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문 · 임은수 2인 초대展

 

 

 

 

충북교육문화원 2층 예봄갤러리

 

2021. 11. 2(화) ▶ 2021. 11. 27(토)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공항로 287번길 56 | T.043-229-2600

 

www.cbec.go.kr

 

 

배정문 作_Born-Be-Close_950(h)mm x 가변크기_철+크롬

 

 

BORN. BE. CLOSE.

 

나는 죽음이 또 다른 삶으로 인도한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닫히면 그만인 문이다.

- 카뮈

 

태어나는 것과 죽음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다. 나의 탄생은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고 죽음 또한 나의 결단이 아니다. 그래서 인간은 늘 죽음이 마침이다. 곧게 서있는 수직의 철 구조는 탄생과 죽음의 메타포다. 그 사이에 있는 유기적 연결의 조형적 형태는 인간의 복잡다단한 삶의 메타포다. 요컨대 삶과 죽음은 늘 일직선상에 있으며 그 사이의 편린들은 단지 죽음의 경계선상에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미술에서는 오랫동안 삶과 죽음을 은유한 바니스타와 메멘토모리가 표현되어 왔다. 서양 미술사에 죽음의 주제는 아주 큰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대표적으로 티아 치노사그라드는 젊음과 거울에 비친 모습을 통해 죽음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기도 했다. 현대미술에서는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들이 삶과 죽음에 대한 관심과 두려움이 상업적 표현 방식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나 현재 에나 누구나 겪는 현상. 죽음이라는 것은 그 과정이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결단의 결과였더라도, 무엇이 됐든 반드시 마침이다.

생명의 세계란 죽음을 통해서 보아야 제대로 보이는 것 인지도 모른다. 진정한 생명과 삶의 세계는 생물학적 생명 - 물리적 생명의 현재성을 통해서는 발견하기 어렵고, 생물학적 생명의 죽음을 통해서 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생명이 삶을 정의하기 보다는 죽음이 생명을 정의하고 성찰케 하는게 아닌가 생각된다.

 

 

배정문 作_Born-Be-Close_950(h)mm x 가변크기_철+크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고통을 견딘다. 4cm도 안 되는 좁은 산도(産道)를 필사적으로 나오며 처음의 세상을 만나고 울음을 그칠 수 없지 않은가. 태중의 삶과의 이별은 또 다른 세상과의 만남을 통해 위로받지만 결국 자연의 이치를 거스를 수는 없다. 자연은 스스로 된 것이다. 자연스러움. 이 세상에 스스로 된 것은 없다. 인과가 있고 그 안엔 늘 필연이 존재한다. '절대나 영원'은 없는 것이다.신을 가정하고 믿는 것은 죽음이후의 무에 (無) 대한 두려움의 위로를 스스로 작정한 것인지 모른다.

윤회는 내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 계속해서 탄생과 죽음의 과정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생명은 인간 에게만 있지도 않다. 이번 작품을 통해 농밀한 삶의 그 귀함을 다시금 깨닫고 생명의 시작과 끝에 순응하며 지금을 두텁게 안으며 살아가야겠다.

수직으로 선 철조의 기둥에 다양한 각도와 사이즈의 철이 용접되어 있다. 좌대에서 시작되는 수직의 철구조는 중간이 잘려 있고 잘린 부분에는 각기 다른 사이즈의 철 관이 연결되어 있다. 수직의 시작은 생명의 시작이고 수직의 끝은 삶의 마감이다. 고로 그 사이 얼키고설킨 쇠관의 연결은 고단한 삶과 그 여정의 메타포다. 삶과 죽음은 변형이나 장식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내가 선택 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인 까닭이다. 서로 뒤섞여 자리잡은 중간의 세계는 세상살이의 과정이며 우리가 시시때때 만나고 만들어가는 풍파다. 어느 인간의 삶이든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지 않은가.

이번 작품 BORN. BE. CLOSE & 무아(無我)는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찬 삶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는 사람들에 관한 명상이다.

 

배정문

 

 

배정문 作_Born-Be-Close_950(h)mm x 가변크기_철+크롬

 

 

BE OR LIVE

 

에리히 프롬이 주창하는 존재양식에 따른 삶은 비판적이고 독립적이면서 개방적인 사고에 입각한 삶이다. 존재 양식의 삶이란 소유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나 타인과 자연에 대해서연대감을 형성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말한다.

