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야투자연미술국제레지던스프로그램 성과보고전

 

대칭적 균형 (Symmetry) 展

 

김대성 Kim Daesung (한국) · 김성헌 Kim Sungheun (한국)

김은지 Kim Eunjee (한국) · 김인숙 Kim Insuk (한국)

호스로 아디비 Khosro Adibi (네덜란드) · 허태진 Hur Taejin (한국)

 

 

 

연미산자연미술공원

 

2024. 11. 9(토) ▶ 2024. 11. 30(토)

충남 공주시 우성면 연미산고개길 98 | T.041-853-8828

 

www.yatoo.or.kr

 

 

여섯 작가의 시선으로 맞춰보는, 자연과 인간의 대칭적 균형

 

허나영 (시각장연구소 대표)

 

자연으로 나아간 ‘야투’, 그 행위 속 자연 그리고 미술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 공주 인근 금강변에 모였던 젊은 예술가들은 자신을 자연으로 던졌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행위를 ‘야투(野投)’, 즉, ‘들에서 던지다’라는 뜻으로 불렀다. 처음, 이 용어는 야구의 용어에서 가볍게 가져왔다 한다. 하지만 점차 ‘야투’는 충남지역에서 전위적인 작업을 하는 예술가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야투의 시작은 기성세대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고, 중앙과 지방간의 이분법적인 위계에 대한 부정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회화나 조각과 같은 전통적인 장르에 대한 반발이었다. 캔버스에 그려야만 회화인 것도, 대리석을 다듬어야만 조각이 되는 것도 아니다. 회화의 시작은 벽에 그린 낙서였고 흙으로 조물거리며 만든 조각상이 있었다. 또한 모든 예술작품을 실내에서 감상해야하는 것도 마치 신상과 같이 숭배야햐는 것도 아니며, 영원불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스스로 그렇게 있는 자연(自然)’처럼, 그렇게 그 자리에서 만들어지고 변해가다가 사라질 수도 있다. 이러한 생각이 야투의 행위에 녹아있었다. 그렇게 야투는 금강변에서 40여년의 시간동안 그 형태와 범위를 변형해가면서 예술활동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야투의 예술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그들은 스스로 ‘자연미술’이라 부른다. 자연과 미술이라는 다소 모순적인 두 단어가 붙어 있다. 미술은 인간의 의도와 손길이 닿아야하는 인공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미술’이라는 용어에서는 서로 수식하지도 않는다. ‘자연적인 미술’도, ‘미술 같은 자연’도 아니다. 그저 자연과 미술이 대등하게 함께 한다. 그래서 자연을 ‘대상’으로 둘 수도, 자연을 ‘도구’로 사용할 수도 혹은 자연에 미술을 ‘두는 것’일 수도 있다. 야투의 지난 40여 년의 활동은 작가와 작업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모든 것을 포괄한다. 그러한 야투의 자연미술은 정의를 어떻게 하든, 지난 시간 동안 사회, 문화적 풍파에 흔들리는 자연과 미술가들이 나름의 균형을 찾는 방식이었다.

야투의 젊은 예술가들은 저마다의 생각을 자연 속에서 펼쳤고, 국내의 다른 지역뿐 아니라 해외에도 자신들의 작업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다른 나라와 타지역에서 뜻이 맞는 예술가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여러 장소를 오고 가며 자연미술을 했다. 지역에 상관없이 이들의 예술을 함께 즐긴 사람들이 있었고, 반대로 여전히 이해 못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다 전 지구적 위기가 왔다. 구체화한 것은 팬데믹이었으며 현재 진행 중인 기후위기이기도 했다. 이제 지구상의 누구도 자연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동안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연미술을 해왔던 야투의 행위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게 되었다. 그중 2024년 금강과 연미산 인근에서 레지던스에 참여한 예술가들도 있었다.

 

2024년, 자연과 미술의 대칭적 균형

 

야투자연미술국제레지던스프로그램은 국내외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야투 예술가들이 작업을 했듯이, 금강변과 연미산을 중심으로 작업을 구상하고 제작하며 그 결과를 작품으로 설치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번 레지던스에서는 총 6명의 작가들이 참여하였고, 저마다 각기 다른 재료와 방식으로 작업을 하였다. 그렇지만 모두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을 작품의 주된 소재로 사용하였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연을 바라보고 표현했는 지, 그리고 자연과 어떻게 대칭적 균형을 이루고 있는 지를 작가별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자연을 들여다보다.

