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혜자 초대展

 

집이 건네는 말

 

집이 건네는 말-바다야_79x116.5x3cm_자작나무합판 위에 아크릴, 목판화컷팅, 나무, 청바지천_2020

 

 

갤러리 민정

 

2023. 9. 20(수) ▶ 2023. 10. 8(일)

* 매주 월요일 휴관 | 추석연휴 9.28~10.3 휴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90-2(삼청동) | T.02-723-4433

 

www.galleryminjung.com

 

 

집이 건네는 말-하늘아~!_103x130x3cm_자작나무합판 위에 아크릴, 나무, 목판화컷팅 청바지천_2021

 

 

안혜자의 집

행복한 집, 꿈꾸는 집, 그러므로 어쩌면 몽상가의 집

 

고충환(미술평론)

 

여기에 집이 있다. 목조주택이 있고, 콘크리트 구조의 집이 있고, 벽돌 마감한 복층 구조의 집이 있다. 옆으로 긴 통 창문 안쪽으로 소파가 놓인, 전등이 서 있는, 아마도 바닥에는 카펫이 깔린, 거실이 보인다. 그 옆으로 멈춘 듯 강이 흐르고, 더러 창문 안쪽으로 그림 같은 바다가 숨어있고, 때로 열린 하늘이 보인다. 전원주택인가. 그림 같은 풍경을 품고 있는. 아마도 그럴 것이다. 창틀에는 화분이 놓여있는데, 통창도 그렇지만 창틀이 프레임 역할을 하면서 그림 속의 그림, 풍경 속의 풍경으로 나타난 이중그림을 예시해준다. 소설에도 보면, 액자소설이 있어서 큰 서사와 작은 서사가 날실과 씨실처럼 엮인 구조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런, 액자소설의 또 다른 버전을 보는 것도 같다. 풍경 속에서 또 다른 풍경을 발견하는, 서사 속에서 또 다른 서사를 캐내는 재미가 있다고 해야 할까.

왜 이중인가. 집이 그렇다. 모든 집은 이중적(그리고 다중적)이다. 시각적으로도 그렇지만 의미론적으로도 집은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 표면과 이면이 중첩된 이중구조를 하고 있다. 집은 나를 고립시키면서 보호한다. 나에게 집은 보금자리지만(때로 감옥일 수도 있겠지만), 너에게 집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욕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네가 어떻게 사는지, 잘 사는지, 너도 나처럼 사는지, 너의 안부가 궁금하다. 그러므로 모든 집은 정체성의 집이다. 네가 사는 집은 너의 정체성이 사는 집이다. 집이 곧 정체성이고, 너(그러므로 나)다. 하이데거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도 했지만, 집은 존재 그러므로 정체성이 사는 집이기도 하다. 의식이, 무의식이, 회상이, 추억이, 이상이, 꿈이, 희망이, 좌절이, 절망이, 때로 상처가, 그러므로 내가 사는 집이다. 내가 곧 집이다(예수는 교회 그러므로 집이 곧 나의 몸이라고 했다).

 

 

집이 건네는 말-강이 보인다_110x91x3cm_자작나무합판 위에 아크릴, 목판화컷팅, 나무, 청바지천_2020

 

 

건물 벽면에는 나무 그림자가, 때로 맞은편 건물의 그림자가, 그리고 자전거와 가로등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림자의 길이와 깊이가 바람이 잎새를 흔드는, 햇빛 좋은 날임을 알겠다. 여기서 그림자는 그림을 확장 시킨다. 정작 그림 속에는 없는 나무를, 건물을, 자전거를, 가로등을 암시하는 것이 그렇다. 그것들은 아마도 그림을 보는 내가 서 있는 자리, 그러므로 그림 바깥에 속할 것이다. 그렇게 그림은 잠재적인 관객을 그림의 한 부분으로 동참시킨다. 저 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혹은, 나도 저런 집에서 살고 싶다는 심리적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혹자는 예전에 자신이 살았던 집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많은 경우에 집은 한때 존재했었음을, 그러므로 부재 하는 존재를 증명하기도 한다.

그렇게 그림자는 공간적으로도 그리고 심리적으로도 그림을 확장 시킨다. 화가 중에도 보면 심리적 장치로서 그림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특히 에드바르트 뭉크가 그렇고,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렇다. 공교롭게도 하나같이 심리적 울림이 큰 그림을 그린 화가들이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암시의 기술일 수 있다.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고, 존재를 통해서 부재를 암시하는(되불러오는) 것인데, 그림자는 그런, 암시를 위한 기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지붕이나 굴뚝 위에 파랑새 한 마리가 앉아있다. 현관문 옆에 매달린 우편함과 함께, 때로 건물 위를 나는 종이비행기와 함께 희망을 상징하고, 그리움을 상징할 것이다. 도래할 미래를 상징하고, 상실한 유년을 상징하고, 희미해진 옛 추억의 그림자를 상징할 것이다. 치유와 위로를 상징할 것이다. 그 메신저 그러므로 파랑새가 전해주는 소식에는 미래를 기약하는 꿈과 이상도 있고, 과거에서 건너온 추억과 회상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전형성을 끌어들인다. 전형성은 말하자면 사회적 합의에 이른 기호 그러므로 사회화된 기호, 합리와 상식으로 굳어진 관습적인 기호를 의미하며, 롤랑 바르트가 독사(doxa)라고 명명한 부르주아의 언술과도 통한다.

