기에 나서고는 했기 때문에 안과 밖이 흙으로 뒤 덥혀 지저분 했다. 크록스에는 아무 의미도 없겠지만 나는 그 신발을 보면서 노년 남성의 생에 관한 슬픔과 애착을 동시에 느꼈던 것 같다. 이 남색 크록스는 내게 그런 불쾌하고 슬픈 대상이다. 이런 대상을 마주할 때 간혹 그 대상에 눈을 떼기가 어렵다. 그 밀려오는 복합성- 인체공학적이라고 하면서도 나름 저렴하고 한철을 나기 꽤 쓸만한 신발-이 대상에 여러 겹 씌워 혼란스럽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나는 그럴 때 정확한 끌림의 이유를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단은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두고 그걸 드로잉 해보면서 왜 내게 감응을 주는지 생각한다. 드로잉은 이때 의미를 비워내면서 대상을 관찰할 수 있게 하고 그 대상과 나의 거리를 좀 더 멀찍이 떼어내 흘러들어오는 여러 의미들을 인식하고 의심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을 회화로 다시 옮기는 것은 그중에서도 내게 강렬한 이미지, 의미로 압도하는 이미지 일 경우에 발생한다. 그러나 드로잉보다 한 번 더 시간차가 발생하기 때문에 회화로 옮겨지면 처음 대상을 봤던 경험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그때 회화 안에서 대상은 드로잉에서 납작해진 상태보다 더 납작해진 상태로 그림에 안착되는데, 그때는 의미에서 거의 완전히 벗어나 대상은 그냥 대상의 형태만 가지고 있게 된다. 나는 그 재료로 기능하는 상태의 이미지를 그림에 두고 다른 이미지와 섞어가면서 다른 맥락으로 화면을 전환시킨다. 회화에서 대상은 처음의 의미가 아예 없어지고 나는 그 대상을 비웃으며 놀이와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림은 이제 새로운 이야기로 나아갈 수 있는 장이 되었고 나는 여러 의미에 전혀 억눌리지 않은 채로 대상을 대할 수 있게 된다. 그제야 나는 일상에서의 압도되는 감응, 죄책감, 억눌림과 전혀 상관없는 상태로 나아가 회화에서 자유를 찾을 가능성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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