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원 展

 

팽팽한 위로와 안 웃긴 농담들

 

아홉개의 몸, 네 개의 손_캔버스에 백토, 동양화 물감, 먹_227.3x181.8cm_2024

 

 

아트스페이스 보안 2

 

2024. 6. 26(수) ▶ 2024. 7. 21(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33 | T.02-720-8409

 

www.boan1942.com

 

 

단단하고 건강한 몸_캔버스에 백토, 동양화 물감, 먹_227.3x181.8cm_2024

 

 

혼자 추는 춤

 

신지현

 

앙리 베르그송은 희극적인 것이 뻣뻣함에서 생겨난다고 적는다. 그에 의하면 물질(형태)은 비물질성(영혼)이 생동하는 생명체를 두껍게 둔화시키고 굳게 한다. 조화로운 표면 뒤에 숨겨진 물질의 깊은 반항이 드러날 때 웃음은 발생한다.[2] 이때 베르그송이 말한 물질의 자리에는 ‘형태로서의 그림’을, 비물질에는 ‘영혼’ 즉 서려 있는 ‘마음이자 정신’을 덧대어 보자.

이번 정주원 개인전 《팽팽한 위로와 안 웃긴 농담들》을 가로지르는 키워드는 ‘살’과 ‘나무’이다. 두 단어 사이를 연동하며 구성된 세계는 지극히 ‘인간적인’ 것과 연루한다. 나는 정주원의 작업 이면에 언제나 마음이 서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 마음이란 사랑, 실패와 상실, 불안, 성취와 같은 것들로, 삶의 속성 중에서도 대단히 보편적인 것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그의 붓끝을 지나 이미지로 시각화됨으로써 고유성을 획득한다고 보았다. 형태(이미지) 아래로부터 인간적인 것이 비집고 올라오는 순간 작업은 마침내 희극성을 갖춘다. 웃음이 사회적 제스처라고 한다면[3], 이곳의 실패한 농담이나 예술 따위 역시 사회적 부산물일 것이다. 사람들이 그의 그림에 이끌린다면 그 안에서 (사회적 부산물로서의) 자기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전시명 “팽팽한 위로와 안 웃긴 농담들”은 이러한 작가적 태도를 드러낸다. “팽팽하다”는 형용사는 온전한 공감이나 포용 아닌 ‘적당한’ 거리를 전제함으로써 대상과 비평적 긴장을 암시한다. 어정쩡하게 내던져진 ‘농담’은 필연적 실패로 귀결한다. 뻣뻣함의 반대가 우아함이라면, 안 웃긴 농담은 결코 우아할 수 없기에 뻣뻣한 것이 맞다. 그리고 여기에서 웃음이 발생한다. 안 웃긴 농담이 실패에서 비롯되는 웃음이라 한다면, 그리고 실패에도 기술이 있다면, 문장이 드러내는 상황은 다시 한번 희극적인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는 다름 아닌 작가 자신에게 건네는 말이자 세계 안에서 스스로를 위치 짓는 방식일 것이다. 이제 그림을 살펴보자.

전시장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보이는 그림은 <주름진 궁둥이>(2024)와 <이인삼각>(2024)이다. 두 그림 사이 시선을 주고받는다. 같은 크기의 화면과 재료라는 외재적 동일성 외에도 지시하는 이미지(직립한 아이와 나무)가 갖는 외형의 유사성은 둘 사이 연관성을 유추하게 한다. 전시의 출발이라 하겠다. 생명력 가득한 유아기의 부풀어 오른 신체 주름은 무진한 성장을 예감케 한다. 한편 둘이 하나가 되어 서로의 신체를 보조하거나 대신하는 나뭇가지[4]는 바짝 마른 외피를 굳이 비교 언급하지 않더라도 나이 듦에 수반되는 시간성, 정상성에서 분화될 수 있는 소수성을 직시하게 한다. 이제 막 스스로 서기 시작하는 미미하고 어수룩한 힘, 그리고 서로를 버팀목 삼아 서야만 하는 잔존하는 힘 사이에는 살핌이 필요한 존재라는 공통점이 있다. 전시의 시작점에 맺힌 감각은 전시 전반으로 확장한다.

 

세 친구_캔버스에 백토, 동양화 물감_2024

 

 

정주원은 사랑이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조부모와 함께 지내며 목격한 노화의 핍진성, 조카를 돌보며 마주하는 생의 찬란함, 그 사이를 오가며 실천하는 돌봄. 작가는 그 힘을 사랑으로 직시한다. 그가 그림을 대하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무언가를 추동하는 힘이다. 이 힘은 돌고 돌아 작업을 향한다. 마음이 동할 때 움직이는 것이 신체라면 그가 그리는 그림 역시 사랑의 산물임을 부인할 순 없다. 일련의 작품을 통해 작가는 “그냥 지켜봐 주는 사이”로서 “엎드린 위로 살짝 얹어보는 위로”를 보내고, “너무 익어버린 귤”과 같은 안 웃긴 농담을 던지며 연대를 표상한다.

