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슬기 展

 

피:자

PII:JA

 

 

 

서호미술관 본 전시장 및 서호서숙 한옥별관

 

2024. 9. 14(토) ▶ 2024. 10. 13(일)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북한강로 1344 | T.031-592-1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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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한 그림_193.9x97cm_캔버스에 유채_2023

 

 

전형(stereotype) 돌보기

 

이연숙(리타)

 

박슬기는 그간 여성(성)의 재현과 전형, 젠더와 섹슈얼리티,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혐오라는 주제를 회화, 설치, 사진, 영상을 아우르는 매체로 다뤄왔다. 이번 전시 《피:자 PII:JA》 역시 최근 몇 년간 박슬기가 집중하고 있는 ‘꽃 그림’ 연작을 중심으로 여성(성)과 오랜 비유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인 꽃의 양가적인 성격을 탐구한다. 전시의 또 다른 중심을 담당하는 ‘돌 그림’ 연작은 유년 시절부터 이어져온 박슬기의 돌에 대한 애정과 염려(care)를 명랑하게 보여주는 회화로 ‘죽은’ 정물의 극단인 돌을 주인공 삼는 작업이다. 플라스틱 조화와 3D 꽃 모델을 포함하는 ‘꽃’과 주워온 ‘돌’, 그리고 이전 작업의 중심 소재인 ‘고무장갑’ 등은 모두 흔하고, 값이 싸고, 쉽게 사용되고 버려진다는 특징을 가진 비천한 대상이다. 기본적으로 박슬기는 여성으로서 이러한 대상들에 동일시와 감정 이입하는 과정을 통해 기존 사회의 지배 언어와 이데올로기 아래 특정한 방식으로만 재현되어 온 주변적이고 소수적인(minor) 존재에게 또 다른 ‘얼굴’을 부여하는데 관심을 둔다. 다시 말해 박슬기는 지금까지 인간 사회에서 무시되고 폄하되어 온 일상적 사물의 삶과 운명을 존재론적 차원에서 여성의 그것과 동일하다고 간주하고, 이처럼 ‘여성화’된 사물의 전형적인 재현을 파괴하거나 부정하는 대신 그것을 분해하고 전유하는 방식으로 일종의 대안-초상(portrait)를 제작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각도에 따라 형상이 변화하는 렌티큘러 렌즈처럼, 이들의 ‘얼굴’은 통상의 초상처럼 하나의 이름으로 환원될 수 있는 기호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환원이 어떻게 불가능한지를 넌지시 폭로하는 일종의 추상적인 공간으로 기능한다.

 

 

조화로운 그림 1_91x116.8cm_캔버스에 유채_2023

 

 

이러한 박슬기의 시도는 넓은 의미에서 페미니즘 미술 실천과 행동의 방법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가부장제 사회 아래 여성은 몇몇 전형화된 형상으로서만 재현된다. 대표적으로는 오늘날까지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성녀-창녀 이분법은 남성의 관점에서 여성을 ‘좋은’ 대상(무조건적 사랑을 베푸는 ‘어머니’, 순수한 ‘여동생’, 지고지순한 ‘아내’ 등) 혹은 ‘나쁜’ 대상(사치스러운 ‘된장녀’, 드센 ‘노처녀’, 젊을 때 한창 놀다 순진한 남자 만나 시집 잘 간 ‘설거지녀’ 등)으로만 분류하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일부다. 문제는 이런 이데올로기에 동의하든 안 하든 간에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여성 또한 알게 모르게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차별과 배제, 억압과 폭력의 논리를 고스란히 내면화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심지어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이들조차 여성 간 위계를 나누고 ‘나쁜’ 여성들을 ‘납작하게’ 범주화하고 타자화하기도 한다. 이는 물론 인간 근원에 자리 잡은 가학성, 파괴성의 발현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그만큼 강력하게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사실을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던 많은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은 성녀-창녀 이분법과 같은 남성중심적 가치체계에 대항하기 위해 오히려 그러한 체계가 반복해서 재생산하는 전형을 패러디하고 희화화하는 방식으로 일종의 인지적 균열, 분열을 유도해왔다. 마치 ‘트로이의 목마’처럼, 전형에 숨어들어 전형을 내파하는 것이다.

