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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展
THE STAGE
Black-Sea_162x260cm_장지에 연필_2023
갤러리인
2024. 4. 12(금) ▶ 2024. 5. 4(토)
* 휴관일 | 월,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연길 97
여정_117x91cm_장지에 연필_2024
이지영은 종이 위에 연필로 인간 형상을 줄곧 그려왔는데, 인간과 그들을 둘러싼 환경을 긴밀하게 연결시켜 둘 사이의 관계를 각각의 서사와 조형으로 표현해 왔다. ‘인물원(The Human Zoo)’ 시리즈로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이러한 연필 드로잉은, 익명의 인물들이 거주하는 공통의 “세계”에서 시작해 “집”과 “무대”라는 특정 공간으로 옮겨지면서 크고 작은 변화들을 겪어왔다. 연필이 닳아서 소멸하기 직전까지, 종이가 흑연의 질감과 무게를 견뎌내는 절정에 이를 때까지, 이지영은 “인간”으로 통칭될 수밖에 없는 익명의 개인들이 산과 나무에 둘러싸여 단순한 행위로 환경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일련의 장면을 연출하듯 그렸다.
“그리기”라는 지난한 노동의 행위마저 검은 흑연 아래 감춰진 것처럼 무심하면서도 적막한 그의 그림은, (너무) 많은 것을 한 장면에 담아내면서도 흑백으로 전환되었거나 음소거 된 화면처럼 구체적인 정황이 은폐된 것 같아 낯설다. 이번 개인전 《The Stage》에 앞서, 그는 최근 작업에서 “무대”와 “집”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특정하여 어떤 사건들에 대한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소리와 색이 제거된 불확실한 세계의 이미지에서, 소리와 색에 상관없이 움직임과 모양에 관한 서사를 풀어내려는 일련의 긍정을 가늠해 볼 수도 있겠다.
내리기 series_38.5x25cm_종이에연필_2024
<black sea>(2024)는, 표면적인 인상에서 과거의 ‘인물원’ 시리즈와 연결된 자연 풍경 속 인간 군상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빈틈없이 꽉 찬 풍경 속에 자리잡은 개별적인 인간 형상의 존재들은 자기 혼자만의 “행위”에(만) 깊이 몰두해 있는 단절과 고립, 불통과 소외 등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그는 ‘인물원’ 시리즈에 대하여, “자신의 본능을 잃어버리고 길들여진 삶을 살아가는 동물원의 동물과 같이, 사회 속에서 사회가 원하는 인간으로 교육되고 길러지는 인간 삶의 단면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작가노트] 그가 화면 가득 조성해 놓은, 섬처럼 폐쇄적이고 도시처럼 인공적인 자연 환경 속에서, 개성 없는 익명의 인간 형상들은 무언가에 열중하면서도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공허한 행위만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어쩌면 창작의 초기 과정에서 작가 스스로 가졌던 불안으로, 하염없이 연필 드로잉에 열중하면서 그리기 행위의 공허를 달래며 어딘가에 가 닿고 싶었던 속내와 동일시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black sea>는 초기 ‘인물원’ 시리즈의 불안과 공허를 지나 망망대해의 가장자리에서 삶의 형태를 지어가는 인간다움의 면면을 엿보게 한다. 두 폭의 큰 화면을 연결한 이 그림은, 거대한 바다의 수면을 묵묵히 그려낸 작가의 행위, 그가 보낸 시간, 그가 있었던 공간 앞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하늘과 바다, 파도가 밀려온 해안과 그 그림의 끝에서 연결된 우리의 현실은 수직적으로 연결돼, 마치 순환하는 자연의 질서와 삶의 이치를 관통하는 일상의 파노라마 같다. 이지영이 그린 밤바다는 (흑연의) 어둠 속에서 (종이의) 공백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수면의 일렁임과 해안으로 밀려오는 파도, 그리고 밤/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골똘히 찾아 길어 올리는 인간 형상의 모습들은 검은 두께의 화면에 작고 유동적인 파열을 만들어 놓는다.
<여정>(2024)은 조금 더 능동적인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초현실적인 인간 형상의 이미지들은 어떤 사유의 흔적들처럼 머리 위로 자라난 식물의 패턴들을 성장시키고 지켜내며 물에서 헤엄친다. 같은 방향을 향해 떠내려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속에서 스스로 저마다 다른 생명의 무게를 지고 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면은 끊임없는 삶의 유동성을 환기시키며, 그러한 수평적인 운동성을 뚫고 중력을 거스르며 자라나는 이파리들의 유기적 연대의 조형성을 극대화 한다. 초기 작업에서 인공 자연의 공허하고 표피적 패턴을 강조했던 자연의 이미지들은, 어느 순간 그의 그림 속에서 능동적으로 자라나 두께와 무게를 지닌 어떤 개체처럼 형상을 만들어간다.
