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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망토 展 Ghost Manteau
김지예 · 이동근
drawing Room
2023. 8. 8(화) ▶ 2023. 8. 31(목)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7길 68-4, 2층 | T.02-794-3134
김지예 作_흰_1 2023_Glazed ceramic_11.5x20x12.5cm
유령 망토
이성휘 큐레이터
김지예와 이동근의 이인전 제목인 《유령 망토》는 한창 작업 중인 작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그들이 이야기해 준 전시제목 후보군(눈에손 손에눈, 손눈눈손)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의 결정이었다. 이 제목은 서로 다른 방식의 작업을 해온 두 작가가 이인전이라는 취지 아래 공동 작업을 진행하면서 서로의 접점으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유령이라는 단어는 추구하는 방향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뭔가 기이하고 강력한 듯하여 배면의 무언가가 있는 듯한 모티프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선택하였고, 또 “유령의 실체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간접적인 망토에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망토를 추가하여 《유령 망토》라는 전시제목을 결정하였고 말해 주었다. 두 사람 모두 ‘표면을 중심으로 탐구한다’는 점도 반영되었다고 하였다.[1] 필자는 두 작가의 작업을 각각 개괄하고, 두 사람의 접점에 대한 키워드로 ‘유령 망토’가 어떠한 측면에서 유효한지 살펴보고자 한다.
김지예 作_Skin Collage 1 2023_Glazed ceramic, pin_19.5x18x5cm
이동근의 신작들은 지난 개인전 《돌연변이》(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22)의 연장선 상에 있다. 그는 회화와 입체의 경계에 서서 어느 쪽의 레토릭도 순순히 따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이동근의 작업 변천 과정을 지켜봐온 사람들이라면, 구조적이고 질서정연했던 초기 이미지들이 점점 평평한 평면을 벗어나 비정형의 입체적인 지지체로 옮겨오고, 해독되지 않는 암호처럼 이미지들은 규정할 수 없는 형상과 색채를 띠면서 동시에 다양한 물성의 아상블라주가 거듭 시도되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이동근은 초기부터 회화 화면이 구겨지거나 구멍이 뚫릴 정도로 헤지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아주 잠시 회화를 평평하게 유지해주는 사각 프레임을 존중하는 듯한 작업을 하기도 하였으나 그때도 그는 프레임이 된 캔버스 위에 안정적으로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종이나 패브릭을 접고 펼치기를 반복하면서 이들이 물감과 거의 한 몸이 되도록 칠을 반복하였다. 이렇게 작업한 결과물은 앞뒷면이 있어서 양면을 모두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고 설치 방식 또한 양쪽의 구김, 주름, 물성과 이미지를 모두 들여다 보게끔 했다. 따라서 이동근은 처음부터 그의 이미지를 단면의 2차원 이미지로 제시한 적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번 이인전에서 이동근이 선보이는 신작들은 주체의 눈, 특히 눈의 각막을 의식하고 있다. 작가는 눈의 각막을 경계로 하여 그 안쪽과 그 바깥쪽의 불일치를 드러내거나 또는 불가능할 수도 있는 일치에 대한 상상을 도전한다. 각막에 대한 작가의 사고는 주체의 시지각 내부, 즉 주체 스스로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시각의 경로에 대한 사고이며, 이 사고는 주체의 시지각과 대상 이미지의 진정성에 대한 사고로 이어진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쓴 작가노트에서 이동근은 “앎과 믿음 사이, 봄과 있음 사이, 그 어디에도 온전하게 안착하지 못하지만 기꺼이 이동을 지속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그가 말하는 앎과 믿음, 봄과 있음의 관계가 ‘앎=믿음’, ‘봄=있음’과 같이 일대일로 등치시킬 수 없다는 점은 이미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이 논증해온 철학적 의제이자 예술의 역사를 끌어온 동력이다. 이동근이 지금 이것을 고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동을 지속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동근은 이전에 그가 한 전시들에서 ‘광학적 기만’, ‘주름이라는 관측법’, ‘관측일지’, ‘시선으로 펼쳐진 너’, ‘보는 것과 서는 것’, ‘생장한 각막’, ‘각막 혹은 시선’과 같이 시지각과 관련지어 유추해 볼 수 있는 제목을 작품이나 전시의 제목으로 빈번하게 채택했다. 그가 만드는 이미지는 본 것을 재현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데 그가 말하는 광학적 기만, 관측, 시선, 보는 것은 정말 ‘눈의 봄’에 대한 것일까? 필자는 이동근의 지속적인 관심사가 시지각 전반이긴 하지만, 점점 더 눈이 지각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영역이나 중간세계, 그리고 아예 눈의 내부로 초점이 이동해왔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관심사를 작업에 충실하게 담고자 그는 본인의 회화가 형성되는 과정을 카오스 그 자체더라도 투명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고, 처음부터 비재현적인 이미지를 추구했던 그는 이미지의 시작과 끝을 자신이 아니라 질료와 물감이 결정하게끔 하였다. 통상적으로 회화에서 캔버스나 종이가 지지체이고, 물감과 안료, 기타 재료는 지지체 위에 안착되어 이미지가 형성된다.
