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훈 展

 

HETEROZYGOTE : 이형접합자

 

 

 

스페이스 엑스엑스 SPACE XX

 

2020. 11. 14(토) ▶ 2020. 11. 22(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도림로128가길 1

후원 | space xx, 시각집단31

 

 

이명_아무것도 들리지않았다(Tinnitus_Heard nothing) single channel / 30min / 2020

 

 

삶과 죽음의 역설적 호환성

 

이선영(미술평론가)

 

최재훈의 이형접합자(異形接合子, HETEROZYGOTE) 전은 인간의 분열적 조건으로부터 시작된다. 작품들은 그 자신을 다른 존재처럼 마주하고 벌어지는 사건의 장이다. 이러한 대결적 구도는 낯설고 기괴하며, 때로 공격적이고 자학적인 면모를 띈다. 자기가 비춰지는 (금속)거울에 총을 쏘는가하면 정체불명의 액체 같은 낯선 환경 속에 들어가 있는 상황이 카메라에 비춰지기도 한다. 승리의 부산물인 기념비는 영광보다는 잔혹함이 두드러진다. 이형접합자는 ‘서로 다른 대립유전자를 가진 개체’를 의미하는 생물학적 용어지만, 개인 더 나아가 사회에도 해당되는 비유다. 진보 또는 아름다운 화해의 서사인 변증법처럼 정(正)과 반(反)이 종합(合)되는 것이 아니라, 대립적 가치가 한 개체에 접합되어 있는 상황은 갈등과 불화의 여지를 남긴다. 접합 상황에 따라 어느 순간에는 폭발적으로 개체가 해체될 수 있는 위험 요소를 자체에 내장하고 있는 것이다.

