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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솜 展
드라이브
Drive
갤러리2
2023. 1. 12(목) ▶ 2023. 2. 11(토)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길 204 (평창동) | T.02-3448-2112
www.gallery2.co.kr
나쁜 사진 Bad Pho to_oil on p aper_150x186cm_2022
갤러리2에서는 박다솜 개인전 <드라이브>를 개최한다. 곡선과 몸의 관계를 주제로 한 이번 전시는 중력의 원리를 이용해 상하운동을 반복하도록 설계된 롤러코스터의 트랙과 시간의 흐름으로 노쇠해 주름진 이의 몸을 중쳡시킨다. 여기에 작가가 물리적으로 종이를 찢어 그림의 바탕으로 사용하는 것 역시 몸의 흐름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법이다. 작가는 특히 이번 개인전에서 10여 년 전에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영상 작업을 함께 선보인다. 영상에 등장하는 인형과 오브제들은 노쇠한 인간의 몸을 대변한다. 영상을 비롯해 신작 5점이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2월 11일까지 진행된다.
우울하지 않은 온전한 드라이브가 가능할까? 10여 년 전에 박다솜은 시나리오를 썼다. 50대, 60대, 70대인 세 자매의 이야기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무덤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맏언니를 두고 두 동생이 연거푸 화를 낸다. 이 서사는 10년이 지나 <에쎄의 우울>(ESSE’s Spleen)이 되었다. 영상에 등장하는 것은 어머니의 모습이나 무덤의 형상이 아니라, 차를 타고 이동하며 세 자매가 나누는 대화가 전부다. 주고받는 대화 속에 인형으로 만들어진 세 자매의 주름진 몸이 끼어든다. 만들어진 몸들은 영상의 한켠에 노쇠한 몸을 바라보는 인물이 있음을 전제한다. 그의 시선에 담긴 감정은 어딘가 울적하다. 경쾌한 음악은 자꾸만 우울을 밀어내려는 것 같지만, 사실 우울을 가리고 있는 얇은 장막일 뿐. 이 드라이브는 애써 우울해짐으로써 온전하다.
< Drive >에서 박다솜은 곡선과 몸의 관계를 말한다. 그는 자신의 행동과 예측이 불가능한 결과 사이에 생겨난 신뢰를 믿는다. 그가 믿지 않는 건 행동으로 옮겨보지 않아도 동일한 결과를 제공하는, 즉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반면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도출하는 행동은 그 결과가 무엇이 되건 온전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뢰를 발생시킨다. 달리 말해, 표면적으로 단단한 관계보다는 느슨한 관계에 잠재된 단단함이 더 큰 설득력을 가진다. 이번 전시에서 말하는 곡선과 몸은 그러한 느슨한 관계에 대한 그의 신뢰를 드러내는 키워드로, 롤러코스터의 굴곡진 트랙과 노쇠해진 몸의 주름의 겹침에서 발견한 공통된 형상을 보며 떠올린 관계를 형상화한다.
스모킹 Smoking_oil on paper_111x151cm_2022
그간 박다솜이 탐구해온 몸에 관한 고민은 두 점의 회화 <스모킹>(Smoking)과 <나쁜 사진>(Bad Photo)에서 롤러코스터의 곡선에 대입된다. 중력의 원리를 이용해 상하운동을 반복하도록 설계된 롤러코스터의 트랙은 시간의 흐름으로 노쇠해 주름진 이의 몸을 겹쳐낸다. 평소 아픈 몸을 바라보며 슬픔이나 우울의 감정을 떠올렸던 그는 그 감정이 발현되는 근원적인 이유를 모색하며 시간과 중력이라는 분명한 원인에 가닿게 되었다. 그런 시선에서 주름을 일으키는 주체는 감정이 아니다. 감정의 실체와 상관없는 일들은 사람의 통제를 벗어나고, 몸은 주름을 표현하는 중립적인 물질로 변모한다. 이처럼 점점 건조한 눈으로 노쇠한 몸을 바라보게 된 박다솜에게 롤러코스터에서 본 곡선은 주름진 몸에 관한 감각을 굴곡진 형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장치가 된다. 몸을 보며 느끼는 감정보다도 몸의 형태를 우선 그려보며 주름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서 말이다.
그가 그린 그림에는 얼굴이 있다. 롤러코스터의 곡선이자 주름진 몸의 곡선을 둘러맨 화면은 눈과 코, 입의 형상을 입고 실존할지도 모르는 모종의 존재로 되살아난다. 박다솜의 그림은 종이를 찢는 행동으로 시작해 크랙을 그리는 일로 끝난다. 그는 지식의 체계, 그리기의 규칙 등 선험의 영역을 잠시 밀어두고 사람의 손길 아래에서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도출되는 결과를 취해가기 위한 시도를 한다. 그림이 그려진 길을 따라가 보면 저절로 시선에 나타나는 것들이 있다. 결이 가는 대로 찢은 종이, 머리로 떠올리거나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아 그린 형태, 크랙으로 균열을 낸 표면이 보인다. 천이 아닌 종이는 이미 스스로 찢어지기 위해 존재한 것일지도 모른다. 화면 위 대기권을 닮은 분할된 영역들은 종이가 채워주길 바란 형태일지도, 종이를 벽에 지지하기 위해 붙였던 녹색 종이테이프는 화면 속에 불려지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중앙을 관통하는 크랙은 완성에 가까운 시점에서 그림이 스스로 회화가 되기 위해 불러낸 형상이다. 마지막까지 지켜진 얼굴의 모습은 그 과정에 속한 존재들의 있음을 증명하듯, 그림을 사람과 같은 대상으로 만들고자 한 모든 것의 의지가 담겨 있다.
온전한 드라이브는 애를 써서 우울을 동반한다. 그림을 지나가는 크랙처럼 <에쎄의 우울>에는 계속해서 경쾌한 음악이 흐른다. 어머니의 죽음과 세 자매의 주름은 그 자체로 음울한 감정에 도달하고 만다. 하지만 그 위에 덧씌워진 장조의 멜로디는 이들의 대화와 주름에 균열을 가하고 노쇠한 몸을 대하는 건조한 시선을 상상하게 한다. 종이가 가는 대로, 형태가 그려지는 대로, 눈이 표면을 오가는 대로, 화가 자신이 아닌 그림을 이루는 것들의 의지를 따라 채워진 시선들이 그림에 남아있다. 이 일을 자연적인 결과에 자신의 의지를 맡긴, 의지의 위치를 그림으로 옮긴 행동이라 부를 수 있겠다. 크랙이 층의 집합에 균열을 내어 존재를 길어 올리듯, 박다솜의 드라이브에서 우울함은 가려지기 위해 존재한다.
글: 김진주
생쥐 Rat_oil on paper_21.5x85cm_2022
에쎄의 우울 ESSE's Spleen_스톱모션, 사진, 사운드_11분 50초_2023_still cu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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