이동근 作_각막과 시선 사이 2023_종이 위에 아크릴물감, 수성건식재료, 볼펜, 마커_30x21.3cm
그러나 이동근은 종이나 패브릭을 지지체로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레진, 석고, 물감, 파운드 오브제 등이 이들과 서로 엉겨붙어서 다같이 지지체이자 이미지가 되게끔 만든다. 《보는 것과 서는 것》(인천아트플랫폼, 2022)에 전시된 작품들에서는 이미지를 고정하는 것에 대한 작가의 갈등이 드러났고, <생장한 각막>(2023)이나 <각막과 시선 사이>(2023)와 같은 작품들은 이미지의 물리적 현실 속으로 시지각을 밀어 넣고자 시도하는데 마치 회화에 고래 뱃속과 같이 회화의 내장이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그 내부로 눈을 밀어넣고픈 욕구를 드러내는 것 같다. <각막과 시선 사이>는 작가가 날 것 상태의 아이디어를 테스트 한 에스키스에 가까운 작업들이라는 느낌을 주고, <생장한 각막>은 이미지의 완결을 바랬다기보다 이미지의 한계가 어디일 수 있는지 변이를 거듭, 끝까지 밀어부치고자 한 작가의 태도가 드러나는 작품들이다.
이동근 作_생장한 각막 2023_천, 종이, 석고붕대, 아크릴물감, 스프레이, 레진, 본드, 실, 끈, 전선_84x109cm
작가들은 서로 공유하는 시공간이 많을 경우 서로에게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현재 한 작업실을 공동으로 사용 중인 김지예와 이동근은 본질은 다르지만 방법론적으로는 비슷한 고민을 공유하는 것 같다. 예컨대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각자 작업을 기립 상태로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였다. 이동근의 <보는 것과 서는 것>, 그리고 김지예의 (2023) 시리즈들은 작품을 세우고자 하는 이유가 다르지만 각기 지지체와 재료를 일체화 시키거나(이동근), 지지대를 만들어 수평적인 작업을 수직적 공간으로 확장을 꾀하는 시도를 하였다(김지예). 김지예에게 작품의 기립은 몸체가 되었던 원래 구조물은 불 속에서 모두 타버린 후 표피만을 남긴 세라믹 작업을 삼차원 공간으로 성장 또는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최근 이동근은 카미유 앙로가 예전에 일본식 꽃꽂이인 이케바나를 차용하여 작업한 <Is it possible to be a revolutionary and like flowers?>(2012)에 주목하여 작업을 세우기 위한 방법론의 확장을 꾀하고 있다. 카미유 앙로는 꽃말 또는 식물이 상징하는 의미들에 주목하여 자신의 개인 도서목록에서 발췌한 메시지를 이케바나를 차용한 설치로 구성했는데, 전통적인 이케바나의 방법론을 문학과 꽃의 상징 관계로 확장하였다.[2] 물성을 지닌 오브제나 재료들로 메시지를 구성할 때 꽃말과 같은 상징은 효율적인 수단이 된다. 그러나 이동근이 카미유 앙로의 방식을 그대로 수용할 것 같지는 않다. 작업실에서 만났을 때 김지예와 이동근은 ‘상징’에 대한 생각을 서로 다르게 피력했는데, 김지예는 상징이란 무언가 다른 것을 연상시키는 것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이동근은 오히려 쉽게 읽히는 키워드를 지워가며 상징을 추구한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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