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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옥순 展
Gallery BUNDO
2023. 5. 15(월) ▶ 2023. 6. 9(금)
대구광역시 중구 동덕로 36-15 | T.053-426-5615
www.bundoart.com
시간의 멈춘, 존재의 상상속을 거닐다_캔버스에 아크릴 물감_162x130cm_2022
Homage to 박동준 2023 경계에 서 있는 실/선
1. 균질하게 단색으로 마감된 화면 위로 일정한 굵기의 선들이 얽혀있다. 이 선들은 둥근 원형의 형상에서 풀려나와 유연하고 신속한 흐름을 유지하면서 뻗어나가고 있는 형국을 연출하고 있다. 테이핑을 해서 만든, 그린 선은 배경에서 빠져나와 어디론가 질주하는가 하면 마구 엉켜 있다. 실을 연상시키는 선은 그 무엇인가를 은유한다. 굴곡이 심한 마음의 상태이거나 복잡하게 연결된 인간관계 혹은 무수한 시간의 지층 아래 잠겨있는 감정의 결들 내지 몸에서 분출되는 여러 내면의 상태를 지시하는가 하면 눈에서 흘러내리는 억누를 수 없는 눈물이기도 할 것이다. 동시에 이는 전적으로 경쾌하게 미끄러지는 선의 맛으로 충만하다. 유기적인 선들은 원형의 상태에서 빠져나와 힘껏 중심에서 이탈해 나가면서 흥미로운 선의 궤적을 운율적으로 만들어나간다. 주어진 사각형의 화면 안에서 이루어지는 선의 흐름은 회화의 조건을 부단히 의식시키는 편이다. 선은 사각형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주어진 한계 안에서 그림을 만들어 보인다. 동시에 엄청난 운동력과 기운으로 그 틀을 요동치게 만든다. 한편 표면에서 선이 밀고 올라오는 듯한 연출을 보여주는데 이는 형상과 배경의 이원적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배경과 분리되기보다는 그로부터 밀착되어 밀려 나오는 듯한 상황을 안겨준다. 화면 내부에서 실/선을 배출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표면에 남겨진 깊이/공간이 화면을 용기처럼 다루고 있다는 인상도 준다. 이것은 물감을 흠뻑 먹인 화면을 만들고 그 위에 실을 얹혀 놓은 다른 작업에서 보다 두드러진다. 블랙과 레드 등 단색의 색면을 뒤로 하고 그 위에서 춤을 추듯이 이동하는, 출렁이는 선들은 여러 레이어를 만들면서 복잡하고 기세 있는 선의 몸을 단호하게 만들고 확고하게 새기고 있다. 종이테이프가 얹혀지면서 만든 이 선은 화면의 피부에 예민한 상태로 올라와 있다. 그리고 저부조의 선들은 촉각적인 감각을 그물처럼 펼쳐놓는다. 선의 교차와 겹침에 의해 피부에 얇게 패인 공간이 만들어지면서 균질한 표면으로 보이는 화면에 미세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실제로 실타래에서 풀려나온 선들은 자립하지 못하고 중력의 법칙에 의해 아래로 처지거나 드러눕는데 반해 이 그림에서의 선들은 표면에서 굳건하고 강직한 실/선을 응고시켜 놓은 상태가 되었다.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존재의 한 순간이 연상되기도 한다. 가볍고 흔들리는 실들이 그림 안에서는 좁은 띠 혹은 테이프 자체가 되어 견고하게 부착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실/선의 존재감이나 실존성도 강하게 어필되는 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실/선은 작가의 실존을 대리하고 자기감정이나 마음의 결. 눈물의 여러 경로를 누수하면서 진행되고 있다.
