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혜영 展

 

다시 불러낸 시간

 

 

 

 

2024. 11. 8(금) ▶ 2024. 11. 29(금)

관람시간 | 12시-18시 | 월요일 휴관

서울특별시 마포구 잔다리로 70 | T.010-8782-0122

 

www.a-bunker.com

 

 

물질도감 202320_Graphite Pencil_34x47cm_2024

 

 

벽을 넘어, 시간 속으로

 

작품은 작가의 이야기이다. 개개의 사람들에게서 흘러나온 다양한 이야기들은 우주를, 꿈을, 때로는 예술 자체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지속되며 이 이야기들은 어쩔 수 없이 이야기의 화자(話者), 작가 자신을 담게 된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거나 처음부터 그를 이야기의 중심에 놓는 작가도 있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서혜영의 작품은 오랫동안 그녀 자신의 모습보다는 작가가 고민하고 바라보는 지향점을 향하고 있었다. 꾸준한 작품활동의 궤적 속에서 관객은 작가 서혜영의 모습을 만나왔지만 인간 서혜영의 삶, 시간과 온도는 마치 그녀의 작품 속 경계 너머에 있는 듯 어슴푸레하게 모습을 드러낼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번 A BUNKER의 전시는 서혜영이라는 인물이 한층 사적이고 개인적인 색과 온도를 경계 밖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간 서혜영의 많은 작품들은 선과 벽돌로 만들어진 구획, 공간을 특징으로 했다. 끝없이 반복되는 벽돌은 중첩되어 벽을 쌓고 공간을 나눈다. 벽돌이란 우리가 집을 짓는 여러 재료 중에서도 참으로 효율적이며 획기적인 방식이다. 벽돌은 벽을 만들 때 쓰는 인공 돌이라는 뜻으로 벽돌이라는 이름을 가진다. 서혜영은 “벽돌을 쌓는 행위”가 인간이 물리적 환경을 극복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는 점에 흥미를 가졌다. 즉 벽돌에는 자연물을 사용하여 주어진 대로 자신을 맞추어 살아가던 인류가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공간을 구축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 단단하고 높은 철옹성 같은 요새도, 늑대의 입김에 날아가지 않는 아기돼지의 집도 벽돌로 만들어졌다. 벽을 쌓는 것은 외부와는 구분되는 경계를 만드는 일이다. 서혜영은 사물이나 상황이 구분되는 벽, 서로 긴밀한 접점을 가지고 팽팽하게 맞닿아 있는 경계를 끝없이 관찰하고 이를 만들어 왔다. 끝없이 벽을 만드는 일, 무엇이 그녀를 20년 넘게 그 벽, 경계에 집중하게 한 것일까?

 

 

물질도감 202421_Cellophane on Graph Paper_25x31cm_2024

 

 

작가 박완서는 그녀의 산문집 『못 가 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대답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했던 시기를 거치며 잃어버린 내 정체성…” 이라 자신의 젊은 날을 돌아본다. 서혜영은 작가로 데뷔한 초기에 IMF를 겪었다. 유학에서 돌아오자마자 개인전을 열며 적극적으로 작가활동을 시작했지만 90년대와 2000년대 초기 한국에서 여성이 작가로 살아남는 일은 쉽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육아와 가정생활, 그리고 작가로의 삶 가운데 그녀는 끝없이 시간을 계획하고 계산하며 나누어 써야 했을 것이다. 모체에게서 떨어져 나온 새로운 생명은 기다리지 않고 성장한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매일 식사시간은 찾아오고 그날의 해결과제들이 쌓인다. 서혜영의 벽들은 그녀가 넘어왔던 시간 속에서 매일 지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온 과정이 아닐까? 쉼 없이 흘러가는 육아와 생활이라는 시계 앞에서 서혜영은 아내, 딸, 엄마가 아니라 작가인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기 위해 성실하게 벽돌을 쌓아왔던 것이다.

 

2003년 제작한 <유비쿼터스> 연작에서 서혜영은 수태고지의 도상을 선택했다. 작품속에는 색채도 형태도 다 지워진 채 천사 가브리엘에게 계시를 받는 마리아의 형태만 남아 있다. 비슷한 시기 제작되었으나 전시되지 못했던 <숨겨진 차원 - 산수>와 <숨겨진 차원- 책거리>는 신윤복의 미인도 속 여인의 도상으로 <유비쿼터스> 연작과 동일하게 이미지는 지워지고 형태만 남아있다. 이 작품 속 여성들은 각기 그려진 시기도, 국가도, 신분도 확연히 다르지만 형태만으로도 여성임을 확실히 드러낸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공간속에 홀로 떨어진 듯 외부와 섞이지 않고 형상을 유지한다. 뾰족한 월출산의 산봉우리들 속에서도, 끝없이 반복되는 책거리 속에서도 작품 속 여성은 그 자신을 내어주지 않은 채 작가 서혜영이 그동안 그래왔듯 자신의 자리를 온전히 지켜내고 있다.