 

이번 레지던스의 결과 작업들은 모두 연미산자연미술공원에 설치되어 있다. 연미산은 금강인근에 있는 곳으로, 레지던스 결과전이 열린 가을날엔 아름다운 단풍이 물들어 있었다. 이렇듯 아름다운 산이나 강과 같은 자연을 우리는 관찰의 대상으로 보고 들여다보곤 한다. 사진작업을 한 김대성은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여러 각도의 시선을, 규방공예를 하는 김인숙은 작은 창으로 바라보던 자연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김대성 作 (한국)_Tree Amidst the Forest_70x100(H)cm_2024

 

 

김대성_동시에 바라본 자연물

김대성은 파리8대학에서 조형 예술을 전공하면서 풍경 사진을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점차 실험적인 사진 기법과 개념적인 접근으로 관심을 넓혀왔다. 이번의 작업 <잠상의 집합>에서는 어떠한 자연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여러 각도를 동시에 보여주고자 했다. 이를 위해 나무, 버섯, 풀 등을 360도로 돌면서 사진을 찍었다. 대략 50~60장 정도의 사진이 나왔는데, 그 사진들을 디지털 편집을 통해 중첩한 결과물을 선보였다.

결과적으로 본래의 대상인 나무나 버섯, 풀의 형태와는 다른, 이미지의 잠상과도 같고 회화적 붓질과도 같은 독특한 이미지가 나타났다. 아무리 아름다운 소나무를 보고, 가장 멋있어 보이는 방향으로 사진을 찍는다고 해도, 그 나무의 모든 것을 담아낼 수는 없다. 그저 파편적인 한 모습일 뿐이다. 그리고 아마도 어떠한 전형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대성의 이번 작업에서는 자연물들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경험을 제시하였다. 그 이미지는 언젠가 지나쳤던 자연의 한 잠상과도 유사하기도 하고, 잊었던 어떤 감정을 유발할지도 모른다.

김대성은 인터뷰를 통해서 이번 야투 레지던스를 통해서 사진적 행위에 집중했던 기존 작업에서 자연을 주제로 한 새로운 작업의 방식으로의 전환점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번 작업을 통해서 이후 다양한 시각 뿐 아니라 시간에 따른 변화 등을 포착하고 싶다는 계획을 제시하였다.

 

 

김인숙 作 (한국)_소통_모시, 면_90x170(H)cm_2024

 

 

김인숙_자연의 창으로 바라본 세상

김대성이 자연을 바라보는 다각적인 관점을 사진으로 표현했다면, 김인숙은 어린 시절 할머니 집 창호에 있던 작은 유리를 통해 바라보던 시선을 규방공예로 나타냈다. 모시, 비단, 면과 같은 자연에서 유래한 직물을 손으로 한땀한땀 바느질을 하는 규방공예를 해오던 김인숙은 이번 레지던스를 통해서 예술적 시도를 하였다.

작가는 추운 겨울, 아궁이에 불을 때고 화롯불을 피운 훈훈한 방 안에서 창호지 문 사이에서 오로지 밖을 볼 수 있는 작고 네모난 유리창 하나로 바깥의 눈과 바람을 바라보았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한다. 추운 겨울이 오기 전 새로이 문에 바른 창호지에는 마른 나뭇잎과 꽃이 함께 붙어 있고, 따듯한 온기를 느끼며 바라본 자연은 더 없이 아름다워보였을 것이다. 이 기억을 김인숙은 네모난 조각천으로 만든 보자기에 난, 작은 사각의 구멍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나뭇잎을 매달아, 그 시절의 기억을 소환했다. 또한 조각보가 된 비단의 명주실을 만든 누에고치를 함께 설치하면서, 이 모든 작업이 자연에서 유래한 것임을 함께 보여주기도 하였다.

 

 

2. 자연을 마주치다.

 

이번 레지던스에는 독특한 이력의 작가 호스로 아디비가 참여하였다. 아디비는 이란출신으로, 네덜란드로 이주하면서 예술가가 된 작가다. 그는 팬데믹이 시작된 후 2020년 10월부터 네덜란드에서 자전거로 여행을 시작하면서 세 대륙의 25개국을 여행하면서 자신이 마주친 자연을 예술로 표현하고 있다.

 

 

호스로 아디비 Khosro Adibi 作 (네덜란드)_눈_돌_180x90x200(H)cm_2024

 

 

호스로 아디비(Khosro Adibi)_자연 속의 삶

아디비는 자신을 ‘유목민’이자, ‘자연의 아이’라 표현한다. 고향을 떠나 이주를 해야 했고 새롭게 정착한 네덜란드에서 자신의 신체와 예술을 연결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으로 진정한 유목인의 삶을 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의 친절에서 따듯함을 느꼈고 자연 속에서 치유를 했다. 그러면서 땅의 아름다움과 친절함을 경험했다고 한다.

