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흠 展

 

물감(物監)을 풀다

 

 

 

갤러리분도

 

2024. 9. 23(월) ▶ 2024. 10. 18(금)

대구광역시 중구 동덕로 36-15 3층 | T.053-426-5615

 

http://www.bundoart.com

 

 

색을 짓다, 빛을 품다

 

건축용 레진몰탈로 개념화되지 않은 색의 비경(秘境)을 탐구하는 작가 최상흠(1964~ )이 갤러리분도에서 열두 번째 개인전을 갖는다.

 

갓 출시한 대형 평면TV의 화면 같은 작품은 오묘한 색상과 손자국 하나 없는 매끄러운 질감으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더욱이 작품이 기계적인 공정의 산물이 아니라 작가가 방독 마스크를 착용하고 레진몰탈과 합을 맞춘 지난한 작업의 결실이라는 데서 놀라움은 배가 된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은 전작(前作)들보다 작품의 투명도가 높고 변화가 뚜렷하여, 빛의 파장을 색으로 응집하며 진화하는 작가의 신작(新作)들을 한 자리에서 비교 감상할 수 있다.

 

불투명한 작품(전작)에서 투명한 작품(신작)으로

최상흠의 작품은 재료와 작업방식부터 특이하다. 재료가 물감과 캔버스가 아니다. 붓으로 채색하지도 않는다. 주재료는 건물 바닥 마감재로서 사용하는 레진몰탈. 여기에 색상을 좌우하는 아크릴물감과 경화를 촉진하는 경화제를 섞어서 세상에 없는 비색(翡色)의 물감을 제조한다. 이를 캔버스 천을 씌운 패널에 붓고 헤라로 펴준다. 그러면 레진몰탈 물감은 논에 물이 들어가듯 낮은 곳을 채우며 저절로 편편해진다. 이를 굳힌다. 다시 20~30회 반복해서 레진몰탈 물감을 붓고 굳힌다. 몸피가 두툼해지면서 색이 영롱해진다. 작가는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변화를 체크한다. 자신이 고안한 레진몰탈 물감과 교감하는 시간이다. 이 과정에서 레진몰탈은 작가에게 숙제를 던지고, 작가는 시간을 두고 숙제에 답한다.

 

전작들은 레진몰탈을 불투명하게 사용한 탓에, 지지체인 패널이 겹겹이 누적시킨 레진몰탈에 묻혔다. 하지만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은 다르다.

 

 

물감(物監) color observed_150x80cm_resin, mixed media on acrylic panel_2024

 

 

우선, 레진몰탈을 투명하게 사용한다. 혼색을 하고 겹쳤음에도 색상이 투명해서 어항 속처럼 작품의 내부가 보인다. 다음으로, 지지체도 나무 패널이 아니라 아크릴이다. 투명 아크릴로 제작한 사각의 틀에다가 내부에는 격자 모양으로 뼈대를 넣었다. 그 위에 레진몰탈을 부으면 아크릴 틀의 구조가 그대로 드러난다. 변화는 더 있다. 전통적인 채색기법인 배채법(背彩法)을 응용하여, 아크릴 틀을 뒤집어서 안쪽에도 레진몰탈을 채웠다. 고려불화나 조선시대 초상화 제작에서 사용한 배채법은 비단이나 종이 뒷면에 채색을 해서 은은한 느낌이 앞면으로 배어 나오게 하는 기법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레진몰탈 물감의 세례를 받은 안쪽 면(아랫면)의 살집이 두툼해지고, 정면(윗면)에서 물감을 누적시킬 때와 다른 표정이 우러난다. 그리고 사각의 틀 가장자리에 조성한 틈에도 레진몰탈을 넣는다. 이때 정면과 안쪽 면의 색상과 틈새의 색상에 차이가 생긴다. 그 미세한 차이가 작품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러한 변주에 힘입어, 이번 작품은 전작과 달리 볼거리가 많아졌다. 특히 두 번째 과정에서 작품은 뜻밖의 조형미로 도약한다. 그러니까 아크릴 틀 내부에 격자 식으로 아크릴을 설치함에 따라 작품이 4~8개의 면으로 구획되었는데, 이것의 의외의 효과를 연출한 것이다. 애당초 격자 식 아크릴은 레진몰탈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게 고안한 장치였다. 내부에 생긴 기하학적인 조형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보는 이들에겐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 전작들처럼 불투명한 작품의 곡면은 그대로이지만 내부에 장치한 기하학적 구조로 인해 보는 즐거움이 늘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눈여겨봐야 할 것은 투명도에 따른 빛의 투과율이 높아져서 색감이 밝아졌음이다. 게다가 사각의 테두리 틈에 더해진 색상은 빛이 측면을 투과하면서 미묘한 색상차를 연출한다. 이로써 우리는 규격화·개념화된 '컬러칩'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비색의 진경을 한껏 누릴 수 있다.

