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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원 展
갤러리 내일
2021. 11. 26(금) ▶ 2021. 12. 9(목)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3길 3 | T.02-2287-2399
4월의 버터플라이 53x45.5cm Oil on canvas2021
빗장으로 가린 꽃들의 기지개 -이경원의 그림
서길헌(조형예술학박사)
꽃을 꽃이라고 부르는 순간 꽃은 기호에 갇힌다. 수천의 꽃들이 꽃이라는 일반명사에 속절없이 갇혀있다. 장미나 백합 등, 꽃의 종에 따른 고유의 이름으로 지칭할 때에도 여전히 꽃은 지시어의 빗장 뒤에 숨어있다. 꽃들이 속삭인다. 우리를 이름에서 꺼내주세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세요. 당신들이 붙인 꽃이라는 편리한 기호를 잠시 잊고 우리의 ‘본모습’을 봐주세요. 제발 그렇게 쉽게 우리를 뒤덮고 있는 껍질만을 그리지 마세요. 그래도 굳이 우리를 그리겠다면, 눈을 감고도 떠오르는 우리의 상투적인 모양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손쉽게 그리지 말고, 똑바로 다가와 우리를 가리는 표준화된 코드의 빗장을 벗겨내세요. 우리가 온몸으로 켜는 기지개를 보세요. 우리를 감싼 겉모습을 뚫고 들어와 우리의 ‘본색’에 눈길을 주세요. 단순히 아름답다거나 그런 뻔한 것이 아닌 순간순간 우리가 발산하는 생생한 느낌을 잡아보세요.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우리의 표피에만 와닿는 선입견의 시선들을 줄무늬 빗장으로 가려주세요.
환희 91x91cm Oil on canvas2021
작가 이경원은 언젠가부터 눈앞에 놓인 꽃의 외형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의미를 느낄 수 없었다. 자신이 그리던 꽃의 실체에 낯선 의문을 느끼고 그것을 그리는 행위에 의혹을 품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사람들이 꽃의 본체를 놔두고 이름으로 소비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이를테면, 여러 행사에 끊임없이 배달되는 꽃들은 꽃 자체보다 거기에 부여한 이차적인 의미코드로서 피상적으로 소비되고 있었다. 그녀는 쉬이 포착할 수 없는 꽃의 실체를 가리고 있는 여러 꽃의 허울을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으로 그림 위에 일정한 간격의 줄무늬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타고난 재능에 더해 교육으로 터득한 평면에 입체를 구현하는 몇 가지 기교를 사용해 사실적으로 그렸던 ‘아름다운’ 꽃 그림은 사진 한 장으로만 남기고 누군가에게 선물로 줘버렸다. 이후로 그녀는 다시는 꽃의 ‘표면’을 그리지 않았다. 그 대신 그것을 가리는 줄무늬를 그려나가는 방식으로 그녀는 외형 과잉의 세계에서 복잡하게 마음의 혼돈을 초래하는 대상들을 덮어버림으로써 그것들을 일시적으로 지우고 ‘정리’하는 행위의 희열을 느꼈다. 그녀는 다른 사물들 위에도 줄을 그어나가듯 한동안 캔버스 화면을 스트라이프로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덮어둠으로써 마음의 갈피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떠나려 했던 꽃이나 사물들은 지워지지 않고 갇혀있다가 문득 되살아났다. 오히려 줄무늬 빗장 속에 감춰져 있던 사물들은 이전의 모습보다 더 또렷하게 눈앞에 불려 나왔다. 줄무늬 아래 숨죽이고 잊혀있던 그것은, 잠재적 이미지로 보존되어 있다가 그렇게 불쑥 고개를 들었다. 이로써, 그녀에게 가리는 행위는 오히려 보이는 것을 잠시 괄호에 가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나게 하는 작업이었다.
April 53x41.0cm Oil on canvas2021
애도의 심정은 사물을 가리고 있는 너울을 벗겨낸다. 그렇게 투명한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녀는 한때 스트라이프 무늬로 완전히 감춰버렸던 ‘어떤’ 실체의 장막을 다시금 들추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는 채, 자작나무숲에 숨은 미지의 짐승이 잠깐씩 몸을 드러내듯이 그녀는 스트라이프의 줄무늬 사이에 지우고 있던 사물들의 낌새를 조금씩 노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화가로서의 그녀에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경계에 대한 피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Coolness 41x27.3cm Oil on canvas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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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메일에 등록된 모든 이미지와 글은 작가와 필자에게 저작권이 있습니다. * vol.20211126-이경원 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