두 달 가량 레지던스에서 머물면서 작업한 <눈(The Eye)> 역시 우연히 마주한 돌로부터 시작되었다. 본래 이응우 작가가 작업에 사용했던 돌 중에 하나로, 시간이 지나면서 설치되었던 방식과 달리 흩어져 있었다. 자연석이었지만 예술품이었던, 그리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 그 돌을 가지고 와 설치하고 가운데를 드릴로 뚫었다. 뚫린 구멍의 끝은 공주의 전설 속 ‘곰’ 조형물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드릴로 구멍을 뚫는다는 것은 자연을 거스른 인공적인 행위이다. 그래서인지 마지막에 금이 갔다고 한다. 그러자 아디비는 이것이 돌이 자신에게 준 메시지 일 거라 생각하고 고치지 않고 남겨두었다. 작가는 자연을 통한 치유를 믿고, 그 과정에서 지구와 인간을 연결할 수 있는 어떠한 힘을 예술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아디비는 레지던스를 마친 후 일본으로 갔다. 이후에도 자전거를 타고 계속해서 여정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한다.

 

 

3. 자연을 해석하다.

 

자연은 그저 우리와 다른 무언가가 아니다. 인간 자체도 자연에 속하며,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아무리 대도시에서만 나고 자란 사람이라도 자연과 자연물은 익숙할 수밖에 없다.

 

 

허태진 作 (한국)_Flying_알곤 용접, 스테인리스 스틸_50x30x220(H)cm_2024

 

 

허태진_자연물 형태의 재현

허태진은 스테인레스 스틸로 자연물을 재현한다. 하지만 그 형태를 그대로 똑같이 모방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만의 해석을 기반으로 재현한다. 허태진은 자연물의 형태에 내재한 아름다움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그에게 있어 자연의 아름다움은 인간 내면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며, 이를 통해 자연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한다.

이번에 제작한 <Flying>은 동그란 씨와 한 개의 날개가 달린 단풍나무 씨앗을 모티브로 삼았다. 실제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는 씨앗처럼 공중에 매달았고 전체적인 형태 역시 단풍나무 씨앗과 같이 구성했다. 하지만 그 내부는 작은 낙엽 모양의 기본 단위로 채웠다. 때가 되면 무르익어 모체가 되는 나무에서 떨어져 날아가고, 또 다른 터에서 새롭게 자라나는 씨앗처럼, 희망을 갖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보는 이가 자연에서 느끼듯 쉴 수 있고 안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표현하고자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허태진은 나뭇잎의 형태를 기본 단위로 해서 인간이나 동물을 만들어왔으며, 앞으로도 자연을 소재로한 작업을 진행하고자 한다.

 

 

김은지 作 (한국)_스컬피 클레이, 나일론 실_56x56x121(H)cm, 5EA_2024

 

 

김은지_자연으로서 인간 그리고 여성

김은지는 자연으로서 인간, 그리고 그중에서도 생명을 낳는 여성의 버자이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보여주고자 한다. <버자이너(The Vagina)> 연작의 시작은 십여 년 전 미국 뉴욕에서부터였다. 여성의 생식기이기도 하지만, 모든 생명이 탄생할 때 통하는 기관이기도 한 버자이너는 생물학적 특성 이전에 사회·문화적인 맥락 속에서 그 의미가 곡해되곤 한다. 김은지 역시 이 지점에 주목하면서, 그러한 맥락과 상관없이 자연적 본연의 버자이너를 대면하고 그 자체를 수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더불어 엄마가 되고 아이를 키우면서 생명의 잉태로서 그리고 여성의 신체 일부로서 버자이너를 볼 필요성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어둡고 은밀하게 감춰지는 이 신체기관을 당당히 존중의 시선으로 관찰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이번 레지던스에서 제작한 <버자이너>는 스컬피 클레이(Sculpy clay)로 손으로 만든 100피스의 버자이너를 캐비넷에 매달았다. 작은 캐비넷 안에 떠 있는 하얀 버자이너는 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는 모든 여성의 신체와 정체성이 다르다는 것 그리고 여러 생명이 탄생하는 상징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자연의 바람과 햇빛을 간혹 받으면서 버자이너는 각기 하나의 소우주가 된다.

 

 

4. 자연을 지속하다.

 

자연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고 생각되곤 한다. 유유히 흐르고 있는 금강, 사시사철 옷을 바꿔가며 서 있는 연미산도 그렇다. 하지만 자연이 더 이상 예전처럼 지속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최근 인류는 절실하게 체감하고 있다. 그러면서 오래전부터 많은 이들이 경고해왔던 기후위기를 그냥 무시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 금강변에서 이루어졌던 자연미술에 대한 관점이 달라지기도 했다. 자연에 대한 중요성이 커지면서 이제 생태미술의 관점으로 자연미술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40여년전부터 자연을 중요하게 바라봤던 야투의 관점에 대해 놀라움을 표하면서 말이다.