 

측면의 부정성으로 작품을 북돋우다

시방식(視方式)이 바뀌면, 같은 작품도 다르게 보인다. 그냥 매끈한 정면만 볼 때와 측면에서 시작해서 정면을 볼 때(측면→정면)의 느낌에도 차이가 난다. 일체의 부정성이 제거된 매끈한 정면과 달리 추방해야 할 부정적인 요소(부정성)로 구성된 측면은 레진몰탈이 겹쳐진 자국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런 측면은 정면의 매끈함이 수많은 작업의 결실임을 알려주고, 보는 이가 마땅히 누려야 할 경험의 가능성(우둘투둘함에서 받는)을 삭제하지 않으면서 전체 감상의 묘미를 북돋우는 역할을 한다. 대부분의 작가는 작품의 가시권역인 정면의 완성도에만 신경 쓰지, 액자에 끼우면 가려지는 측면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최상흠은 이 측면을, 측면에 가해진 부정성을 가감 없이 노출하여 작품을 활성화시킨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1959~ )은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매끄러움’에 주목한다. 현대사회는 ‘긍정성’이 최고의 가치여서, 어떤 작은 티끌의 부정성도 용납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삶의 변수(부정성)들을 최대한 제거하며 생활의 매끈함(긍정성)을 지향한다. 매끄럽게 마감한 <풍선 개>로 유명한 제프 쿤스(1955~ )의 작품이 바로 현대인이 사랑하는 아름다움이다. 거칠거칠함은 미를 훼손한다. 최상흠은 건축용 도료로 부정성이 제거된 매끄러움에 빠진 현대사회의 생리를 직시하게 만든다. 어떻게? 작품의 측면에 그대로 둔 흘러내림으로 매끄러움에 브레이크를 건다. 현대사회가 싫어하는 부정성을 제거하지 않고 긍정성 곁에 놔둔 것이다. 공산품은 인간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지만 그의 작품은 흔적을 버리지 않는다. 한병철은 진정 아름다운 것은 은폐된 것, 은유, 부정성을 내포한 것이라고 본다. 측면의 흔적이 바로 은폐된 것이자 부정성을 내포한 것이다. 그에게 참다운 미는 부정성과 함께한다. 이는 존재 차원의 작품을 의미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물감(物監) color observed_79.5x46cm_resin, mixed media on acrylic panel_2024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색을 찾아서

서양미술사에서 색의 입지는 턱없이 좁았다. 선(線)의 막강한 파워 탓에 색은 선 그림을 장식하는 보족적인 위치에 머물렀다. 이에 인상파 화가들이나 앙리 마티스(1869~1954) 등은 선에 감금된 색을 독립시키고 그 권리를 신장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20세기 중반, 이브 클랭(1928~62)은 선의 감옥에 갇힌 색채의 해방을 주창하며, 일련의 청색 연작으로 색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바 있다. 작가들의 줄기찬 노력에 힘입어 색채는 더 이상 형태의 묘사를 돕는 도우미가 아니라, 추상화로 색의 향연을 펼치는 한편 그 자체로 오브제가 되는 경지로 나아간다. 서양미술사는 존재감이 없던 색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독자적인 목소리를 전개한 역사이기도 하다.

 

최상흠의 작품은 장구한 색의 투쟁사를 배면에 깔면서 오묘한 색의 비경으로 도약한다. 컬러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개념화되지 않은 색상은 이성을 무력화시키며 감성으로 직진한다. 그것은 색채가 아니라 색을 품은 빛깔이다. 그렇다. 빛깔이다. 그는 레진몰탈을 입힐 때, 그것이 빛과 만나서 잉태하는 경이로운 발색 효과까지도 십분 고려한다. 제임스 터렐(1943~ )이 인공적인 색조명으로 우리의 지각을 고양시키며 색의 한계를 돌파했다면, 그는 세상에 없던 빛깔을 찾아서 색의 가능성을 확장한다. 색이 물감 자체의 것이라면, 빛깔은 색이 빛과 만나서 발현되는 세계다. 초월적인 숭고함마저 감도는. 영롱한 빛깔은 탄생과 동시에 우리의 감각 세포를 깨운다.

 

색을 짓는 연금술사의 빛을 품은 작품

관습적인 작업매체에서 벗어나기, 지지체 측면 자국의 부정성 노출, 개념화되지 않은 색채 탐구 등은 작가가 미술사 안팎의 경계에서 작품세계를 모색하고 구축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모더니즘으로 통칭되는 현대미술의 세례를 받아 한동안 탈물질화와 개념에 기초한 작품 활동을 하다가 삶이 무르익으면서 이와 거리를 두는 쪽으로 나아간다. 그는 과거와 절연하기보다 현대미술의 맥락과 느슨한 길항관계를 가지면서 머리를 쓰는 작업에서 몸을 사용하는 작업으로 활로를 찾는다.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했지만 그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 기존의 색으로 설명도 정의도 되지 않는 것을 결코 회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하며, 십 수년째 빛의 파장을 레진몰탈로 조율하며 신비한 색의 덩어리를 제시한다. 돌이켜보면, 레진몰탈의 세계는, 개념적인 전작들도 마찬가지지만 작가가 예술계의 일원으로서 자신에게 스스로 부과한 과제를 풀어가는 화두 같은 작업이다. 그는 채탄장의 광부처럼 레진몰탈의 생리에 귀 기울이며 색의 진경을 채굴하고 있다.

 

 

 

물감(物監) color observed_60x60cm_resin, mixed media on acrylic panel_2024

 

 

 

 
 

 
 

* 전시메일에 등록된 모든 이미지와 글은 작가와 필자에게 저작권이 있습니다. *

vol.20240923-최상흠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