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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운성 展
정(情, 精, 定, 靜)물 Nature Morte, Still Life
Althaea Rosea Cavanil_95x95cm_Digital Print_2023
AD갤러리
2024. 4. 19(금) ▶ 2024. 5. 18(토)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산대로 28길 56, 3F | T.02-545-8884
www.instagram.com/ad_gallery_seoul
Papaver Rhoeas_95x95cm_Digital Print_2023
AD gallery는 한운성 선생을 모시고 개관1주년 기념전을 갖게 되었다. 그간 AD 갤러리는 미술과 연관된 ‘길, 진리, 생명’의 주제로 전시를 개최하였으며 이 주제와 연관하여, Natura(자연이면서도 생명을 낳다를 뜻함) 전시를 개최하였다. 생명과 연관된 조형적인 탐험으로 ‘겹과 결’, ‘점’, ‘선’ 등 다양한 전시를 진행했었다. 이번 개관1주년 기념전의 주제는 정-물로서 AD 갤러리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생명(자연, 생명을 낳다라는 Natura)의 연속된다. 이번 전시회에서도 소개되는 한운성 작가의 ‘꽃’flora의 연작은 정물이면서도 생명을 뜻한다. 이 정-물(靜-物)은 고요하고 가만이 있는 정물이 아니라, 마음이 있는 물건(情物)이면서 사람의 생각과 정신이 있는 물건(精物)이고, 이에 더해 개인과 사람들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정물(定物)로 제시된다.
Flora / Nature - Memento mori
한운성 선생이 그리는 꽃은 사실 활짝 핀 꽃보다는 꽃이 시들거나 떨어진 꽃이다. 이것은 생명의 다른 측면이며 또 다른 영역이다. 이는 미술사에서 제시되었던 “memento mori”라 하여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전통과도 연관된다. 메멘토 모리는 로마시대의 개선장군이 행진할 때,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 라며 장군에게 너무 교만하지 말라는 뜻으로 외쳤던 군중의 소리였다. 이에서 시작된 미술, ‘덧없는 소재’, ‘죽음’을 나타나내는 소재들을 제시하는 전통을 연상하게 된다. 덧없는 인생은 절대의 시간과 섭리, 신을 잊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작가의 정물은 이러한 미술사적, 정신적 정황을 기초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아직 남아있는 생명을 주목한다. 정물은 불어로 ‘La nature morte’으로 죽은 자연이고, 영어로는 ‘Still Life’로 ‘정태적인’ 측면에 기초하여 죽은 자연’이 된다. 사실 이 정물은 “덧없음(vanity)”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메멘토 모리의 또 다른 영역이 된다. 이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죽음과 연관된 삶의 의미, 그리고 영원한 삶을 연상하게 한다. 작가에게도 정물은 단순한 정물이 아니라 삶의 강력한 주제로 미술의 장르 그 자체로 다가온다. 작가는 위의 뜻에 부가하여, still life ‘아직 생명이 남아있는 모습’으로 삶의 한 영역을 제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Phalaenopsis Schilleriana_50x70cm_Digital Print_2023
새로운 시리즈 - 재현은 재현된 대상과 연관된다
한운성 선생의 퍼즐은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이것은 실제 한운성 선생이 퍼즐업체에게 주문하여 작가의 작품을 생산한 것이다. 작가는 파블로 피카소의 얼굴, 마그리뜨의 작품 등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운성 작가는 마그리뜨의 작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을 다시 부정하여, (이것은 파이프이다) 이라고 제안한다. 특히 이 작품에서 재현은 단지 재현일 뿐이라는 주장이나 실제 대상과 관계없음을 강조한 의미들을 다시 부정하여, 재현은 대상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판단과 연관된다. ‘재현이 재현하고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 재현된 것과 대상이 다름을 강조한 마그리뜨를 한운성 작가는 다시 부정한다. 또 문자적인 재현과 이미지의 재현 사이의 부정으로도 볼 수 있는 마그리뜨의 생각을 다시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미술사적 전통과 미학적인 논의와 함께 작가는 작품에서 참된 재현의 의미를 제시한다. 이러한 생각은 중세 스콜라철학, 유명론 등의 논쟁에까지 올라가는 문제이다. 재현과 실제 대상의 분리의 현대에 접어들면서 더 급격하게 진행된다. 현대주의자들이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재현은 실제가 아니라는 점, 재현의 필연성을 부정한다. 작가는 이러한 재현의 문제를 반성하며, 재현은 곧 대상이라는 점을 제안하고 있음을 읽게 된다.
Missing God
Missing God 또 그의 작품은 는 타임즈지에 1966년 제안된 기사에서 시작된다. 이 기사는 하나님에 관한 믿음, 하나님의 실재함? 또는 과연 하나님이 이 세계를 다스리고 계신지에 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 글은 다양하게 무신론의 입장과 다원주의적 입장을 논의하는 것으로 전개되었다. 이 신앙적인 질문에 관해서 기사가 종합적인 이해라는 관점에서 다루기 보다, 이성적인 태도로 전개하고 있었다. 작가는 이러한 급진적인 주제를 제안했던 문제를 작품에 다시 호출한다. 1966년도의 기사는 2차대전과 자유주의 등에서 신의 존재는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부각된다. 2000년 이후에도 이 기사는 다시 화제가 되었다. 이 기사를 다시 읽었을 때 중요한 점은 1966년도에 신이 죽었다고 논의했던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을 사실이다. 다른 측면에서 이 글을 다시 반성하면, 참된 하나님의 아들이자 신인 예수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먼저 죽었고, 다시 부활했다는 점으로 논의가 되고 있다.
여기서 작품으로 돌아오면, 작가는 퍼즐에서 ‘Dead’를 이탈시켜, 죽음의 의미를 부정한다. 사실 이러한 부정은 차연(Difference)의 부정으로 한 때 죽었지만 그 후,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살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아울러 미술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 예를 들면 마티스, 고호, 피카소, 마그리뜨 등에서 제안된 여러 주제를 다시 더 부가하여 강조하거나 부정하는 새로운 논의를 작가는 제안하고 있다. 작품에서 고갱의 작품을 호출하며 새로운 의미를 제안한다. 원화의 색들은 프랑스 부르따뉴 지방의 가을과 연관된다. 작품의 노랑은 예수의 노랑, 익은 밀알이 되기도 한다. 이 색은 추수 때 가을의 색이며, 수확기, 인간의 구원을 향한 역사에서 수확하는 단계라는 뜻이 된다. 여기서 작가는 예수 부분의 퍼즐은 없애 버려, ‘없음’ 또는 ‘승천’ 등 다양한 논의를 불러일으킨다. 앞의 신은 죽었는가라는 질문은 이곳에 다시 살아난다. 또 붉은 나무는 가을 단풍이면서도 예수의 보혈로 물들은 색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새로운 부정을 의미하고 작가가 화가로서의 생각, 또 미술사에 관한 논점, 절대와 영적인 것에 관한 이성적인 고려와 질문을 제시한다. 그의 퍼즐은 미술에 관한 새로운 이해이며, 패스티쉬이며, 부정이다. 이러한 선례를 로트레아몽이 작품을 다시 읽는 과정에서 제안한 새로운 부정과 강조를 볼 수 있다. 작가는 이러한 다양한 이야기들 위에, 생명의 정물,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에서부터, 다시 생명으로 이끄는 숨어있는 작가의 놀라운 고백까지 큰 감동으로 제안한다.
강태성 (AD gallery Director, 예술학)
Papaver Rhoeas_91x61cm_Digital Print_2023
Campsis Grandiflora_91x61cm_Digital Print_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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