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해·오역·오독의 시 展
Misunderstood·Mistranslated·Misread Poem
김샨탈 · 우주언 · 이주영
신한갤러리
SHINHAN GALLERY
2023. 3. 28(화) ▶ 2023. 5. 9(화)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로 251 (역삼동, 신한아트홀) B1 | T.02-2151-7684
https://www.beautifulshinhan.co.kr
김샨탈 作_그릇-되기_혼합매체 (패브릭에 C-print, 핸드 위빙 패브릭)_80x51cm_2022
언어가 추방당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언어의 망각에 대한 에코랄리아스 기록에 따르면, 언어 역시 기원의 장소로부터 추방당할 수 있다는 사실, 추방된 자리에서도 여전히 성스러운 것으로 남을 수 있다는 존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나라의 언어, 그 옛 역사는 전설이 되어 구전과 설화로 전해져 내려옵니다. 기다림이 없어진 빈터, 유해마저도 바람에 소실되어 모래로 남겨진 그 땅의 이야기는 아포리즘으로 전해옵니다. 소실된 나라의 언어의 여러 층위와 차원 중 유독 되살리기 어려운 것은 소리입니다. 입으로 전해진 언어는 음률과 리듬감을 전달하며 문자 너머 그 의도를 파악하지만, 역사의 지층에서 기록되지 못한 소리는 메아리로 공명하고 음과 음 사이에 남겨진 문자만으로 기록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자는 온전히 노래할 수 없으며 그것은 시가 되지 못합니다.
성스러운 신의 언어라 전해지는 히브리어에 아무도 발음할 수 없는 철자가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첫 번째 문자인 알레프를 발음할 수 없는 까닭은 아무 소리로 표현하지 않기 때문이죠. 신의 계시를 담은 알레프는 발음할 수 없지만 문자 사이에 숨어있으며 묵음으로 그 뜻을 전달합니다. 의도와 소통 사이에서 묵음은 망각의 처소를 지킵니다. 말하지 않고 발음하지 않은 알레프의 자리는 의미가 붕괴한 장소며 그곳이 진정한 고향입니다. 황폐한 옛터에 고귀하고 이름 없는 자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되돌아오지만 어디에도 기억을 품은 땅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완전한 소멸은 없습니다. 묵음은 몰락한 문명의 자리를 기억하며 바람의 메아리로 노래를 부릅니다.
언어의 망각을 품은 잃어버린 고향 - 우리가 복원 또는 창조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소리의 상실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설명하려 할수록 무력한 상실감을 유발하며 침묵을 마주합니다. 이 침묵은 때론 몸 안의 감각기관을 연결 짓는 통로로 작동되어 옹알거리는 공명을 생성합니다. 문자를 엮은 공명은 혀끝으로 탄생한 말이 됩니다. 발화된 공명은 낯선 이와 마주하며 미소 짓는 입술의 움직임, 언약을 확인하는 손짓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주영, 우주언, 김샨탈의 전시 《오해·오역·오독의 시》는 온전히 소리 내지 못한 묵음의 자리를 드러내며 완역 혹은 오역의 (불)가능성, 소통-불능이 왜곡이 아닌 진실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떤 기호로도 표시되지 않은 기억의 잔여는 때론 추임새로 나타나며 발화하기 전의 공백, 더듬거리며 말-하기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설명하려 할수록 전달되지 않거나 정확하게 말을 하려고 노력할수록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어가 특정한 기호로 전달할 수 없는 특유의 뉘앙스를 품고 있다는 점이고 진실은 질서와 위계, 허구와 일종의 모종 관계를 이뤄 서사를 구축한다는 것입니다. 세 작가는 언어의 기능적 한계를 짚어내며 드로잉, 설치, 영상, 웹 사이트와 사운드 등 혼합 매체로 언어의 시각화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번역 불가능성에 따른 언어적 실패는 왜곡, 생략, 소멸을 유도하며 기억의 망각은 근원에 가까운 목소리를 불러옵니다.