 

 

조화로운 그림 2_91x116.8cm_캔버스에 유채_2023

 

 

같은 맥락에서 박슬기의 작업을 살펴 보자. 박슬기의 사실주의적 기법에 충실한 ‘꽃 그림’ 연작은 ‘화가’로서 그의 재현 기술을 증명하기에 물론 충분하지만 그저 ‘잘’ 그린 그림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음흉한 구석이 있다. 멀리서 보면 박슬기의 ‘꽃 그림’은 젊은 여성 아마추어 예술가가 막 미술 대학에 입학해 교수에게 ‘꽃 그림’이나 그리는 작가가 되고 싶냐고 훈계당할 때마다 ‘꽃 그림’에 쏟아져 왔던 그 모욕과 멸시를 고스란히 뒤집어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소품으로서는 좋겠지만 예술로서는 자격 미달이라는 의미에서의 ‘꽃 그림’ 말이다. 한편 가까이서 ‘꽃 그림’을 보면 우리는 즉시 말장난에 가까운 위트 넘치는 제목과 함께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성실한 박슬기의 실물 모사, 즉 스스로를 ‘꽃 그림’에 불과하다고 주장이라도 하려는 듯 작가의 자의식과 스타일을 거의 숨겼거나 제거한, 좋게 말하면 ‘중립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평범’하고 ‘밋밋’하게 보이도록 의도된 실물 모사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박슬기는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나는 ‘꽃 그림이나 그리는’ 정성스러움을 통해 ‘꽃 같음’을 긍정하면서도 부정하고, 꽃다발이 어떤 맥락에 의해 얼마나 의미가 달라지는지 묻는다.” 그렇다면 정물화로서 ‘꽃 그림’의 전형을 이루는 형식─사실적이고 세밀한 디테일 묘사, 선명하고 화려한 색의 사용, 수직-수평을 따르는 구도, 때로 꽃꽂이 기술을 필요로 하기도 하는, 가급적 꽃이 풍성해 보이는 배치─에 “정성스럽게” 복종하는 박슬기의 ‘꽃 그림’에는 ‘꽃 그림’을 초과하는 질문이 잠복하고 있는 셈이다.

 

 

자연스러운 그림 1_20x40cm_캔버스에 유채_2023

 

 

사실 ‘지금 여기’라는 조건 아래 페미니스트 여성 예술가가 오랫동안 폄하되어 온 ‘꽃 그림’이라는 장르를 다시금 소환하는 작업 자체가 남성중심적 미술사에 대한 일종의 비판적, 실천적 개입일 수 있다. 구태여 린다 노클린의 「왜 위대한 여성 예술가는 없었는가?」와 같은 페미니즘 미술사의 정전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제 우리는 과거 여성 예술가들이 (그들의 개인적인 성취와 별개로) “꽃 그림이나” 그려야 했던 까닭이 그들에게 다른 소재, 주제를 다룰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사회가 ‘꽃 그림’ 외에 아무것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꽃 그림’과 같은 정물화는 한때 여성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거의 유일한 재능의 창구였다. 이를테면 18-19세기 유럽 여성 예술가를 중심으로 발전한 식물 세밀화(Botanical art)의 경우가 그렇다. 동시에 ‘꽃 그림’은 태생적으로 여성의 여성성, 가정성, 관능성을 ‘표현’하는 소박하고 조잡스러운 취미 활동으로 전락할 가능성을 항상 품고 있었다. 20세기 미국 미술사에서 ‘꽃 그림’의 대표격인 조지아 오키프에게 가해진 지저분한 ‘성(차별)적’ 비평은 여성 예술가와 ‘꽃 그림’이 맺고 있는 곤란한 관계를 증거하는 단지 가시화된 예시에 불과하다.

 