 

 

물질도감 202441_Cellophane on Graph Paper_25x31cm_2024

 

 

매일의 일상을 벽돌 쌓듯 지속해 온 서혜영의 작업은 오랜 기간동안 자유로움과 즉흥성보다는 성실함과 촘촘함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2019년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파리에 체류하며 시작한 <남겨둔 가지> 시리즈를 기점으로 그녀의 작품은 큰 변화를 보인다. 나무의 성장을 돕는 가지치기를 다른 관점에서 “남겨둔 가지”라 이야기하는 프랑스 단어 “prolongement” 가 직접적인 영감이 된 이 작품은 촘촘한 반복 보다는 여유가, 성실함보다는 즉흥성이 돋보인다. 이제 그간 끊임없이 세워 온 벽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진 것일까? 작가로 20년 이상 활동을 지속해오며 자신이 작가라는 정체성을 증명할 필요는 점차 흐려졌을 것이다. 작품들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역할을 남겨두고 홀로 떠난 파리에서 서혜영은 비로소 작가로서 자신을 증명할 대답이 아닌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번 전시에서 전시장 중심에 놓인 <남겨둔 가지 3>는 공중에 설치되었던 이제까지의 작품과 다르게 화기에 담겨 있다. 시간의 흐름을 겪으며 익어가는 벼의 빛깔을 닮은 황동가지는 참새가 부지런하게 지저귀는 풍성한 가을날의 들판을 연상시킨다. 가지가 휘어지도록 열린 열매들처럼 동그란 황동볼이 알알이 바닥까지 가득하게 늘어져 있다. 화기에 담긴 식물은 더 이상 변화가 없기에 일반적으로 정물(靜物 Still Life) 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남겨둔 가지 3>은 화기에 담긴, 정지된 사물 보다는 마치 화기 속에서 계속해서 자라나오는 듯하다. 더욱이 서혜영은 조선시대 백자대호(白磁大壺)를 3모델링으로 재현하여 작품의 일부로 삼았다. 오랜 시간을 담은 자기는 서혜영의 작품 속에서 마치 샘처럼 작품이 자라나는 근원으로 되살아났다. 이러한 풍성함과 대조적으로 <남겨둔 가지 4>는 나지막한 항아리에서 자라나는 듯한 가느다란 가지들이 만들어 내는 선적 조형성과 고요함이 특징이다. 고려시대의 청자 상감 모란무늬 항아리를 모델로 한 화기에서 길게 이어진 검은 철사는 한번 태워져 깊은 검은 색을 가진다. 마치 꽃꽂이하듯 철사를 구부리고 작은 나무볼을 연결한 서혜영의 행위는 그녀가 프랑스에서 만난 “가지를 남겨두는” 정원사의 노동을 연상시킨다. 손으로 직접 하는 노동이 수없이 더해진 이 작품들은 작가의 손을 떠났음에도 여전히 그 온도를 가진 채 다시 자라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물질도감 202463_Dried Horse Chestnut, Brass_5x6x20cm_2024

 

 

서혜영은 조각을 전공했지만 한편으로 꾸준히 평면작업을 해왔다. 작은 드로잉과 조각으로 이루어진 <물질도감> 연작은 한층 자유로워진 그녀의 또 다른 벽돌 쌓기와 같다.유독 오래된 재료들이 많이 사용된 <물질도감> 연작은 모든 물질에 영혼과 고유한 에너지가 들어있다는 작가의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오래된 사물에 그녀의 노동이 더해진 물질도감은 촘촘하게 놓인 자수나 바느질처럼 시간을 머금고 있다. 왁스를 녹이고 흑연가루를 더해 다시금 만든 작은 돌, 말라버린 열매, 철제 부속들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바랜 모눈종이 등. 서혜영은 이들을 다시금 바라보고 만지며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 냈다. 보살핌의 사전적 의미는 ‘정성을 기울여 보호하며 돕는다’이다. 기계나 공장의 힘이 아니라 작가의 손으로 하나하나 자르고 붙이며 만들어 낸 이 작은 작품들은 지나간 시간, 그리고 사물을 다시 불러내고 살펴보는 서혜영의 보살핌이 담겨 있다.

 

서혜영은 작품 활동을 마치 발육되지 않은 자신의 신체의 일부를 키우는 것처럼 일상 생활의 선상에 있는 것이라 이야기한다. 계절이 지나며 어느새 아이들의 키가 훌쩍 커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작가 서혜영의 작품은 성장하고 변화하며 삶을 비추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성실하게 걸어온 한 여성작가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번 전시는 그간 서혜영의 작업실에서 모인 여러 재료와 작품들, 그리고 그들이 다시금 조합되어 보여주는 하모니이다. 작업실에 차곡차곡 쌓인 그동안의 기록과 보물 같은 재료들이 풍성한 가을날의 과실처럼 알알이 쏟아져 나올 서혜영의 앞으로의 작품이 더욱 기대된다.

 

김도연

미술비평, 홍익대

 

 

물질도감 202464_Stone, Bees Wax, Graphite Powder_15x13x18cm_2024

 

 

물질도감 202465_Bees Wax, Graphite Powder, PLA, Cotton Yarn_17x18x20cm_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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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41108-서혜영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