이주영은 사회 구성원 간의 소통에서 발생하는 언어의 권력과 위계, 그에 따른 위상에 대해 주목합니다. 현상세계를 표현하는 언어가 사회 구조 내 관계 맺는 공동체와 밀접하게 접촉될 때, 화자와 청자 간에 소통의 층위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손짓과 입술에 따른 움직임, 마주하는 눈동자, 언어의 성차에서 나타나며 자신을 다른 이에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할 때, 완전한 설명이 구조적으로 불가하다는 것을 내포합니다. < Afterimage of Language >(2022-2023) 작업은 언어의 잔여물이자 몸 안 곳곳을 배회한 공명을 나타냅니다. 화자의 몸 너머 혀끝으로 발화하는 순간, 언어의 본질적인 투명함이 사라지는 짙은 인상을 풍깁니다. 언어의 내재적 힘을 표현하는 ‘검은물Blackwater’은 절대적이지만 불완전한 진실을 투영하며 언어의 근원을 묘사하는 작가의 방법론이기도 합니다. “진실은 투명하지만 어둡다The truth is transparent but dark.” 규정할 수 없는 소통의 불완전한 언어는 닿을 수 없기에 그제서야 비로소 오해誤解는 시가 됩니다.
우주언 作_Google Whisper 2_단채널 영상, 3분_2022 (Photo - J.C. Lett , Villa Arson)
우주언은 신성시한 것과 추방된 것의 기원을 연구하며 통제, 감시, 억압의 작동구조에서 배제된 비체의 자리를 확보하는 가상의 공동체 <리틀 시스터즈 언어창조회LSLCC>(2020-2023)를 설립합니다. LSLCC는 가부장적인 관습과 제도에 따른 언어의 의미와 관념을 비틀기를 시도하며 의미가 붕괴된 장소Site를 제작합니다. 이 장소는 창조의 비밀을 파헤치는 유토피아적 언어를 탐구하는 기반을 마련합니다. 유토피아적 언어는 모방과 해체를 통한 언어의 권력구조를 유희하는 놀이이며 존재를 규정하는 철학, 그 수단인 이성, 이론을 바탕으로 지배하는 남근중심주의의 긴밀한 공조를 고발 하는 오역忤逆의 방식입니다. LSLCC는 흩어지고 파편화된 언어의 의미를 밝히며 잃어버린 역사의 기원을 조사합니다. 태초의 언어는 성별없는 몸짓으로 확장되며 ‘머물거리는 몸Murmuring Body’은 속삭이고 머뭇거렸던 기억의 통로와 연결됩니다.
김샨탈은 이미지와 텍스트, 텍스트와 텍스트를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하면서 완역의 가능성을 도모하지만, 번역의 실패가 필연적임을 직감합니다. < Trance-lation >(2023)은 <그릇-됨에 관하여>(2022) 작업의 연작이며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모국어와 외국어를 선택할 때 일어나는 청자의 소외에 주목합니다. 소외에 따른 배제는 주변적인 것, 소수적인 것을 압축·생략하기에 이 둘을 가교하는 역할로 다가갑니다. 이는 트랜스의 ‘횡단하여-지나서-초월하여\' 등을 가진 접두어의 역할과도 맞닿아 있으며 행간과 행간을 횡단하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알레프의 발음할 수 없는 묵음처럼 행간은 아직 오지 않는 서사를 기다리며 자리를 지킵니다. 행간을 이미지로 변환하는 배틀기, 수놓기, 바느질의 수행적 행위는 전문 번역가로서 완역의 가능성과 번역의 균열을 조장합니다. 오독誤讀은 완역의 불가능성에 따라 발생한 서사의 가능성을 내포하며 다양한 층위의 청자가 배제되는 상황을 간과하지 않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언어를 소통의 도구이자 의사결정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언어의 진정한 장소를 나타낼 수 없습니다. 언어가 순수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수단과 목적 사이의 관계를 끊어내고 관계 개념의 의사소통이 아닌 전달 가능성으로 남아야 할 비-언어를 모색해야 합니다. 진실은 투명하지만 어두운 것처럼 순수의 투명함은 몰락과 폐허, 망각의 자리에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은 메아리를 감지합니다.
전시 《오해·오역·오독의 시》는 묵음의 자리이자 서사가 가린 침묵의 자리를 찾으며 이주영, 우주언, 김샨탈은 언어의 진정한 장소를 모색합니다. 너무나 많은 말이 오가는 시대가 전달하는 불확실하고 수다스러운 언어로부터 침묵과 망각의 자리를 선사합니다. 닿지 못한 오해는 시가 되고 오역은 구조를 재배치하고 오독은 의미를 전복시키며 언어의 회색지대를 그립니다. 본 전시는 ‘언어’를 해명될 수 없음, 의미와 의도를 파악할 수 없게 내버려 둠으로 타자를 재단하고 섣불리 판단하기를 중단합니다.
이 곳, 침묵이 번져 나가는 시의 장소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강정아
이주영 作_Afterimage of Language_종이판넬에 목탄, 판넬 56개_158.9x126.4cm_202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