 

 

집이 건네는 말-쉬는 날이야_56x109x3cm_자작나무합판 위에 아크릴, 목찬화컷팅, 나무, 청바지천_2020

 

 

그렇게 작가는 어쩌면 소시민의 소소한 행복을, 이상을 그려놓고 있었다. 통창으로 강이 보이고, 바다가 보이고, 하늘이 보이는, 볕이 잘 드는 벽면에 나무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그리고 파랑새가 안부를 묻는, 그런 집을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집은 어쩌면 현실을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이상을 그린 것이다. 행복을 약속하는 상징들이며, 이상을 반영한 기호들로 구조화된 집을 그린 것이다. 유토피아다. 주지하다시피 유토피아는 현실에는 없는, 다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만 있는 장소, 실제로는 없는 장소, 부재 하는 장소다. 그러므로 어쩌면 상실을 앓는 현대인이 꿈꾸는 장소고 집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현대인은 온통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저마다 능력을 다투는 경쟁사회를 살고 있다고. 때로 자신의 능력 이상을 증명해 보여야 하는 피로사회를 살고 있다고. 이런 시대에 나는 불현듯 강이 보고 싶고, 바다가 보고 싶고, 하늘이 보고 싶다. 햇볕을 감촉하고 싶고, 바람을 느끼고 싶다. 나무 그림자가 서늘한, 햇볕 짱짱한 벽면에 빈 의자 하나 달랑 놓고 쉬고 싶다. 비현실적으로 길고 노란 부리를 가진 크낙새와 더불어 아프리카를 꿈꾸고 싶고, 봉황과 함께 전설만큼이나 오래된 하늘을 날고 싶다. 고양이와 함께 졸고 싶고, 빨랫줄에 널린 빨래처럼 한가롭고 싶다. 그렇게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행복한 집은 사실은 행복하지 않은 현실을 증언하고 있다는, 이런, 역설적인 현실(아니면 사실)로 인해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그렇게 작가는 집을 짓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집을 오리고, 그리고, 찍고, 붙이고, 기워 만든다. 자작나무 합판 위에 본을 뜬 연후에 자르고 붙여 집 형태를 만든다. 그리고 목재 전용 염료로 원하는 색감을 얻은 연후에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을, 벽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사실적으로 그려 넣는다. 그리고 두 장을 겹쳐 만든 두툼한 판화지에 목판화로 이미지를 새기는데, 판화 고유의 인출된 효과를, 상대적으로 더 뚜렷한 요철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렇게 찍어서 오려낸 화분을 창틀에 고정한다. 그리고 청바지 천을 기워 그 속이 빵빵한 새를 만들고 선인장을 만든다.

 

 

집이 건네는 말-다락방도 있어_74x48x6cm_자작나무합판 위에 아크릴, 목판화컷팅, 나무_2023

 

 

대략적인 제작 과정을 살펴본 것이지만, 장르로 치자면 회화(아크릴로 그린 재현적인 회화)와 판화(목판화 컷팅과 무색 엠보싱)와 조각(평면 위로 돌출돼 보이는 저부조)과 섬유(바느질과 패브릭)가, 그리고 여기에 때로 하부장르에 해당하는 예술가의 책이 그 경계를 허물고 넘나들면서 하나로 혼용되고 있다. 평면을 넘어 입체로, 입체를 넘어 공간설치로 작업이 확장되고 심화하고 있다. 그렇게 멀티플레이어가, 종합예술이, 융복합예술이 실현되고 있다고 해야 할까. 보통 융복합예술로 치자면 디지털과 같은 첨단의 미디어를 떠올리기 쉬운데, 작가의 경우에 오히려 철저하게 수작업으로 이루어진, 아날로그적이고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작업을 통해서 융복합예술을, 그리고 멀티플레이어를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다른 면이 있고, 그래서 오히려 더 의미가 있다고 해도 좋다. 탈장르를 통해서 장르를 통합하는 미덕이 있고, 아날로그를 통해서 디지털을 재고하게 만드는 실천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행복한 집을 짓고 있었다. 꿈꾸는 집을 짓고 있었다. 존재의 집을 짓고 있었고, 정체성의 집을 짓고 있었다. 어쩌면 정체성을 상실한 시대에, 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행복을 상실한 시대에 지은 집이어서 그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온다. 행복을 꿈꾸기 위해선 몽상이 필요하다. 작가가 지어놓고 있는 집은 그러므로 어쩌면 현대인이 상실한 몽상을, 휴식을, 쉼의 계기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되돌아볼 새도 없는 일상 뒤편으로 소외된 자기, 지친 자기를 치유하고 위로하는 소소한 기쁨이 있다.

 

 

그 섬에 가면_97x70cm_목판화, 바느질_2022

 

 

집이 건네는 말-같이 지내자_63x52.5x5cm_자작나무합판 위에 아크릴, 목판화컷팅, 나무_2023

 

 

집이건네는말-한모금 할래요_96x70cm_목판화, 바느질_2022

 

 

 

 

 
 

안혜자 | An Hye-ja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판화과 졸업

 

개인전 | 10여회

 

수상 및 프로젝트 진행 | 2022 제7회 동물원속미술관 작가공모 선정(서울대공원) | 2020 예술인창작활성화지원사업공모 선정(서울문화재단) | 2020 고양예술은행공모지원 선정(고양문화재단) | 2020,2009 서울문화재단정기공모지원 선정 | 2012 [KiMi For you]작가선정 | 2002,2004,2005 대한민국미술대전'특선' | 1995 뉴-프론티어 공모전'특선' | 제25회 전국대학미전 '금상'

 

작품소장 | 국립현대미술관(미술은행), 성남아트센타, 삼성병원암센타, 진천군립생거판화미술관, 신세계백화점, 화천어린이도서관, 수원문화재단, 울산제일일보, 박수근미술관, 고양문화재단

 

Homepage | https://blog.naver.com/notsea

E-mail | notse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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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30920-안혜자 초대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