The Stage_140x130cm_장지에 연필_2024
한때 인물원에 길들여 있던 공허한 인간 형상들은 “무대” 위의 실존적인 존재들로 재탄생하듯 일종의 자발적인 변혁을 보여준다. <오르기>(2024)와 <내리기>(2024> 연작들은 이러한 정황을 포착하고 있다. 흑연을 진하게 쌓아 올려 가파른 산과 깊은 물의 심연을 각각 그려낸 작가의 행위는, 그림 속에서 첩첩산중의 능선을 맨손으로 오르거나 깊은 물 속에 맨몸으로 뛰어드는 인체의 움직임과 동일시 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가파른 산세와 깊고 고요한 수면을 그리기 위해 흑연을 종이에 밀착시켜 단단한 광물과도 같은 비현실적인 무대를 만들었다. 집을 짓고 무대를 세우는 행위에 빗대어, 그는 현실의 물리적 한계를 지닌 허약한 종이 위에 연금술적인 이미지들의 실체를 확고히 그려냈다. 예컨대, <내리기>에서 벽으로 둘러싸인 내부 공간을 “검은” 물로 가득 채운 이지영은, 이 암담한 무대 위에서 부유하며 능동적으로 포즈를 취하는 인간 형상의 잠재력을 묵묵히 그려낸 것이다. 그의 말대로, 오르기와 내리기라는 행위가 함의하는 “인생이라는 각자의 무대 위에서, 그들이 감당하고 있는 역할의 무게감”이기도 하다.[작가설명]
<The Stage-역할극>(2024)은 이번 개인전 《The Stage》를 통해 가늠해 볼 수 있는 삶과 창작(의 노동)에 관한 일체감을 환기시킨다. 언뜻 ‘인물원’에서 풍기던 일상성의 부조리와 인간성의 상실로 인한 인간 형상에 대한 짙은 회의감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표피적 분위기가 무대 바깥의 가장자리에서 엿보일 세라, 이지영은 무대 위의 인물들이 능동적으로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패턴을 비정형의 시공간 속에서 실체화 할 장면들에 열중한다. 다시 말해, 무대 위의 인물들이 과시하는 몸의 움직임이 텅 빈 무대 위의 공간에 수많은 삶의 궤적들을 쌓아 올리듯 길들이고 고정시킬 수 없는 마술 같은 이미지들을 한껏 키워내고 있다. ‘인물원’에서 다루어 왔던 길들여진 인간 형상에서 벗어나, 그는 훨씬 더 복합적인 삶의 시공간으로서 “무대”를 제시함으로써 삶의 다양한 모습을 짊어진 낱낱의 역할을 조명한다.
<연출>(2024)은 ‘인물원’의 길들여짐과는 전혀 상이한 위태로움이 감지된다. 이 위태로움은 능동적인 동세에서 비롯된 것으로, 어떤 형상을 현실로부터 일으켜 세우기 위해 필요한 자기 한계의 초과에 대해 환기시킨다. 자기 그림자 보다 작고 왜소한 한 인간 형상을 중심축으로 무대 위의 공간은 불가능한 형상들이 차곡차곡 구축되는 마술을 보여준다. 저 인물로부터 시작된 위태로움은, 이지영의 창작 행위로 옮겨 붙어, 극단적으로 작거나 극단적으로 흐린 점과 선에 의해 짙은 명도를 쌓아 올린 무모한 그리기 행위의 긴장감과 마주하게 한다.
무대 위의 조명을 받고 현실의 또 다른 시공간이 눈 앞에 펼쳐진 것처럼, <작은 무대 시리즈>(2024)는 무대를 둘러싼 장막과 하나의 대구를 이루며 현실 안의 또 다른 차원을 시각화 한다. 이는 화면 속 무대의 공간을 경계 짓는 소실점을 지운 채 원뿔형의 내밀한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현실 속에 자리한 한 개인의 초월적인 자리를 상상하게 한다. 그것은 흰 색의 종이 위에 한 자루의 연필을 들로 저 마술 같은 시공간을 배경으로 위태롭게 자리한 인간 형상의 모습을 그려낸 그리기 행위의 실존과도 공명한다.
이지영의 개인전 《The Stage》는 “인물원”의 수동성에서 벗어난 “무대”위 능동적 인간 형상의 출현에 주목한다. 각기 다른 추상적 무게를 짊어진 인간 군상들은, 흑연의 질감과 무게를 반영한 무대 위의 시공간에서 제 역할을 능동적으로 수행하는 숱한 장면들을 연출한다.
안소연 미술비평가
독백_40x40cm_장지에 연필_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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