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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억 展
갤러리 이즈
2021. 6. 2(수) ▶ 2021. 6. 8(화)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길 52-1 | T.02-736-6669
www.galleryis.com
박수억의 ‘현(玄)과 빛’
1. 조형요소로써의 현(玄)은 흑(黑)의 백색(百色)이다. 단지 짙은 어두움이 아닌 백가지 색을 머금고 있는 색이자, 형상의 표면적 의미 뒤에 숨어 있는 뜻으로서의 색이라는 것이다. 또한 유(有)와 무(無)의 왕래를 허용하는 개념이기도 한 것이 현이요, 도가학파의 시조인 노자(老子)에 의하면 천지 만물의 근원인 것이 현이다. 금(金)은 냉(冷)과 온(溫)의 경계가 없다. 본래의 성질은 차갑기 그지없으나, 오묘함과 심오함을 부수로 삼는 현과 맞닿으면 무한으로 확장되는 성격을 지닌다. 즉, 금이 현에 붙을 경우 무수한 가능성을 내재한다는 것으로, 그렇게 측량 불가능한 세계는 동양미학에서 말하는 비움으로써의 채움과 채움으로서의 비움과 연결된다. 다시 말해 만(滿)과 공(空)인 셈이다. 현과 금의 만남은 이성의 세계에 국한되지 않는 세계, 덜어내며 채우는 세계, 현실을 텃밭으로 한 초월적 세계와도 관계가 깊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에 ‘빛’이 얹힌다. 그렇다고 물리적 에너지로서의 빛이 아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서구의 시각적 측량으로서의 빛과는 거리가 멀다. 이때의 빛은 생명의 에너지가 발산하는 빛이면서 진리에 준한 채, 시공을 초월한 천지 만물의 근원에 이르는 길 내지는 방향과 무관하지 않은 빛이다. 그러니 현, 금, 빛이 버무려진 세계란 본원의 세계이자 깨달음의 세계요, 신비롭고 알 수 없는 황홀한 세계이며 이상의 세계다. 물론 이상의 세계는 존재 밖에 존재하는 세계이고, 내가 속한 세계 너머에 있을 법한 구도의 세계, 진리의 세계이다.
2. 작가 박수억이 지속해온 ‘현(玄)’ 시리즈는 7번의 개인전을 거치며 변화를 거듭해온 결과물이다. 어느 순간 눈에 보이는 사실에 대한 재현의 서술을 지양한 채, 생략된 형상과 원과 삼각형 그리고 면과 선이 화면에 들어섰고, 이후엔 더욱 덜어내고 깎아낸 사유의 여백이 확장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그의 다섯 번째 개인전이었던 <현(玄)_비에 젖다>와 비교해도 차이가 있다. 당시만 해도 그의 작품은 <독도>, <비에 젖은 산야>. <꿈꾸는 왕피천> 등의 (비교적)전통성에 입각한 수묵화였고, 먹과 물이 종이에 스며들며 만들어내는 흑백 농담(濃淡)의 무한한 변주, 섬세한 준법이 가미된 산수 전경이 주를 이뤘다. 그러다 2019년 <현(玄)의 비상>을 주제로 한 개인전에선 거대한 원이 공간의 전부를 점유한 그림인 <기억> 등의 작품을 통해 정신으로 만나 마음으로 보고 손으로 그려낸 심연의 풍경이 등장했으며, 절제된 추상성을 통한 수묵조형세계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섬세한 필체와 절제된 감도가 투영된 수묵조형을 보여줬다. 2021년 현재, 박수억의 작품은 다시 한 번 변했다. 수묵에서 채색으로, 금지(金紙)와 같이 기존 사용하지 않던 재료의 접목이 이뤄졌고, 작가 본인이 시험 적용한 삽투압법을 비롯한 여러 기법 연구 역시 조형의 중요한 일부를 차지하게 됐다. 특히 형상은 거의 자취를 감춘(자기 등, 형상이 등장하는 작업도 있지만 과거 대비 상당히 거세된 흐름을 보인다), 추상의 단계로까지 변화했다.
