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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란 展
인사아트센터
2021. 4. 14(수) ▶ 2021. 4. 19(월)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길 41-1 | T.02-736-1020
최영란 작품세계 왜곡된 인체 비례를 통한 탐미적인 비정형의 조형세계 신항섭(미술평론가) 시각적인 이미지로서의 부드러움, 따스함, 모호함, 그리고 환상적, 몽환적이라는 단어 속에 담긴 정서는 꿈과 사랑, 행복이라는 의미와 연결된다. 회화작업에 이들 단어를 개입시키면 필시 그에 합당한 시각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물론 작가로서는 이러한 단어를 의식하지 않은 채 자신이 추구하는 이미지를 만들 것이다. 하지만 감상자는 그림에서 무언가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ㄴ 또는 작품 속에 담고자 하는 의미, 즉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파악하는데 있기에 그렇다. 다시 말해 인간은 언어 또는 문자를 통해 사고력을 키우는 까닭에 회화작품을 감상하는 태도 또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게 되는 까닭이다. 최영란은 오래 전부터 위에 열거한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의 작업을 해왔다. 소재는 인물이었고 누드가 큰 부분을 차지했다. 조형적인 특징을 요약하자면 형태를 변형하고나 왜곡 그리고 과장이었다. 다시 말해 누드의 경우 신체의 특정부분, 즉 둔부를 지나치게 과장하고 왜곡하는 방식의 독특한 조형미를 추구해왔다. 인체를 왜곡시키는 조형적인 수법은 모딜리아니의 작품에서 잘 드러나듯이 비정형의 비례에서 비롯되는 시각적인 쾌감을 수반한다. 형태를 변형하거나 왜곡했을 때 비롯되는 시각적인 쾌감이란 일상적인 시각을 벗어남으로써 마주하는 비정형의 아름다움에 대한 공감이다. 이처럼 인체 및 누드를 통해 비정형의 이미지가 주도해온 그의 작업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조형적인 진화를 거듭해왔다. 시각에 따라서는 다소 부담스럽다고 느낄 수 있을 만큼 과도하게 왜곡된 비례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창적인 형태미라는 평가에는 인색하지 않았다. 물론 익숙하지 않은 낯선 이미지, 더구나 지나치다고 생각될 정도로 크게 변형되거나 왜곡된 이미지에 대해서는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미술사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조형세계를 추구한 작품들이 시작단계에서 몰이해의 벽에 부딪히곤 했던 것처럼 낯선 것, 생소한 것에 대한 저항은 상상 있어온 일이었다. 그의 작업도 그런 범주에 속할 만큼 색다른 인체 비례를 강변해왔다. 그리고 최근 작업에서는 세련된 조형감각의 인물 및 누드를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변형하거나 왜곡하고 과장하는 수법을 동원하고 있으나 작가적인 연륜에 비례하듯 한층 성숙되고 아름다운 조형미에 도달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부드럽고 온화하고 차분히 가라앉은 색조가 화면을 지배하는 상황은 우연의 소산이 아니다. 오랜 조형적인 모색의 흔적임과 동시에 손의 기술 또한 무르익은 결과다. 특히 중간색조가 장악하는 최근의 작업은 미적 감각이 한층 세련되어 있다. 미묘한 중간색으로 점철하는 다층구조의 화면은 심미세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이차색에 그치지 않는 삼차색도 깊은 추상적인 이미지 속에 자리하는 인물 또는 누드는 배경과 일체가 된다. 그만큼 기법적인 통일을 중시한 결과이다. 인체의 특정 부분을 과장함으로써 나머지 부분은 역으로 왜소하게 보이는 불균형의 미를 추구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일상적인 시작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조형의 묘미가 거기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모양에서 살짝 벗어난 비정형의 이미지는 어쩌면 창작의 세계로 들어서는 관문일 수도 있다. 이는 기존의 조형적인 질서에서 벗어나는 창의적인 시각과의 만남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기에 그렇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우리가 현실세계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일이 조형공간에서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에 불과하다는 점을 깨닫게 해준다. 그의 작업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일상적인 이미지는 그만의 조형적인 상상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누구에게는 불편하게 보일 수도 있는 비정형의 비례일지라도 거기에는 세속적인 시각을 초월하는 미적인 쾌감이 자리할 수 있다. 그는 자기신념에 의지하면서 오로지 비정형의 미를 탐구하는데 열정을 바쳐왔다. 최근 작업은 오랜 탐색의 과정이 좀 더 풍부하고 세련된 미적 감각과 조우하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웅변한다. 비정형의 미에 대한 확고한 의지는 보다 다양한 관점으로의 이동을 통해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여전히 왜곡과 변형이라는 조형어법을 고수하고 있음에도 시각적으로는 편해지고 있다. 특정 부분을 왜곡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보다 순화된 인체비례를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인물 및 누드작업은 한 명 또는 복수의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식이다. 특이하게도 얼굴은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정면이거나 측면이거나 이목구비를 선명히 묘사하지 않는다. 작품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코나 눈, 입 모두를 묘사하는 경우는 좀처럼 볼 수 없다. 작품의 대다수가 눈이나 입 또는 코만으로 얼굴의 이미지를 나타낼 뿐이다.
