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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현 展
루에(Ruhe)를 향한
드로잉
갤러리 도올
2020. 11. 25(수) ▶ 2020. 12. 13(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팔판동 27-6 | T.02-739-1405~6
드로잉
도시의 에너지를 어루만지다
도시는 우리 삶의 터전이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한국인의 80% 이상, 세계 인구 60%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는데 그 수치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듯 도시는 전 지구적 생활 공간이 되었다. 김승현은 지난 몇 년 동안 도시에 주목하여 회화적 실험을 진행해오고 있다. 작가의 관심은 도시 공간을 재현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생명력이나 도시를 체험하는 자신을 표현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도시와 작가 개인의 접촉면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포착하는 데 있다. 따라서 우리가 김승현의 작품에서 확인하는 것은 특정 도시의 풍경이 아니라 작가라는 프리즘을 거친 추상적 도시 이미지다. 도시를 하나의 유기체로 바라보는 작가는 그 안에서 획득한 인상을 몽타주하고 활력 넘치는 제스처로 화폭에 옮겨낸다. 일찍이 지리학자 이-푸 투안(Yi-Fu Tuan)이 밝혔던 바대로, 낯선 도시 공간은 인간의 경험을 통해 의미로 가득한 장소가 된다.
제6회 개인전 《루에(Ruhe)를 향한》에서 김승현은 목탄, 콩테, 아크릴, 오일 파스텔, 펜, 연필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 회화와 드로잉을 선보인다. 전시명 뿐만 아니라 작품 제목에도 등장하는 Ruhe는 본래 휴식과 고요를 뜻하는 독일어다. 이 단어는 독일에 체류했던 작가의 경험과 연관을 맺고 있다. 2019년, 김승현은 ‘카를의 휴식’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도시 카를스루에(Karlsruhe)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 계기로 오롯이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유럽의 도시에서 수집한 이미지와 개인적 내러티브를 결합한 작품을 제작한 것이다. 전시 제목에서 잘 드러나고 있듯, 작가는 자신이 지향하는 Ruhe를 작품으로 구현했다. 그러고 보면 h가 묵음이 되며 ‘루’ 발음이 길게 이어지는 독일어 Ruhe의 음성적 뉘앙스 자체가 듣는 이를 느긋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휴식과 고요는 대개 침묵으로 이어지고, 침묵은 우리를 가라앉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한다. 우리를 들뜨게 하거나 종종 아프게도 했던, 시끄럽고 혼란한 일상에서 벗어나 이른바 거리 두기의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로써 멈춤과 비움은 어느새 ‘나’에 대한 충만함으로 가득해진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김승현이 자기만의 Ruhe를 거쳐 펼쳐낸 화면은 고요하기보다 열정으로 들끓는다. 정적과 안식 대신 역설적이게도 힘찬 에너지가 폭발한다. 이는 가만히 멈추고 휴식을 취하기보다는 자신에게 Ruhe가 무슨 의미인지 고민하며 여러 도시 공간을 부지런히 탐색했던 때문이다. 작가는 Ruhe를 통해 내적 에너지를 맘껏 분출할 기회를 마련했던 것이다. 결국 김승현의 Ruhe는 자신에 집중하고자 하는 바람을 내포한 단어다. 예술에서 표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바깥의 태양이 빛을 잃으면 내면의 태양이 빛을 발한다”라고 말했던 화가 마티스의 비유를 빌자면, 김승현은 자기 안의 태양 빛에 집중하기 위해 Ruhe를 열망한 것이다.
Tower charcoal on canvas, 91x72.7cm, 2019
대표작은 6개의 캔버스가 합쳐져 하나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그림이다. 폭이 270cm가 넘는 전체 화면으로 조합했을 때 각 캔버스의 경계에 위치한 형상이 조금씩 어긋나며, 바로 여기에서 도시 공간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김승현 특유의 방법론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 작품은 스위스 바젤을 여행하면서 포착한 인상과 독일 뮌헨의 마리엔플라츠 이미지를 결합한 것으로, 재현적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단지 미미하게 암시될 뿐이다. 이외에도 <항해>, <유연한 땅> 등 주요 작품에서 대체로 과감한 선묘와 감각적인 색채가 두드러지며 다채로운 회화적 마티에르를 느낄 수 있는 흘리기와 뿌리기 기법이 돋보인다.
김승현은 특히 목탄을 즐겨 쓰는데, 선이 지나간 자국을 그대로 남기는 표현에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 화면에서 보이는 작가의 신체적 흔적과 촉각성은 감상자를 작품 가까이 끌어들이고 있다. 이처럼 우연과 즉흥성, 자유로운 느낌이 특징적인 화면을 보여주지만, 때로는 제도용 자를 활용한 기하학적 도형이나 패턴 혹은 글자가 등장하기도 한다. 깨어지고 조각난 형태와 속도감, 문자적 요소는 도시의 역동성을 다루었던 미래주의를 떠올리게 하고, 힘있게 내리그은 선은 액션 페인팅을 생각나게 하는 부분이다. 그런가 하면 화면에 등장하는 깃발, 길, 다리, 창문은 감상자에게 여러 갈래의 해석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그것은 인생이라는 여정에 대한 작가의 시각이 반영된 일종의 심리적 상징이거나, 작가가 낯선 도시와 교감하며 발견한 단편적 이미지 기억일 것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김승현의 회화에 내재하는 상반된 힘이다. 작가는 질서와 조화를 향한 의지와 파괴와 해체 욕망이 공존하는 세계를 전개한다. 이로 인해 작업 전반에서 더욱 강력한 생명력이 발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김승현은 자신을 둘러싼 도시 환경과 공간에 반응하면서 본인의 감각으로 포착한 이미지를 자유로운 회화 언어로 표현한다. 도시 속에서 쉼 없이 빠르게 흐르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Ruhe는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전시 《루에(Ruhe)를 향한》은 각자에게 안식이 갖는 의미, 그리고 이제 우리 삶과 분리 불가능한 도시에 잠재된 생명성을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세상에서 해방되는 데에 예술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또한, 세상과 확실한 관계를 갖는데에도 예술을 통하는 것이 가장 좋다”라는 말을 남겼다. 작가 김승현에게도 예술은 그러하리라. 이번 개인전 역시 세상과 관계 맺는 또 하나의 뜻깊은 사건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 믿으며 김승현의 활발한 예술적 행보를 기대한다. 김보라(예술학, 홍익대학교 초빙교수)
루에(Ruhe)의 시선 acrylic, charcoal on canvas, 145.4x273cm,2020
Eruption charcoal on canvas, 288x145cm,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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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메일에 등록된 모든 이미지와 글은 작가와 필자에게 저작권이 있습니다. * vol.20201125-김승현 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