유전형 (genotype)과 표현형(phenotype)이 구별되듯, 잠재적인 것은 언제든 현실화될 수 있다. 이형접합자는 동일자와 타자의 긍정적 부정적 관계를 동시에 함축한다. 물론 대립적 요소의 공존은 창조적 긴장일수도 있다. 장 보드리야르가 [시뮬라시옹]에서 걱정 했듯이, 동일한 것이 복사되는. 그래서 주체도 객체도 없어지는 동일증식 집단이 문제되고 있는 포스트 모던한 사회에서 각각의 질이 유지되면서 상호작용한다는 비유는 긍정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최재훈에게 이형접합자란 무엇보다도 이질적인 것이 공존하는 자신에 대한 비유다. 작가는 ‘나뉘어질 수 없는’이라는 의미에서 파생된 ‘개인’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자신을 산산 조각내고 그것을 다시 맞춰본다. 그러나 치유라는 미명하에 이뤄지는 봉합은 늘 상 완전치 않으며, 그 간극과 균열에서 사건이 발생한다. 거울과 비교 될 수 있는 기구(스테인리스 스틸, 카메라 등)나 물질(물)이 자주 등장하는 그의 작업은 자기 분석적이다.
예전 작품 중에는 헤어진 연인에게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담은 것도 있으니, 이러한 자기 반영의 유래는 꽤 길다. 연인이라는 살아있는 거울을 비롯하여, 그가 작품에 도입하는 거울은 매우 역동적이다. 영상이라는 전자거울 외에도 여러 겹의 반사장치들이 활용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거울의 심리학을 공유한다. 사빈 멜쉬오르 보네는 [거울의 역사]에서 거울은 인간의 의식에 자기 육체의 상을 보여주면서 수많은 투사와 상상적 동일시의 자리를 제공한다고 본다. 라캉을 비롯한 현대의 심리학자들은 자기상의 불안정성을 강조한다. 보네에 의하면, 자신의 상을 바라보는 것은 바로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는 것이며 시간의 파괴 작용을 보는 것이고, 우리가 맞서서 스스로를 지켜가는 그 현실을 파악하는 것이다. 최재훈의 작품에서 거울에 상응하는 기구들은 그 앞에 선 주체로 하여금 욕망과 공포를 느끼게 한다. 보네는 거울에 대한 가장 유명한 신화인 나르시스의 예를 들면서, 동일한 자신은 잡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최재훈의 ‘이형접합자’는 순수한 정체성의 확인 보다는 ‘소외의 낯선 분신을 구현’(보네)한다는 점에서 거울과 대치한 주체의 상황을 새로운 방식으로 반복한다. ‘이형’이나 ‘접합’은 원형이나 본질, 순수나 정체성 등과 달리, 그 자체로 이물감을 떠올리는 개념이다. 몸과 비유하자면 경계가 와해되는, 또는 개체의 항상성이 무너지는, 즉 상처나 죽음을 떠올리는 개념이다. 그에게 작업은 상처를 기억하고 덧내고 치유하고 비유하는 과정이다. 이질적인 것들이 동화(同化)되지 않는 것은 개체로서는 심각한 문제이며, 치유나 복구가 필요한 상황을 말한다. 그런데 생물학적 병과 달리, 정상과 이상의 구별이 불확실한 심리적 조건에서 치유란 모호하다. 예술에서 치유는 오용되고 남용 되어 기만적인 의미까지도 가지는 현재, 작가는 섣부른 치유를 말하지 않는다. 그는 상처를 덮지 않고 증폭시킬 뿐 어떤 결론을 내지 않는다. 다만 관객은 그의 작품에서 스스로를 비추게 됨으로서 문제의식을 공유하게 된다.
분열적 조건은 개인의 병을 넘어 사회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최재훈은 개인 스스로도 이러한 과정을 심하게 앓았다. 하지만 상처받기 이전의, 분열되기 이전의, 회복되어야 할 최초의 온전한 상태가 있을 수 있을까. 정신분석학은 모체로부터 완벽하게 보호된 상태에서 벗어나는 탄생이라는 사건 자체에서 트라우마를 본다. 물론 트라우마가 실제만큼이나 상상적이라고 해서 고통이 감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정신은 물론 몸마저도 텍스트라는 견해가 있다. 그 텍스트는 백지로 출발하지 않으며 씌여지고 지워지기를 반복한다. 인간은 ‘만들어진다’는 다소간 부정적 의미 안에서 어디까지가 본질이고 어디까지가 변화된 것일까. 현대의 인류학, 심리학, 사회학, 언어학 등은 온통 경계의 불확실성에 대해 말한다. 예술만 해도 근대 시기에 자신의 순수성을 선언하자마자 역설적으로 경계가 무너져 버렸고, 제도만이 간신히 경계를 지탱해주고 있는 실정이다.

기원의 불확실성은 목적의 불확실성과도 연계될 것이다. 현재는 운명처럼 작가의 삶을 살고 있는 그가 처음에 예술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의미심장하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학교 대표로 반공포스터 대회에 나가곤 했다. 어린이로서는 제대로 알 수 없는 지배이데올로기의 희생자였지만, 그럭저럭 자신의 재주에 대해 확신하게 했을 것이다. 또래 친구의 관심도 한몫했다. 입에 붓을 물고 태어난 듯한 자기 신화 연출에 열심인 이들도 있지만, 최재훈은 자신의 출발점부터 분명했던 가상적 요소를 의식한다. 지나고 나서의 일이지만, 반공이든 첫사랑이든 가상의 몫은 상당하다. 그의 예는 어떤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와 동력이 전혀 다른 곳에서 올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제 작가가 돼서 반공이나 통일운동 등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한다. 그 과정은 학창시절부터 시작되었고, 진실로 믿어졌던 것들이 모두 역설로 뒤집혀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양비론은 옳지 않지만, 반공이든 통일운동이든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는 정치세력은 희귀하다. 환상과 전략 속에서 각자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있을 따름이다. 물론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른 맹목적 움직임에서 우연의 역할을 부정할 수는 없다. 최재훈은 2004년에 있었던 첫 개인전 [the world_set] 부터 연극 세트처럼 다가오는 세상에 대한 생각이 엿보이는데, 그것은 재개발 공화국인 한국의 상황 뿐 아니라, 주변의 정세에 의해 좌우되는 어떤 본질적 문제(가령 통일)에 대한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통일을 비롯한 사회 운동에 대한 잔여물이 발견된다. 미발표의 최근 작품에서 전쟁을 상징하는 도상들이 접합된 채 일그러진 트로피가 등장하는 작품이 그 예다. 그 옆에서 작가는 그 상황을 회피하려는 몸짓을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회피조차도 사회적 현실과의 관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작업실이 있는 파주 근처의 임진각 공원 등이 놀이동산처럼 펼쳐져 있는 모습에서 아직도 확실한 종전선언이 없는 현실의 또 다른 모습을 본다.