3. 근래의 작업은 먹과 금이 여러 확장성을 내포한 빛과의 조화를 통해 현(玄)의 의미를 확대하는 방향에 서있다. 이는 조형의 변화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예술가로서의 삶을 타자의 삶과 등치시키고 자신의 작품이 수많은 혹자들에게 마음의 치유와 희망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자리할 수 있도록 하는 미적목표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맥락조차 달라진 건 아니다. 2019년 평론에서도 밝혔듯, 그는 여전히 전통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현대적인 여운을 저버리지 않는 태도를 갖고 있다. 태고로부터 전승되어 온 만물을 인문학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참된 도리를 깨닫고, 그 도리를 분동(分銅)으로 어디 하나 치우침 없이 자연의 진리에 다가서기 위한 노력은 유효하다는 것이다. 특히 수묵화의 현대성을 가감 없이 개간하며 사유의 공백을 한껏 열어놓되, 우리 삶 속의 모든 형질과 정신을 자연스럽게 녹여내고자 하는 박수억 작업의 일관된 지향점은 지금도 변함없다. 자연과 삶을 중심으로 놓던 화제(畫題) 또한 작품의 겉과 속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어지고 있다. 자연과 삶을 말함에 있어 대표적인 작품을 꼽으라면 120호 크기의 <현(玄)과 빛>이다. 작금의 작업을 대리하는 이 작업은 까만 여백에 선 하나와 원 하나만이 그려진 게 전부이다. 한두 개의 기하학적 도형임에도 깊이감이 흐트러짐 없이 화면 가득 부유한다. 넓은 면적의 배경으로 인한 여백의 여울이 물씬한 구성은 화면의 무게감을 소거하는 대신 마치 수면이나 우주 공간을 부유하는 듯한 유동적이고, 감성과 무의식의 교류, 극도로 단순화된 화면 속 상징은 현실을 매개로한 피안의 세계 그 실체에 접근하고자 염원마저 읽게 한다. 더구나 원과 선의 조응에 의한 안정감과 리듬감, 단순함 속 만발하는 이야기들,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유발되는 묘한 긴장감은 이 작업의 가장 큰 특징이다. 여타 작업 대비 구도적인 측면이 강하다는 것도 이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점이다.
4. <현(玄)과 빛>과 유사한 여운의 작업 중 하나는 30호 정도의 작은 작품인 이다. 운무를 연상하게 하는 배경 정중앙에 짧고 변형된 일(一)자를 닮은 선과 밝은 원이 그려진 이 작품은 선과 원의 조화(하모니)임에 틀림없으나, 기실 윤원구족(輪圓具足)의 수레바퀴 속 살(輻)과도 맞닿는다. 다시 말해 일(一)은 본래의 의미에 맞춰 ‘한결같은’, ‘누구나 처음과 같은’ 것이 인생이고, 원은 낱낱의 각기 다른 인간 삶의 모습(살(輻))이 뭉쳐진, 인생에 있어 겪는 만사(萬事)의 그것이라는 것이다. 는 이런 일 저런 일 모두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 싫던 좋던 삶은 이어진다는 것. 그러니 삶에 대한 태도는 어떠해야하는지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 라면, 장지에 노랗게 호분 채색된 <굴곡>에선 보다 구체적인 삶의 층위를 보여준다. 또한 장지에 금분채색으로 제작된 <희망> 연작에선 (제목에서처럼) 다양한 선택의 길과 과정을 거쳐야하는 삶에 있어 희로애락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때론 좌절과 절망이 교차하지만 결국 끝자락엔 가능성과 바람이 배어 있음을, 저버릴 수 없음을 본다.(이런 흐름은 그의 또 다른 작품 <삶> 시리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장지에 먹과 금분을 혼합한 이 시리즈는 <현(玄)과 빛>의 선두에 서며, 와 <굴곡>을 거쳐 <희망>에 이르는 단계에 우선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5. 이외에도 박수억의 작품들은 대개 우리네 삶을 토대로 한다.(설사 작가가 그렇지 않다 말해도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도록 그림자체가 삶에 관한 동어를 반복하고 있다) 무언가가 서로 당기는 힘을 의미하는 <인력(引力)>이나, 상호적 관계를 가리키는 , 융합내지는 결합을 뜻하는 등에선 삶의 지속에 요구되는 건강한 조응과 조화, 부합, 화합, 어울림 등의 명사를 떨쳐내기 어렵고, 에선 삶의 출발점에 선 자의 발밑을 마주함과 동시에, 하늘 아래 자리 잡은 태산같이 높고도 멀고도 긴 삶의 여정을 읽게 한다. 가지마다의 색과 선택은 제각각이어도 궁극적으론 우리네 모든 삶이 그러하듯 말이다. 하지만 예술의 씨앗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다. 고유한 자의식 아래 작가의 경험과 세계관 및 가치관, 예술관을 타고 배어나오는 것이 조형이고, 따라서 그의 근작들 또한 작가의 삶과 근친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박수억은 과거부터 현재의 작업 모두 자기혁신과 자기생명력을 잇기 위한 끝없는 경주의 그것과 다름없음을 보여줬다. ‘화도(畵道)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자신에게 담겨진 내재적 본질에 다가서려 했고, 진부함에 대한 변화의 신념을 바탕으로 익히고 삭혀 묵히는 과정을 거치며 현대적 조형성을 일궈왔다. 물론 그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작품 간 격차가 존재하고(이는 당연하다. 어떤 예술가이든 100점이 그림을 그린다하여 모두 우수한 것은 아니다. 개중 가치판단의 우위에 서는 건 10%내외다), 그리는 것과 표현의 차이란 쉽게 정복되지 못할 영역이라는 것도 깨닫고 있다. 내적으로 걸러낸 미감과, 상황, 현상 등을 표상으로 드러냄이란 녹록하지 않음을 그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미적 성찰이 그가 그림을 통해 말하고, 찾으려 하는 것의 근원이 되고 있음도 부정하기 어렵다.
홍 경 한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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