현대사회는 감각적, 권위적, 상대적 우위의 쾌락을 무한정 만족시킴으로써 인간이 진정 행복해질 수 있느냐는 물음에 직면해있다. 인간은 과연 소유의 욕구를 절제하며 존재 내면을 위한 영적 성장을 추구하고 있는가?

존재론적인 가치 기준에서 존재양식은 "더 깊이 아는것"이고 소유양식에서는 "더 많이 아는 것, 소유하는 것"이다. 사상가 에크하르트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느냐 보다는 사람이 무엇으로 존재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즉, 영적 성장이 존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현대사회는 소비사회 Consumption com- munities라 일컬어진다. 오늘날의 소비사회는 물질적인, 혹은 기호적인 가치를 갖는 재화를 소비함으로써 인간이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이다. 이미 우리 사회의 소비는 '이용'이나 '사용(使用)이라는 관점 보다는 '욕망을 충족하기 위하여 재화를 소모하는 일' 이라는 '소비(消費)' 관점이 지배적이다. 즉 기호에 따른 물품의 소비를 현대소비사회의 특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보드리야르는 '주체의 소멸'이라고 부르고 있다.

 

 

배정문 作_Be or Live_가변크기_지시저울+택배박스+한지

 

 

『소유의 종말』의 저자인 리프킨 의하면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는 물질적 재화만을 상품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관계마저도 상품화한다고 말한다. 인간관계는 물론 정체성, 계층성, 불평등사회구조 등을 폭넓게 함의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소비구조를 눈여겨 봐야하는 이유 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더욱 치밀해진 소비방식에 여과없이 순응하는 현대인들은 이제 더 이상 사물들과 교감하는 데서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소유와 소비하는데서 삶의 목적을 찾고 있는 듯 하다. 부와 성공지향적인 세상에서 존재지향적 삶은 감정 낭비라는 고해를 당하고 있다.

이번 작품은 소비가 미덕인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인간의 탐닉 현상을 반추해 보고 그 안에 숨겨진 소유의 본질을 돌아보는데 있다. 코로나19로 야기된 새로운 소비 풍속 도는 다양한 계층 갈등과 소비 패턴의 변화를 가져왔다. 택배로 대표되는 소비대행은 인간의 수고와 부지런한 육체활동, 대면의 흥정을 삭제시키고 건조한 물물교환의 장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이미 내용물을 알고 있는 상자안에 현대인은 자신의 소비능력과 존재적 불안을 담아두진 않았을까? 지시저울에 쌓여있는 택배상자들은 다양한 물건들의 존재 장소였고 한때 존재의 집이었다. 그것들은 누군가의 만족과 경제 행위들의 결과이며 그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와 인과가 담겨 있다.

이번 작품은 존재냐 소유냐는 질문을 통해 산업과 경제, 과학의 발달이 인간의 내면에 끼친 영향력을 함의하고 존재적 삶에 대한 내면의 각성이 필요한 많은 현대인들에게 소유의 가치에 대해 깊은 성찰을 권하고 있다. 존재냐 소유냐를 주제로 시각화된 작품을 통해 인간의 참 존재 의미를 일깨우고 타성에 젖은 소비사회구조를 성찰해 보기를 바란다.

 

배정문

 

 

배정문 作_Be or Live_가변크기_지시저울+택배박스+한지

 

 

 

 

 

임은수 作_지나가다 전시장면_한지 위에 물감 드로잉_2015

 

<부드러운 권력>展 임은수 작가론

통감과 정화의 푸른 씨앗이 부드럽게 움튼다

 

황정인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큐레이터)

 

여기, 푸르고 부드러운 움직임이 있다. 그것은 종이 위 깊고 단단한 형상들의 반복 속에서, 덩어리와 선의 뭉침과 풀림 속에서, 겹겹이 쌓인 푸른 천들 사이로 반짝이는 빛과 수많은 작은 구멍들의 연쇄 안에서, 가닥가닥 섬세하게 이어진 실의 떨림에서, 바람의 감촉을 싣고 유연하게 대지를 가로지르는 길고 커다란 천의 유영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임은수는 개인의 내면과 사회 안에 깊이 새겨진 희생의 상처와 고통, 욕망과 애증, 슬픔과 우울, 트라우마에 관심을 갖고, 이를 드로잉과 설치, 퍼포먼스를 통해 위로하고, 해소하며, 치유하고, 생기를 불어넣는 삶을 실천해오고 있다.