 

 

호흡_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Breath_Said nothing) video installation / 30min / 2020

 

 

현실 속에서 차지하는 가상의 몫에 대한 생각은 작가의 몸과 뇌리에도 흔적을 남겼다. 그 흔적이 추상적이고 단편적이라 할지라도, 그는 시대와의 관계 속에서 고민을 했던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 이후에는 그러한 모순과 역설의 지점은 더욱 불확실해 진다. 작가는 ‘전쟁이 끝나지 않는 나라에서 전쟁과 함께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를 물으면서, ‘분단된 조국은 내 몸에 새겨진 투명한 문신’이라고 말한다. 비록 그것이 ‘아주 오래전 거울 속’ 장면인 듯 하지만 말이다. 그에게 유예된 전쟁의 상황은 그의 이전작품 제목처럼 [불확실한 풍경]이며, [전쟁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다. 이제 전쟁은 뜨겁기 보다 차갑다. 역사가 아니라 일상이다. 정점이 아니라 편재한다. 그의 작품 속 효과음인 일상의 백색 소음이 전쟁터 같은 혼란함을 주듯이 말이다.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기원과 목적을 일단 괄호 치면 남는 것은 과정이다.

스테인리스 슈퍼미러에 실탄으로 사격한 작품 [나의 역사적 상처](2002-2020)는 그 공격적 과정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신비한 외형을 갖춘다. 분열하는 세포처럼, 물방울이나 거품 입자처럼, 때로는 구름 형상같은 올롱볼롱한 굴곡을 가진 금속판은 그것이 비추는 대상을 심하게 왜곡시킨다. 자신이 바춰지는 표면에 총을 발사한 극한적 행동이 낳은 결과물은 아름다운 무늬로도 보일 수 있는 상흔들이다. 랩을 씌운 다음 발사한 것이라 충격의 효과는 표면의 다양한 굴곡으로 남는다.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 패널로 이루어진 단위는 블랙, 골드, 실버 등의 빛을 발하면서 바닥과 벽에 가변적으로 설치된다. 형식적으로 뿐 아니라 내용적인 확장성을 가지는 그의 작품은 건물 벽과 바닥에 남겨진 총탄 같은 역사적 현장도 떠올린다. 총기 소지 및 사용이 자유롭지 않은 한국에서 총탄은 공권력과 관련된다. 국가가 자행한 폭력인 여순 사건으로 유명한 여수에서도 얼마 전 전시된 이 작품은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많은 살상을 야기한 비극적 근대사를 증언한다.

