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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영 展
흐르다
갤러리 도스
2022. 6. 14(화) ▶ 2022. 6. 20(월)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7길 37 | T.02-737-4678
www.gallerydos.com
My son 2(절규)_Acrylic on canvas_130.3x97.0cm_2022
나의 분신, 너의 자아, 우리의 ‘관계’
최유진(전시기획자‧강화미술도서관 관장)
1. 작가 안은영의 첫 개인전 키워드인 ‘관계’는 다양하게 연결된 채 고통과 행복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의 그림들은 그 속에서 잉태된 사변적 역사와 의미, 상호 이해관계에 관한 시각적 서술이다.
작가는 자신과의 인과성을 전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색’을 택했다. 색은 말 그대로 감정 및 인식과 관련한 작용과 의지, 지각의 총체다. 색이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형상에선 다른 장르 간의 해체와 결합, 과거 작품의 재해석, 미완성적인 표현 등에서 안은영의 조형방식을 확인 할 수 있다.
그에게 조형은 청색과 황색, 검은 색 등이 다채롭게 사용된 인물화로 구체화된다. 그 인물화들은 익히 잘 알려져 있는 타인의 얼굴이다. 하지만 그저 사람의 용모를 본떠 그린 그림은 아니다. 어느 작품은 다소 구상적이고, 또 어느 작품은 완전한 추상에 가깝다. 상상력으로 재해석된 측면도 엿볼 수 있다. 어느 하나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움으로 생략과 덧칠을 통해 새로운 인격을 부여한다.
대표적인 작업은 브라질의 사진가 세바스티앙 살가도 < Sebastiao Salgado >(2022)를 비롯한 한국 아방가르드의 선구자 김구림을 묘사한 < Kim Kulim >(2022) 등이다. 큐비즘의 거장 < Pablo Picasso >(2022)와, 무겁고 진지하며 히스테릭한 초상으로 잘 알려진 남아프리카공화국 태생의 작가인 마를렌 뒤마 < Marlene Dumas >(2022)와 같은 작품도 있다.
그의 초상화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내면을 묘사한 작품이라는 것에서 공통점이 있다. 모든 것을 예술로 불태웠으며 가장 가까이에서 현실과 마주한 채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해 질문해온, 그러나 지금은 역사가 된 삶에서 슬픔으로 추모하게 만드는 평온과 일렁임 역시 동시에 배어 있다.
타인의 초상이 나와 예술을 잇는 심리적 표상이라면, 자화상은 삶의 단락을 옮긴 몸부림이자 예술가라는 존재에 관한 긍지의 표상이다.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가 그러했듯 자기 모습을 살아 있는 듯이 묘사하는 것이면서 그림과 자신을 분리하지 않기 위해 벌이는 주술에 가깝다. 물론 안은영의 자화상은 현실의 여러 아픔을 잊기 위해, 기쁨과 슬픔을 드러내기 위한 최면과 치유의 차원에서도 해석 가능하다.
이와 같은 흔적은 비교적 구상성이 강한 자신의 모습을 그린 < Self-portrait_4, 의식과 무의식 >에서 잘 나타난다. 해방에서 오는 자유를 갈구하듯 먼 시선으로 화면 밖 세상을 응시하는 장면, 눈이 가려져 있음에도 바라보는 곳이 명확하다. 이밖에도 그의 자화상은 실존의 무게 아래 형성된 얼터 에고(Altered Ego)와, 자신이라는 존재가 외적 요소들과 연결되는 매개라는 측면도 있다.
Portrait of Sebastiao Salgado_Acrylic on canvas_100.0x80.3cm_2022
2. 작가에게 나와 타인의 얼굴은 고열과 활력을 제공해주는 내 ‘살’의 일부다. 긁어내면 고름이 남고 떼어내자면 내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주는 정신과 육체의 일부이며 공허와 꿈의 원형이다. 그것은 숙명 혹은 운명과 밀접하여 나를 나로써 존재하게 하는 근원이다.