이처럼 생략된 이미지의 얼굴 표현은 익명성을 전제로 하는 그 자신의 작업에 대한 방향성을 말해준다.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인물이나 누드의 형태미 너머에 존재하는 회화적인 이상 또는 환상이다. 거기에는 그 자신의 미의식 및 미적 감정을 반영한 조형공간과 사유의 공간이 자리한다. 그의 작업은 크게 누드와 코스튬으로 분류할 수 있다. 누드화는 단순히 인체의 아름다움을 부각시키거나 찬미하는데 있지 않다. 여체의 곡선 및 볼륨은 가감할 것 없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대다수의 누드 작업을 하는 화가들은 보이는 그대로의 여체를 찬미하는데 집중한다. 이에 반해 그의 경우는 그 자연스러운 미를 비틀어. 왜곡시키거나 변형시킨다. 자연미를 파괴하는 대신에 왜곡된 조형미로 대체한다. 누드가 왜곡되는 것은 비정형의 미를 찾기 위한 일이다. 실제와 크게 다르게 왜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인체의 곡선과 볼륨은 아름답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은지 모른다. 누드작업은 형태를 모호하게 처리한다. 어쩌면 과도한 왜곡이나 과장에 대한 편치 않은 시각을 완화시키는 효과를 위한 수법일 수 있다. 실제로 모호하고 몽롱한 여체의 이미지는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로 이끈다. 뿐더러 누드가 존재하는 상황이 어둡게 처리되는 것도 여체의 아름다움을 부각시키려는 일반적인 누드화와는 상반되는 접근방식이다. 어둠속에서 은근하게 드러나는 여체의 곡선과 볼륨에서 감지되는 신비적인 분위기야말로 탐미적인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모호하게 드러나는 여체에는 미묘한 아우라가 깃들인다. 형태가 모호할 경우에는 그 이면을 들여다보려는 의지가 발동하게 된다. 모호한 형태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궁금하기 마령이어서 사고의 확장, 즉 추측이나 상상 그리고 사색을 수반하게 된다.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적 의미는 이로부터 출발한다. 최근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사색의 뜰>, <사색의 정원>, <신의 정원>, <빛의 정운>이라는 일련의 명제가 시사하고 있듯이 의식세계를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사색, 빛, 신과 같은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자연현상이다. 초자연적인 세계 그리고 의식의 활동에 연관 되어 있다. 이는 자연 및 우주가 만들어내는 신비한 현상에 대한 관심 및 환기임과 더불어 개인적인 신앙과도 연결된다. 누드와 함께 인물은 그의 작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실내공간에서 일어나는 여성의 일상적인 삶의 정경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화는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 등의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적지 않다. 그런가 하면 여성의 섬세한 감정세계를 탐미적이고 시적인 이미지로 표현한다. 차 한 잔의 여유, 술 한 잔의 해방, 책 한 권의 지적 희열, 음악 한 곡의 행복 그리고 혼자 고독과 차오르는 사랑의 감정이 점철하는 일상사가 마치 그림일기처럼 펼쳐진다. 최근 작업에서 돋보이는 표현기법의 하나는 인물의 머리카락에 대한 표현방법이다. 마치 타오르는 불꽃마냥 곤두서는 머리카락을 두터운 질감으로 표현한다. 다른 부분은 곱고 부드럽고 고요한 이미지로 표현되는데 반해 거칠고 두터운 붓 터치의 머리카락을 역동적이다. 너무도 이질적인 표현기법의 대비이긴 하지만 화면에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함으로써 상황을 반전시키는 묘미가 있다. 발상의 전환이 가져온 조형의 파격이다. 그처럼 극단적인 이미지의 대비는 새로운 미적 쾌감으로 작용한다. 탐미적이고 심미적인 표현기법에서 돌출하는 질감의 표현은 그 자신의 조형세계에서는 하나의 반란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수하고 이상하다거나 이질적이지 않다. 오히려 정적인 이미지에서 동적인 이미지와의 융합에서 새로운 시각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그의 작업에 이후에는 또 어떤 방식으로 진화될지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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