정주원은 2017년 첫 개인전 이래 지금까지 5번의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매 개인전에는 당시의 마음과 사유가 고스란히 담겼다. 초기의 개인전은 노동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번뇌, 예술가라는 직업이 갖는 사회적 불확실성에 대한 대응이자 성실 증명 시도로 비친다. 과도한 성실만을 요구하는 사회, 휘몰아치는 서울 미술로부터 거리두기를 두기 위해 돌연 택한 몽골행에서 가진 스스로에 대한 고찰, 효용성에 대한 되새김은 다음 전시 《Starry, starry ghost》(2020, 갤러리175)로 이어진다. 이제 작가는 사회적 기준이나 꼬리표에 자신을 맞추기보다는 자신의 속도로, 이세계(異世界)를 짓기로 한 듯 보인다. 마치 불화는 숙명이라는 듯이. 2021년 개인전 《목젖까지 던지세요, 사랑에》(2021, 온수공간)는 이번 전시와 주제적으로 보다 직접적 연결이라 할 수 있는 작업을 선보인 자리였다. 이후 아교 템페라라는 주재료의 특성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시기(《불멸의 크랙》(2022, GOP FACTORY))를 거쳐 현재다. 약 8년의 시간이 쌓였음에도 작가는 여전히 작업 근간, 뿌리에 대한 질문을 품고 “길을 잃은 채 머물기”[5]를 수행한다. 여기에서 길을 잃은 채 머문다는 것은 부정적 의미보다는 일반의 세계와 조금 다른 모양과 속도를 갖는 그의 세계 안에서 어떤 가능성 찾아 나가는 일, 어둠 속을 더듬는 창조적 시도로 이해하는 편이 옳겠다.

 

 

할아버지 나무_캔버스에 백토, 동양화 물감_193.9x97cm_2024

 

 

한편 선에 대해 살펴보자. 정주원의 그림 속 선은 물자국에 가깝다. 언뜻 눈물이 흐른 흔적처럼도 보이는 그의 그림엔 정말이지 우는 표정도 심심찮게 등장해 왔다. 물자국과 같은 선은 작업 전반이 담아내는 마음과 맞물리기도 하지만, 재료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된 결과물이기도 하다. 작가가 오래 써온 아교 템페라가 생성하는 불가항력적 크랙[6]은 한때 작가에게 그림을 방해하는 요소로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를 극복 대상이라기보다는 특수성으로서 받아들여 물감을 얇게 쌓는 방식 등을 통해 유연하게 조정하고, 그림 안 요소로서 자연스럽게(불편하지 않게) 위치시킨다. 실패(로 생각하던 것)를 통해 기존의 인식이나 관습, 규범을 재구성하고 다양성을 끌어안는 것은 그의 작업이 나아가고자 하는 태도, 방향성과 궤를 함께한다. 그가 그리는 선은 명료하고 날카롭기보단 모호하다. 구분 짓기 위함이라기보다는 흐트러뜨리기 위한 머뭇거림에 가깝다. 중첩된 선 사이로 선연히 드러나는 형상, 형상 너머로 떠오르는 인간적인 순간이 붙들릴 때, 작업은 완성된다.

전시장 한편에 어정쩡하게 놓여있는 입체 구조물 <대단한 벽>(2024) 역시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림을 걸기 위한 일종의 가벽이지만 3D 펜으로 얼기설기 짜인 벽돌 벽은 중앙을 점거하지도, 그 무엇도 효과적으로 가리지 못한 채 작은 그림들만을 지탱한다.[7] 이는 모호한 그대로가 제 역할로서 관객의 동선과 경험을 이끈다.

<아홉 개의 몸, 네 개의 손>(2024)을 보며 정주원이 예술에 갖는 마음, 삶을 대하는 태도를 다시 한번 어림해 본다. 그것은 아마 <단단하고 건강한 몸>(2024)처럼 지반에 뿌리내리고, 토막들을 쌓아 커다란 하나의 ‘존재’로 거듭나는 것 아닐까. 서로 다른 두께의 주름과 굳은살, 껍데기를 갖고 있음에 그 어떤 시간을 보내고 왔던 그것은 중요치 않다. 정주원의 작업 표면 뒤에 서려 있는 깊은 사랑, 숱한 머뭇거림 끝에 완성된 그림 앞에서 그가 보냈을 무한의 시간을 더듬어 본다.

 

 

 

오래된 피부_캔버스에 백토, 동양화 물감_162.2x130.3cm_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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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40626-정주원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