이와 관련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작업은 작가 아들과의 관계를 인용한 < My son_1, 잡힐 듯 말 듯… >이다. 아이들이 갖고 노는 풍선 장난감 혹은 이미지를 그린 듯한 이 그림은 “아슬아슬 잡으려는 엄마와 날아가려는 아들과의 관계”를 표현한 것이지만 눈앞에 드리운 관계의 현실과 수천의 심적 시퀀스에 방점이 있다.
웅크린 채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그린 < My son_2, 절규 >는 미안함과 죄스러움의 자의식이 이해와 용서라는 명사 내에 들어서 있다. 이 작품은 흡사 두 개의 형상이 교차되어 있는 < Self-portrait_2, 흐르고 또 흐르고 >처럼 어떤 말도 담아 뱉을 수 없는 지워진 엄마의 입술만이 기다림의 고통을 대변해주는 듯 그렇게 깊숙한 적막함에 둘러싸여 있다.
개인의 역사를 중심으로 하는 인물화는 대중 친화적이진 못하다. 대신 타인의 부탁에 의해 그려지는 것도, 나를 그리는 것 또한 돈을 버는 행위와는 큰 연관이 없기에 있는 그대로의 외형과 내적인 심리상태가 고스란히 투영된다. 어느 땐 괴로울 만큼 리얼하여 시각의 고통을 주기도 한다.
그 이유는 자신과 닮은 모습을 발견했거나, 낯설기 때문이다. 안은영의 작품도 이에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들여다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만 있다면 곧바로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등의 궁금증을 유발하는 것도 사실이다. 확실한 건 < Self-portrait_3(눈물) >에서 드러나듯, 그의 자화상은 독백이자 고백, 용기에의 다짐이라는 것이고, 초상화는 대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가장 진솔한 창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육체와 영혼 속에 담긴 작가의 참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3. 레프 톨스토이(Lev Tolstoy)의 말처럼 안은영에게 예술이란 ‘사람과 사람을 결합시키는 수단’이다. 보다 내적으론 나의 분신, 너의 자아, 우리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무대다. 그렇다면 본질적으로 안은영에게 ‘그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작가마다 다르지만, 그에게 그리기란 무의식의 영역을 의식의 영역으로 전이시키는 과정이다. 행위를 통한 스스로와의 대화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현실을 빚기 위한 그만의 의례다.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 순간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목격한다. 그러한 상황에 이르면 작가는 현실의 것들과 결별한 채 온전한 나로 남는다. 그는 이 같은 과정을 ‘그림으로 쓰는 나날‘로 삶을 채우고 있다. 소통하기 위해, 다가서기 위해, 마주하기 위해.
한편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모두 근작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했던 오랜 경험이 자연스럽게 덧대지면서 그림에 변화를 준 흔적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조형요소는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강렬한 선(線), ‘자유롭고도 무거운 침묵의 선’이다. 유영(游泳)하는 선은 구상이 추상이 되는 단계이자 작가의 치열한 삶에 관한 투쟁의 언표라는데 의미가 있다. 그래서인지 선 가닥마다 자신이 사투하듯 견딘 삶이 녹아 있고, 강한 붓 터치에 절망을 헤집는 삶에 대한 열망을 얹는다. 반면 침묵의 선에선 거침없는 붓 자국 아래 남아 있는 자유롭고 확고한 의지, 용기, 나와 가족 등의 ‘끈’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는 다양한 단어들을 읽을 수 있다.
안은영은 겸손한 사람이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겸손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인 것 같다. “알고 보니 나만 틀렸다. 그것도 다 틀렸다.”라고 말하는 작가이기에 오히려 진솔하게 다가온다. 물론 앞으로도 작가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는 더욱 다양한 양상으로 펼쳐질 것이다. 앞으로 열어야 할 문이 많이 남겨져 있기에 이번 첫 개인전은 작가에게도 관객에게도 쉼표와 같은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Self-portrait 2(흐르고 또 흐르고)_Acrylic on canvas_38.0x45.5cm_2022
Self-portrait 3(눈물)_Acrylic on canvas_100.0x80.3cm_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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