나에게 겨누어진 총은 가학피학적이지만, 분단이 야기한 모든 비극들 또한 함축한다. 작품 [호흡_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2020)는 30분 분량의 영상 설치작업으로, 영상을 담은 34인치 모니터는 물에 잠긴 채 전시장 바닥에 놓인다. 물속에서 숨을 참는 작가의 모습이 나오는 이미지는 실제의 물이라는 또 하나의 층을 포함 한다. 거울의 표면이 아니라 거울 안으로 들어가 있는 작품 속 인물은 죽어있는 듯 살아있다. 관객은 그 모습을 실제의 물에 비친 자기 모습과 함께 본다. 계속 변신하는 인간의 모습이 여러 층으로 비춰진다. 바닥의 카메라를 향해 유리 수조에 담근 얼굴은 살이 앞으로 쏠려서 물에 불은 시체같은 모습으로, 나르시스 신화에 얽힌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보네의 [거울의 역사]는 나르시시즘의 신화에서 양가성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나르시스의 신화가 알려주는 자아의 분리에서 생겨난 분신의 사명은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자신을 그대로 옮겨놓은 분신은 실재이면서도 불멸의 생을 지니고 있어서 육체가 소멸된 이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멸을 보장하는 분신은 동시에 인간을 단 한순간도 떠나지 않는 죽음의 유령으로, 끊임없이 종말을 확인하고 비춘다. 그리하여 분신의 현시에는 대부분 죽음의 약속과 삶의 힘이라는 두 가지 양가성이 찍혀있다고 해석된다. 최재훈의 작품에서도 죽음은 종말이 아니다. 종말로서의 죽음은 차라리 깔끔하고 낭만적이다. 스테인레스 스틸에 실탄 사격을 한 작품도, 표면을 관통한 것은 구멍만 날뿐, 충격의 흔적이 별로 남지 않는 것과 같다. 그의 작품에서 죽음을 연상시키는 고통스러운 과정은 한없이 유예된다. 마치 고문과도 같다. 아직 학생운동의 열기가 남아있던 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작가에게 물고문이나 최루탄 같은 숨 막히는 상황은 직접, 간접적으로 접했다.

남산의 고문기술자들에게 동지들의 정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고통 받고 죽어갔던 이들의 모습 또한 반향 된다. 물속에 들어가는 것은 유사(類似) 죽음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는 동서고금의 보편적인 종교적 의례를 떠올린다. 얼굴 위로 방울지면서 이합집산하는 물방울의 궤적은 (비춰진)얼굴을 향해 발사되는 총탄의 흔적이 있는 작품 [나의 역사적 상처]와 비춰볼 때, 총알과도 겹쳐진다. 이 ‘총알’은 물속에서의 고통스러운 호흡에 의해 얼굴의 구멍에서 발사된다. 그리고 공습 현장처럼 그의 얼굴로 다시 쏟아진다. 자기 몸을 반사하는 카메라는 시간을 수시로 역전시킴으로서 삶과 죽음의 드라마를 표현한다. 검은 배경에 혼자 고군분투하는 이미지는 10cm 정도 그 위를 덮은 실제의 물에 관객을 되비추면서 밀실에서 일어났던 폐소공포증적 상황을 바깥으로 꺼내 보인다. 물속에서 8시간 이상 촬영한 작가의 경험에 의하면, 고통스러운 모습만 있는 것도 아니다. 죽음 자체를 초월한 듯한 편안한 모습도 보인다.

 

 

나의 역사적 상처(my historic wound) 1800x800x100(mm)/ 스테인리스에 실탄사격 /2020

 

 

작품 [이명Tinnitus :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2020)은 물에다가 우유를 섞어서 불투명도를 높였다. 어릴 때 이명으로 고통 받았고, 이때 어머니가 주신 우유를 마시면 진정이 되곤 했던 자전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이명은 귀에서 다른 소리가 들리는 동안 바깥의 소리로부터 차단되는 한편, 자체의 소리로 고통 받는 현상이다. 작가는 이를 내부 장기의 소리, 또는 내면의 소리로 간주했다. 그는 ‘알 수 없는 내부에서 들려오는 소리 때문에 외부의 소리는 신경 쓸 수 조차 없었기에’, 그때마다 고통과 상처는 매우 컸다고 회고한다. 인간의 감각기관은 서로 연동되어 잘 안 들리면 잘 보이지도 않는다. 자기 귀가 잘 안 들리면 목소리가 커지기 마련이다. 최재훈의 경우에는 이명이 일어나는 동안 시야의 원근감이 왜곡되는 현상을 동반했다. 물에 탄 우유로 인해 뿌옇게 변한 환경은 그 내부에서의 몸의 움직임을 간헐적으로만 보이게 했다.