 

 

임은수 作_파종 전시장면_동물 뼈·깃털_2018

 

 

위로와 치유의 몸짓

2000년대 중반, 그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어루만지는 이들의 숭고한 내면과 혹독한 세월을 견뎌내느라 딱딱하게 굳고 뭉쳐진 여성들의 슬픈 내면을 선 드로잉 으로 표현했다 (<당신의 초상>, 2005-2006). 기본적으로 장지 위에 섬세한 세필로 그려낸 드로잉은 치유와 위로의 의미를 지닌 행위의 결과로 반복적으로 집적되면서 화면 안에 형상을 서서히 드러내는 형식을 취한다. 그의 작업에서는 풀어주기, 보듬어주기, 펴주기 등의 특정 행위들이 드로잉과 설치, 퍼포먼스의 중심을 이루는데, 매 작업마다 써내려간 작업노트에서도 이러한 행위의 근간이 되는 작가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작품의 소재가 되는 대상, 특히 그의 작업에서는 고독과 슬픔, 우울 등의 심리적인 요인들을 '해소'하거나, 고이고 묶여있던 마음, 우울했던 시간을 '실처럼 푼다'거나, '펼 쳐 놓고', '늘어뜨린다', '포용한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 하곤 한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드로잉 뿐만 아니라, 한국식 가정문화에서 희생을 강요받았던 여성들의 삶을 의미 있게 다룬 설치작업 <그녀를 위하여>(2003)에서도, 현실 속 자신의 상황을 이겨내고 자유로움을 향해 초월한 인간의 모습을 담아낸 작업 <어떤 초월>(2005)에서도, 한국에서 이민자로서 살아가는 외국인 근로자의 가혹한 삶을 이해와 포용의 대상으로 인식한 퍼포먼스 <베트남에서 날아온 씨앗>(2008)에서도 일관되게 유지된다.

 

 

임은수 作_파종/부드러운 권력 전시장면_2018_청주시립미술관

 

 

씨앗이 된 몸

임은수의 작업세계를 관통하는 위로와 치유의 행위 기저에는 근본적으로 생명에 대한 존엄의식, 생명력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자리한다. 침체된 내면, 죽어버린 정신을 되살리는 생명의 근원을 탐구하는 여정에서 그는 식물성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게 된다. 나무가 물과 양분을 흡수하여 줄기와 가지를 통해 생명을 실어 나르는 과정, 거칠고 두꺼운 외피 안에서 부지런히 수액을 실어 나르는 식물의 모습에서 그는 자연과의 동질감을 느끼고, 그 스스로를 자연의 한 형태이자, 에너지를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인식하기 시작한다. 이는 드로잉작업 <자라다 >(2007-2010)와 설치작업 <나무아래서- 공림사 고목 >(2006)을 통해서도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생명성에 대한 인식은 자연과 자아의 동일시 과정을 거쳐 보다 근원적인 형태로 나아가는데, 임은수의 작업에 서는 그것이 파종의 대상이자 생명의 정수를 내포한 씨앗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에게 씨앗은 무한한 가능성이 응집된 에너지의 산실이자 치유와 회복에의 의지를 담은 결정체로서, 물질과 정신을 동시에 반영하는 실체다. 그는 2015년부터 지금까지 하나의 응집된 에너지를 씨앗의 형태로 설정하고, '파종'의 개념을 통해 그것이 증식, 확장되어 가는 형상을 드로잉과 퍼포먼스를 통해 선보이고 있다. 드로잉 연작 <파종>(2015- )은 종이 위에 푸른색 펜으로 힘있게 그어나간 동심원의 형상이 화면 곳곳에 증식하듯 뿌리내리면서 하나의 추상적 화면을 연출한 작업이다. 이것은 동명의 퍼포먼스를 통해서도 확장되는데, 작가는 보스니아 내전의 피해지였던 사라예보를 방문하고, 내전으로 인해 무차별 희생된 사람들의 혼과 잦은 전쟁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사람들의 삶을 위로하는 의미의 퍼포먼스를 2015년부터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퍼포먼스 <파종>(2015- )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한국과 발칸반도를 오가며 떠올린 생명력에 대한 가치와 개념들이다. 두 나라 모두 전쟁의 상흔으로 인한 절망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지만, 한국은 정부의 경제개발정책에 따른 산업화 사회로 본격적으로 진입하면서 급격한 변화를 겪었고, 발칸반도는 90년대 초중반에 일어난 내전과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정치적 내분이 초래한 인종학살과 인종탄압으로 인해 전쟁의 트라우마를 씻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 안에서 작가는 두 나라의 무의식 안에 자리한 생명의 에너지를 서로 교환하여, 서로 간의 부족한 부분들 채워주는 메신저로서의 역할을 서슴지 않는다. 그에게 한국은 급격한 경제개발로 자연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잃었으나, 여전히 역동적인 에너지와 강한 의지가 충만한 곳이며, 발칸반도는 비록 전쟁으로 많은 것을 잃었으나, 천혜의 자연이 지닌 순수함과 생명력을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작가는 이 두 나라가 지닌 서로의 다른 에너지를 교환하고 순환함으로써 조화로운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본인 스스로 씨앗이 되어 서로 다른 장소에 생명의 에너지를 전달하기 시작한다. <파종>은 이러한 행위의 은유적 결과물이며, 이 때 작가의 몸은 곧 씨앗이자, 생명의 순환을 매개하는 장소이며, 에너지의 교환을 일으키는 동인이자, 두 개의 서로 다른 에너지는 전달, 융합하는 영매이며 통로다.

