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수 展

 

구리와 손

 

구리머리 2023_162.2x130cm_캔버스에 유채

 

 

갤러리 학고재

 

2023. 11. 8(수) ▶ 2023. 12. 9(토)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50 (소격동, 학고재) | T.02-720-1524

 

www.hakgojae.com

 

 

초원 2023_116.8x91cm_캔버스에 유채

 

 

내가 자란 곳에서는 마른 식물이 타는 냄새가 났다.

논과 밭이 많았던 마을의 사람들은 가을을 지나 겨울 끝 무렵 다음 농사를 위해 곡식을 수확하고 남은 볏단이나 마른 식물들을 논, 밭두렁과 함께 태우는 일을 했다.
그들은 불이 멀리 번지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며 불을 놓았다고 나중에 들었는데, 그 젖고 마르기를 반복한 식물이 타는 냄새는 흙, 해충, 그들의 마음과 섞여서 더 넓고 진하게 마을을 가득 채웠다. 찬 바람과 함께 밀려오는 연기의 깊고 어두운 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던 기억이 있다.

- 내 그림 속 풍경은 주로 자연의 원초적인 상태로 확정되지 않은 채 꿈틀거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모습은 세계의 시작과 끝이 맞닿은 지점 어딘가의 순간처럼 보인다. 그림에 등장하는 존재들은 그곳에서 긴 시간성이 신체화된 형상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그림에 등장하는 대상들은 많은 경우 본인이 처한 가혹한 상황을 감내해 내고 있다. 그 끝은 대부분 실패인데 괜찮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림에서 색들이 충만하게 매혹적이기도 위협적이기도 하며 서로 간의 강렬한 충돌로 그 세계가 극단적이길 원한다.

- 나의 그림은 많은 경우 이편과 저편으로 형상과 영역이 정확히 나뉘어 있지 않고 서로에 관여하고 침투하고 파편화되어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
일렁이며 빛나는 물 표면의 잔상, 음습한 음식물 쓰레기 더미나 파헤쳐진 동물의 장기처럼 물과 습기에 관심이 간다.

- 물감의 모든 색을 섞었을 때 검은색이 되는 점을 좋아한다. 반대로 검은색을 해체하면 잘게 부서지듯이 많은 색이 나올 것 같다는 시적인 상상을 해본다.

 

 

껍질 2023_80.3x65.1cm_캔버스에 유채

 

 

- 물감을 사러 갔을 때 “이것이 내가 원하던 것이다.”라는 색이 있다. 주로 빛나는 광물이나 이상한 식물을 연상케 하는 색들이 나에게 그렇다. 걷다가 마음에 드는 작은 돌을 발견하고 집어 드는 순간과 매우 비슷하다.

- 내가 좋아하는 물감 중에 Iridescent Copper라는 이름의 물감이 있다. 이것을 사용하여 그린 존재들은 방금 만들어진 열감이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구리는 인간이 다룬 가장 오래된 금속이다. 과거의 생활과 신화에서부터 현대의 산업과 디지털 환경까지 이어져 이 세계에 널리 퍼져있다는 점에서 구리가 가진 시간성과 보편성이 좋았다. 나에게 구리는 금속 자체라기보다 만드는 자와 만들어진 자의 관계에 대한 상징이자 은유로 다가온다.

- 캔버스에 불완전하게 맺혀있는 색들이 좋다. 그것은 온전히 개체를 지정하는 고정점을 만들지 않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고 교차하며 색이 산란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거친, 다듬어지지 않는, 막 나온 듯한, 눈부신 잔해의 파편들을 불연속적으로 이어 붙인다.

- 내 그림에 등장하는 대상은 많은 경우 이 상황을 뒤엎고 싶은 욕망과 두려움이 충돌하고 있다. 상이 무너지고 깨지는 건 내가 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아주 잘 전달해 주는 표현법이다. 과거부터 써온 나의 작업 노트를 보면 불안과 절망, 좌절의 흔적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나는 확실하게 큰소리로 외치는 사람이 아니다. 중얼거리고 머뭇거리며 겨우 작은 용기로 무언가를 선택하는 사람이다. 매번 그림을 그릴 때는 이런 모습에 균열을 내어 약진하거나 약진에 실패하여 다시 원래의 본성으로 돌아오곤 한다. 내 그림에 인물은 내가 아니다. 나는 내가 느끼고 경험하는 것에서부터 인간의 보편성을 추적해 보고 싶다.

 

 

구리머리 2023_162.2x130cm_캔버스에 유채

 

 

바보 같은 하늘 2023_162.2x130cm_캔버스에 유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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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31108-박광수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