그 안에서 몸의 움직임은 연속적이지만, 짙은 안개에 쌓인 움직이는 대상처럼 단편으로만 보이게 된다. 현대 심리학에서 거울은 분리된 몸을 상상적으로 조합하는 기구인데, 이 분열적 신체들은 거울 이전의 단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분열적 조건은 거울이라는 간접적 비유가 아니라 보다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흐물거리는 머리카락, 추워서 새빨개진 손, 털 난 다리 등이 보이는 화면은 좁은 공간에서 몸을 접은 채 뒤척이는 작가의 몸을 반영한다. 분리되어 보이는 기관들을 예측할 수 없는 조합을 만든다. 그 내부에 한명이 들어가 있는지 몇 명이 들어가 있는지, 인간인지 괴물인지, 심지어는 살아있는 것인지 아닌지도 불확실한 상황에 맞딱뜨리게 한다. 작품 [호흡...]이 신체의 대표적인 기관인 머리를 마주하게 한다면, 작품 [이명...]에서 몸은 나머지 부분들로 풀어헤쳐진 듯한 형국이다. 구름처럼 꿈속처럼 뿌연 상황에서 움직이는 괴생물체는 춤을 주는 것일까, 죽어가는 것일까.

바닥에 설치한 작품이 물 떨어지는 소리를 따로 편집한 것이라면, 벽에 걸린 이 작품의 소리는 녹음할 때 주변소리를 확대한 것이다. 주로 물속에서 뒤척이는 소리와 환풍기 소리, 즉 지금 여기의 소리인데, 결과물은 심해에서 울리는 소리와 유사하다. 그는 친숙한 일상 속에 내재한 기괴함을 끌어낸다. 사실은 ‘이형접합자’로서의 자신 자체가 기괴한 실체다. [이명...]은 일상의 소리를 백색소음으로 무신경하게 지나치지 못하고 심해 같은 죽음에 가까운 낯선 환경을 떠올리며 몸살을 앓는 자의 상황을 말한다. 자신이 발생하여 진화한 물로 되돌아 간다함은 죽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죽음이 없이 생태계는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어류가 아니기에 익사의 분위기가 선명한 작품 [호흡_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부처님처럼 초월적 표정이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이 작품 또한 죽음으로서 사는 역설이 있다. 최재훈은 자신의 작품들 속에 내재한 삶과 죽음의 역설적 호환성을 말한다.

그의 작품은 몸이 단편으로만 나타난다는 점에서 ‘기관들 없는 신체’를 떠올린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앙티 외디푸스]에서 부분적 대상들과 기관들 없는 신체의 관계를 말한다. 그것들의 공통점은 기이한 신체라는 것이고, 죽음과 해방을 동시에 의미한다는 것이다. 몸의 단편들에서 죽음을 보는 것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해방은? 프로이트에 대항하여 억압보다는 해방에 근거한 정신분석을 창안하고자 했던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관들 없는 신체가 ‘비생산적인 것, 불모의 것, 태어나지 않은 것’이지만, 이러한 신체는 ‘소비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충만성을 가진다고 본다. 이러한 충만함은 욕망과 관련된다. [앙티 외디푸스]는 기관들 없는 신체 위의 욕망이 부분적 대상들과 흐름들을 작동시키고, 부분적 대상들과 흐름들의 어느 하나를 다른 것에 의하여 채취하고 절단하며 한 신체로부터 다른 한 신체로 옮아간다고 본다. 이때 연결들과 점유들은 소유자 혹은 점유자인 자아의 가짜 통일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파괴 속에서 이질성이 드러난다.