 

 

임은수 作_Performance Series 보은 원정리 들판에서_2021. 06. 27

 

 

통감과 실천으로 하나 되는 예술과 삶

발칸반도와 한반도를 오가는 생명 에너지의 전달자를 자처한 퍼포먼스는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다. 강렬한 인상을 지닌 그의 퍼포먼스는 사실 드로잉과 설치를 실천적 의미로 끌어올린 총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의 작업을 장르로 구분하면 크게 드로잉과 설치, 퍼포먼스 세 갈래로 살펴 볼 수 있는데, 작업의 내용적인 측면과 더불어 각각의 장르는 저마다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드로잉은 그의 작업에서 에너지의 근원과 흔적을 파악 하는 탐구의 결과로서, 작업세계의 정신적인 축을 담당 한다. 설치작업은 그러한 에너지가 모이고 순환하는 과정과 방법을 시각화한 방법이라는 점에서 물질적인 축을 담당한다. 마지막으로 퍼포먼스는 작가가 삶과 예술을 통해 끊임없이 탐구한 실체인 에너지를 직접 전달하 고, 그것을 작동하게끔 만드는 실천의 원리이자, 앞서 언급한 정신성과 물질성이 합일되는 감각과 경험의 총체이다.

이렇게 그의 작업은 장르 간에 주제와 형식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각 장르별로 움직임의 자취가 남긴 흔적들이 모여 하나의 결과인 작품을 이룬다는 점, 그 시작점에는 대상을 마음 속 깊숙이 이해하고 포용하는 통감의 정서가 흐르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결국 예술의 형식을 통해 하나의 퍼포먼스로, 강한 의지와 직접적인 실천을 통해 삶의 일부로 자리한다. 급변하는 시대에 지나치기 쉬운, 그러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결코 외면하지 말아야 할 사회의 아픔을 직시하고, 그것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치유하며 정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보듬고, 끌어안는 것. 임은수의 예술적 실천이 곧 삶이 되는 방법이다.

 

'파종2'는 작가의 실천과 노고가 배어있다. 도축장에서 동물의 뼈를 구매하고 요리해 음성군 경로당 노인 분들께 대접해 드리고 뼈를 수거해 건조 시킨 후 사진 촬영했다. 프린트한 이미지 위에 볼펜을 이용해 무수히 선을 반복해 긋는 행위로 생명을 이식 시키거나, 실제의 동물의 뼈에 파란색 깃털을 붙였다. 무의식 상태에서 진행되는 작업 과정 중에 본래 형태가 지워지고 부드러운 질감의 촉수들의 이미지로 변형되어 드러난다. 이는 보이지는 않지만, 실재하는 생명입자들의 생명이 제거된 실체와 만나 작용하고 치유하는 재생과정을 의미한다.

 

 

임은수 作_Performance Series 속리산에서_2020.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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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11102-배정문 임은수 2인초대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