 

 

김성헌 作 (한국)_폐플라스틱, 크리스탈 레진, 태양광 지중등_14.4x14.5x60(H)cm, 12EA_2024

 

 

김성헌_지속가능한 자연미술의 제시

김성헌은 1994년 대학생 때 자원봉사 참여한 이후 야투 활동에 여러 방식으로 함께 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레지던스에서 자신의 관점을 작품으로 풀어내었다. 김성헌은 2004년부터 환경에 관심을 가져왔다. 특히 환경오염의 메시지를 작가로서 대중에게 어떻게 절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사실 많은 생태미술활동이 있지만, 어떤 작업들은 그 행위 자체가 오히려 환경오염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렇다고 온전히 사회운동가나 환경운동가로서 활동하는 것은 시각예술작가와는 간극이 있다. 그러한 점에서 김성헌은 재생과 재활용을 통한 대안적 방식을 고민해왔다. 그러던 중 2021년부터 폐플라스틱을 활용한 작업을 해왔으며, 이번에도 그 일환으로 <재생의 빛+지속의 길=희망>을 제작하였다.

<재생의 빛+지속의 길=희망>은 폐플라스틱과 태양광 에너지를 활용하는 지시등으로 만들어 연미산자연미술공원에 설치한 작품이다. 김성헌은 폐플라스틱이 이미 지구상에 만연한 만큼 쓰레기가 아닌 ‘광물’로 재정의하여, 이를 활용하였다. 쉽게 버려지는 펜 깍지, 페트병, 플라스틱 병뚜껑, 알루미늄 캔 등을 분쇄하고 이를 색깔별로 분류하여 이를 지시등의 투명한 육면체 안에 조형적으로 쌓았다. 그리고 분류가 힘든 것은 섞어서 압출기를 통해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렇게 폐플라스틱을 활용한 조형을 지시등으로 만들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면서 자연에 효율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게 하였다. 이를 통해 인공적인 미술과 자연이 조화를 이룰 수 있기를 희망하며, 앞으로 인간과 자연이 함께 하는 지속가능한 삶에 대한 메시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2024 야투자연미술국제레지던스프로그램 입주작가

 

 

기후위기 속 자연과 미술, 그리고 인간

 

전 지구가 2년여간 휘청였던 팬데믹은 지났지만, 기후 위기에 대한 걱정은 끝나지 않았다. 걱정을 넘어 곧 지구에서 인간이 공룡처럼 멸종할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공포가 담긴 경고도 나오고 있다. 그 위기의 크기가 얼마큼인지, 그리고 마지막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인간이 지구가 더이상 버틸 수 없는 시점으로 시간을 빨리 돌렸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오히려 그 시계를 인간이 더 느리게 더 나아가서 거꾸로 돌릴 수 있다고도 말하기도 한다. 그간 인간은 자연의 가치를 도외시했고 자연환경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간과했다. 인간과 자연, 그 사이 힘의 균형이 깨졌던 것이고, 다시 하루라도 빨리 그 균형을 잡아야할 것이다.

이번 레지던스에서 제작된 작품들은 그 대칭적 균형을 찾아갈 수 있는 각기 다른 시각을 전달하고 있다.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김대성은 다양한 시점의 사진을 동시에 보여주었고, 김인숙은 추억의 작은 창으로 바라본 자연을 바느질로 재해석하였다. 그리고 호스로 아디비는 직접 자전거를 타고 세계 각국에서 마주한 자연을 예술작품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허태진은 단풍 씨앗을 스테인레스 스틸로 재해석하여 재현하였고, 김은지는 생명이 탄생하는 여성의 신체기관으로서 버자이너의 조형을 직면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김성헌은 자연과 함께 지속가능할 수 있는 예술로 폐플라스틱을 활용한 지시등을 연미산에 설치하였다. 이들의 작업은 과거 야투의 시작점에서의 작품과 다르면서도 닮아있다. 초기 야투의 정신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 지에 대한 판단을 지금 논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보인다. 적어도 이들은 레지던스에서 활동하면서 연미산과 금강을 오고가며 직접 그 자연을 느끼고 자신만의 시각언어로 풀어내었다는 점에서 야투와 닮아있다. 그리고 야투의 자연미술과 다른 관점은 오히려 내일의 야투가 나아갈 수 있는 또 다른 방향이나 길을 제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을 품고 그저 그곳에서 변해가는 금강과 연미산처럼, 자연은 인간과 함께 하며 그 곳에서 묵묵히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지난 잘못을 깨달은 인간은 그러한 자연의 너그러움과 친절에 감사하며, 과오는 고치고 보다 평화로운 미래를 꿈꾸며 묵묵히 오늘의 자연을 즐겨보는 것도 좋을 거 같다. 연미산에서 자연과 함께 변화하고 있는 자연미술작품들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그렇기에 야투의 내일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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