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지민 展
Tool And Boxes
아트스페이스 영
2020. 11. 14(토) ▶ 2020. 12. 13(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9길 5 | T.02-720-3939
https://artspace0.com
임지민의 여덟 번째 개인전의 전시명 《Tool and Boxes》(2020)은 작가의 작업 프로세스를 지시하는 명칭이다. 작가는 작업을 하기 전에 많은 수의 이미지들을 수집하는데, 이러한 이미지들은 작가 개인의 경험과 직접적, 간접적으로 연관된 것들이거나, 즉흥적으로 눈이 가는 이미지들, 또는 유튜브의 연관 내용 자동재생목록처럼 기존의 이미지에서 파생된 또 다른 이미지들이기도 하다. 이렇게 수집한 각각의 이미지들은 작가의 머리 속과 이미지 폴더 안에서 차곡차곡 축적되고 분류되어진다.(Boxes) 수집한 이미지들을 작업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작가는 이미지의 특정 부분을 선택하고 대체로 정방형의 작은 캔버스에 단편적인 화면들을 고정시킨다.(Tool) 이러한 선별 과정에서는 무엇을 선택하느냐 만큼이나 무엇을 배제하느냐가 중요할 수 있는데, 임지민의 경우 흥미롭게도 이미지의 “구체성”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이전 전시들에서 선보인 임지민의 작업은 --익명의 유년기라 할 수 있는--과거의 한 시절을 연상시키는 다양한 인물사진들을 모아서, 인물들의 얼굴을 파악할 수 없는 특정부위(턱선, 손 등)를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인물사진의 특성상 “초상화”로 받아들여지겠지만 구체적인 표정을 확인할 수 없는 이러한 방식은 작가의 작품에 수줍고, 무언가를 회피하는 듯한 성격을 부여했다. 비록 얼굴이 지워진 초상화이지만, 그럼에도 감상자는 그림에서 찾아낼 수 있는 단서들, 의복, 배경, 상황 등을 통하여 어떤 이야기(storytelling)를 유추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은 캔버스 작업들은 이러한 단서가 거의 등장하지 않고, 손이라는 대상과 손 위에 놓인 사물들, 혹은 특정 동작들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다. 이는 역설적으로 작품에 등장하는 손들을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익명의 타자들이 아닌 단일한 주체(이를테면 작가 자신)의 여러 단편들로 인식하게 만든다.
각각의 이미지들은 무척 개인적인 기억의 단편들을 소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포토샵의 크로핑과 인스타그램 업로드 사진포맷을 연상케 하는 작은 캔버스들은 작가가 이미지를 사고하는 관점이 오늘날의 디지털 시대에 닿아있음을 드러낸다. 그 안에 그려진 이미지의 과거지향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수집 과정에서부터 편집에 이르기까지의 방법론에 대한 추적 과정에서 감상자는 자연스럽게 수집한 이미지들과 작가 자신의 이야기 사이에 어떤 거리가 존재함을 확인하게 된다. 즉, 작가가 표현하는 이미지는 그것이 지시하는 문맥(context)을 상실하거나, 혹은 여러 단계에 걸쳐 숨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거리감은 이미지가 실제 작업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일체의 표현적 기교를 부리지 않은, 어찌 보면 투박하기까지 한 직접성을 통해 기대 이상의 “정직함”을 획득한다. 임지민의 작업은 그림 내면의 이야기보다, 그림 자체가 가지는 정서적 울림에 방점을 두고 있다.
반면에 큰 캔버스에서 이루어지는 작업들은 정방형의 소형 작품들에서 다루어진 이미지들을 재조합하여 보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보려는 의도가 드러난다. 작은 작업들의 작품명이 이미지의 상태, 혹은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면, 큰 작업의 작품명에서는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여 심상을 만들어내는 다양한 형용사와 수식어가 사용된다. 재조합되는 이미지들 또한 정직한 표현에서 한걸음 나아가, 그것이 재조합한 회화적 결과물임을 짐작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선과 색면을 통한 강조, 오려서 콜라주 한 듯 이미지들 사이에 의도적으로 만들어지는 레이어들은 화면을 구성하는 이미지들 사이의 순차, 인과, 종속 관계를 살펴보는 적극적인 감상을 유도한다. 일종의 ‘마인드맵(mind map)’이라 할 수 있는 큰 캔버스는 작가가 기억의 단편들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감정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전달한다.
임지민은 작업노트에서 “나의 기억은 계속 먼 과거를 보고 내 눈은 계속 현재를 보고 마음은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 행복하였지만 슬픈 과거의 기억, 현재를 충실히 살고 싶은 의지, 또 다시 수많은 이별을 맞이해야 한다는 불안이 계속 충돌한다.”고 말한다. 이는 삶의 상처를 치유하고 의미를 찾아가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루어지는 작품활동에 대한 서술일 것이다. 그러한 치유가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기억을 곱십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비관론적 시선을 읽어내는 것도 불가피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꽃과 잎, 열매와 씨앗의 모티프는, 현재를 살아가려는 의지와 미래에의 불안이 뒤섞이며 과거를 붙잡고 있는 과정에서도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나아갈 수밖에 없는) 작가 자신의 의지와 소망을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새롭게 채워질 기억의 상자들과 새로운 방법론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이, 작가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관객들의 특권일 것이다.
김태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