시간의 멈춘, 존재의 상상속을 거닐다_캔버스에 아크릴 물감_162x130cm_2022
2. 작가의 또 다른 근작은 색면 추상에 유사한 화면과 그 화면의 중심부에 박음질로 고정된, 뜨개질로 만든 실의 물질성이 강조되어 그 오브제가 매달려 있는 작품이다. 이 작업은 앞서 언급한 드로잉과는 차이를 지니고 있다. 우선 린넨의 캔버스 자체가 두툼한 두께를 지닌 쿠션의 지지체로 바뀌었다. 따라서 화면 자체가 물리적인 부피감을 지니며 팽창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고 그만큼 부풀어 오른 천의 오브제성이 강하게 인지된다. 캔버스 자체가 용기가 되어 물감을 흡수하고 빨아들인 어떤 상태성을 암시하는 화면이다. 린넨이 지닌 질감과 색채를 작가는 즐겨 다루는데 따라서 약간의 굵기를 지닌 올과 천 자체의 색감에서 연유하는 부드럽고 자연적인 맛을 중시한다는 생각이다. 린넨의 색감과 질감은 그 위에 스며들어가는 물감의 상태와 긴밀히 연동된다. 작가는 린넨의 화면 위로, 안으로 수십 번의 칠을 통해 물감을 서서히 스며들게 한다. 선염기법으로 형성된 색은 화면 전체를 은은하게 적시기도 하고 수평의 띠처럼 밀고 나간 붓의 궤적에 의해 결을 만들기도 하고 바탕 위에 또 다른 색의 얼룩들이 부유하는 형국을 만들기도 한다. ‘발색과 감정이 좋은 느낌’을 주는 색, 색의 상태를 작가는 선택하고 연출한다. 자연스럽고 포근한 맛이 우러나오는 상황을 중시하는데 이는 작가에 의하면 “폭닥한 느낌”을 자아내는 것이다. ‘폭닥하다’는 ‘포근하다’의 방언이다. 청각적으로는 ‘포근하다’는 표현보다 ‘폭닥하다’가 더 효과적인 수사가 되고 동시에 입가에 맴돈다. 작가는 가능한 기름기가 ‘쏘옥’ 빠진 상태와 느낌을 원하는데 이는 아마도 담백한 것, 담담하고 자연스러운 것 등에 가까운 맛일 것이고 이는 우리 전통미술과 연계되어 한국적인 현대미술을 추구하려는 일련의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모종의 상태, 감각과 연결되어 있다. 예를들어 김환기, 윤형근의 일련의 추상 작업 역시 담백하고 푸근한 맛, 자연스러운 상태를 동경하면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린넨 천이 지닌 자체의 색감과 질감, 그리고 그 위로 홍건하게 차오르는 물감/색은 폭닥한 느낌을 자아내는 상황 연출에 겨냥되어 있다. 동시에 작가는 색으로 물든 추상의 화면 위에 구체적인 물질인 실을 뜨개질하고 박음질했다. 일정한 매듭을 지으며 아래로 내려오는 실은 화면을 채우고 있는, 따라서 화면과 분리될 수 없는 색채들과는 달리 화면 위에 존재하지만 풀어진 실들은 바람이나 공기의 흐름에 의해 유동적인 존재가 되어 흔들린다. 뜨개질과 풀려진 실들이 바닥을 향해 드리워진 상황은 화면에 개입하는 외부적 조건, 타자의 영향력을 암시하는 한편 모종의 경계에 자리한 실의 운명을 상상하게 해준다. 실은 바느질로 인해 화면에 붙어있지만 동시에 그 위로 나풀대면서 흔들리는 실의 오브제성을 드러내면서 내, 외부의 경계에 자리한 실의 운명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 실은 눅눅한 배경을 등지고 빠져나와 하나의 실존적 몸, 또는 그 몸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되기도 한다. 두툼한 볼륨을 지닌, 덩어리의 표면에 부착된 실은 여러 가지 색채와 형태를 뼈마디처럼 간직하면서 바닥을 향해 내려오고 있다. 이는 습성의 생성적인 화면과 연동되고 맞물리면서 살아있는 존재가 되어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것이다.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는 것이다.
-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
시간의 멈춘, 존재의 상상속을 거닐다_캔버스에 아크릴 물감, 실_71x71cm, 두께 4.5cm, 검정실 557cm_2021
시간의 멈춘, 존재의 상상속을 거닐다_캔버스에 아크릴 물감, 실_162x130cm_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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