박슬기는 이처럼 여성화된 장르로서 ‘꽃 그림’이 받아온 명예로운 모욕의 역사와 전통을 고스란히 계승한다. ‘꽃 그림’ 연작의 출발 지점이라 할 수 있는 <여/성.화 female/sex.painting>(2021)을 통해 박슬기는 ‘여성은 꽃’이라는 오랜 비유를 부정하고 부인하는 대신 여성이 ‘만약’ 꽃이라면 그 꽃은 어떤 꽃인가를 묻는다. 이 작업은 한 눈에도 묵직해 보이는 꽃 다발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생기를 잃고 쪼그라드는 과정을 노골적으로 묘사한 세 점의 회화으로 이루어져 있다. 네덜란드의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나 일본의 구상도(九相圖)처럼 인간의 유한성을 경고하기 위해 꽃을 그러한 상징적인 정물로 선택한 것은 아닌가 싶을수도 있지만, 제목이 의도하듯 꽃을 다룬 까닭은 명확하다. 그간 꽃은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해도 아름답고, 연약하고, 수동적인 대상으로 ‘납작하게’ 정의되어 왔다. <여/성.화>는 꽃에 대한 이러한 전형적인 인식에서 출발해 무섭게 저물고 시드는 꽃, 벌레를 꾀고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쪼그라드는 꽃, 그렇게 죽어가면서 화면 밖 관객을 향한 말 없는 응시를 거두지 않는 꽃을 재현한다. 즉 여성이 ‘만약’ 꽃이라면 그 꽃은 이미 죽어가고 있는 꽃인 셈이다.

 

 

자연스러운 그림 2_20x40cm_캔버스에 유채_2023

 

 

이처럼 꽃의 무시무시한 사물성을 폭로하는 <여/성.화>와 달리, <조화로운 그림 Harmonious painting>(2023), <자연스러운 그림 Natural Painting>(2023), <생생한 그림 Lively Painting>(2023) 연작은 비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납작하게’ 만들어진, ‘진짜’ 꽃의 질 낮은 모조품으로 취급받는 ‘가짜’ 꽃의 여러 양태를 ‘조화롭고,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재현한다. 물론 이 또한 부정적으로 전형화된 ‘가짜’ 꽃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을 비틀기 위한 의도일 것이다. <조화로운 그림>은 꽃의 생생함을 지속시키기 위해 인공적으로 꽃을 눌러 건조한 결과인 압화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비닐봉지를 결합해 얼핏 ‘진짜’ 꽃다발처럼 보이는 ‘가짜’ 꽃 다발의 형상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그림>은 사진을 3D 모델로 변환하는 포토그래메트리 기술과 디지털 시뮬레이션 기술을 통해 구현된 디지털 꽃을 디지털 돌에 이식한 형상을 마치 ‘진짜’ 정물인양 연출한다. 디지털 시뮬레이션 과정에서 구멍 나고 왜곡된 디지털 꽃은 자신의 결함(glitch)을 마치 원래 그런 것처럼, ‘자연스럽게’ 노출한다. 애초에 살아 있었던 적이 없기에 죽어갈 수조차 없는 ‘가짜’ 꽃에 대한 박슬기의 염려는 <생생한 그림>에서도 반복적으로 발견된다. 생화의 수분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인 오아시스는 색 칠한 점토로, 또한 정작 오아시스를 필요로 하는 생화는 조화로 대체된 ‘가짜’ 결합의 집합을 그린 <생생한 그림>은, ‘가짜’ 꽃과 ‘가짜’ 오아시스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아니, 설령 알게 되었다 할지라도) 완벽히 평화롭고, 서정적인 풍경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 연작들이 실은 ‘꽃 그림’이라는 전통적인 정물화의 한 장르를 통해 ‘가짜’ 꽃의 위상을 승격시켜주려는 시도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여성은 꽃’이라는 시대착오적인 비유를 간단히 기각하는 대신에, 여성과 마찬가지로 전형화되고 대상화되어온 대상인 꽃을 이토록 끈질기게 바라보고 ‘정성스럽게’ 그려내는 일이란 결국 대상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없다면 불가능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인간중심주의적인 관점에서 부적절하게 비인간 사물을 의인화하는 일종의 폭력을 수반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쩐지 결코 환수 받지도 보상 받지도 못할 “마음”과 “애씀”을 ‘진짜’ 꽃, ‘가짜’ 꽃 가릴 것 없이 고스란히 쏟아 붓는 박슬기의 ‘꽃 그림’ 연작을 보면서, 나는 어쩐지 모든 돌봄에는 폭력이 수반될 수 밖에 없다는 궁색한 변명을 덧붙이고 싶어지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그림 3_20x40cm_캔버스에 유채_2023

 

 

자연스러운 그림 4_20x40cm_캔버스에 유채_2023

 

 

여/성.화 3_91x116.8cm_캔버스에 유채_2021

 

 

 

 

 
 

박슬기 | Park slii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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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40914-박슬기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