 

가타리는 [기계적 무의식]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동요시키는 것은 바로 이질적인 것, 혼성적인 것, 애매한 것, 비대칭적인 것들이라고 본다. 그에 의하면 중요한 것은 모든 가능한 침입, 모든 파국, 새로운 신진대사적 결정화 지점의 모든 출현이 지닌 다양성과 이질성을 보존하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같은 혁명적 정신분석학의 담론은 분열과 이질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통합이나 승화는 대개 지배이데올로기에 봉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형접합자’를 통해서 주체와 의식의 통일성보다 이질성을 강조하는 최재훈의 작품 또한 그러한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다. [앙티 외디푸스]에 의하면, 자아들과 이것들의 전제들을 꾸준히 파괴하는 것, 자아들이 가두어놓고 억제하고 있는 인물 이전의 단일체들을 해방시키는 것, 자기 동일의 조건들에 미치지 못하는 바로 그곳에서 분열들과 절단들을 더 멀리 세밀하게 확립하는 것, 한 사람 한 사람 재 절단하고 다른 사람들과 묶어 집단을 이루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앙티 외디푸스]에서 중시하는 정신분열자는 이접(離接) 속에 있다. 나를 지탱해주는 경계가 무너질 때 이접은 사방에서 몰려오는 것들을 포함한다. 다른 것과의 접합을 통해, 또는 카프카의 [변신]처럼 변신한다. 왜 이러한 변신이 필요한가? 들뢰즈는 카프카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인간은 분열과 변신을 통해서만 탈주할 수 있다고 본다. 개체를 압박하는 꽉 짜인 구조를 빠져나가기에 온전한 유기체는 덩어리가 너무 큰 것이다. 이 작품은 최루탄 연기 자욱했던 학창시절의 체험 또한 반향 한다. 최루탄으로 말하자면, 독재정권이 계속되면서 더욱 독해진 연기를 들이키면 산채로 죽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만화에서도 극렬하게 싸우는 장면을 먼지 구름 바깥으로 튀어나온 신체의 일부분들로 표현하는 관계가 있다. 최재훈이 대학에 입학했던 90년대 중반에도 80년대만큼이나 많은 학생들이 다치고 죽어나갔다. 그런데 IMF 이후 급속히 식은 학생운동의 열기는 90년대에 대한 작가의 기억을 환상처럼 느끼게 했다.

그 전에도 이후에도 사회 구조와 관련된 저항적 몸부림은 있었지만, 이후로 상황은 허연 막이 쳐진 듯 불투명해진 것이다. 고립된 개인의 극단적 상황 설정으로 자신을 극화하는 작품들에서 사회적 메시지가 동시에 나타난다. 작가는 개인사와 근대사가 겹쳐지는 부분을 공략한다. 예술은 개인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임을 알려준다. 그는 자신이 앓았던 질병으로부터 사회의 질병을 유추한다. 어린 시절부터 작가를 괴롭혀 왔던 이명은 따로 치료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나았지만, 갑자기 온 감각기관이 교란되는 기억은 선명하다. 그가 굳이 그런 상처까지 드러내는 이유는 ‘자기 상처를 묻어두면 타인의 상처에도 무감각해진다’는 생각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말한 정신적 상처(trauma)는 건강함과 생존의 지표인 항상성의 상태가 유지되지 못한 채 방어벽이 무너질 때 발생한다. 그런데 ‘이형접합자’처럼 ‘자기 내부에 자신이 의식하지도 규제하지도 못하는 이질성 있다’(라캉)는 점이 전제된다면, 상처는 부가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이며, 따라서 치유의 가능성도 불확실해진다.

 

 

인간은인간에게늑대다_현대적사냥꾼의 기념비(Homo homini lupus :Contemporary hunter's Monument) 1500x1500x2600(mm) / mixed media installation/ 2020

 

 

자기 안의 타자를 포함한 이질적 타자들과의 지속적인 대화의 과정만이 남을 뿐이다. 최재훈에게 상처는 나와 타자를 이해하는 키워드이며, 동병상련의 자세는 난해하기만 한 현대미술을 소통시키는 통로가 된다. 관객참여 작품은 상처를 화두로 한다. 전시장의 작은 방에서 종이에 수성 펜으로 자신의 아픈 기억이나 상처를 적고 구겨서 수족관 안에 던져 넣어 시간이 얼마 지난 후 건져내서 영상으로 촬영한다. 수성 펜이라서 약간 지워진 내용은 구겨진 종이가 만들어내는 굴곡 면 위로 희미하게 떠오른다. 상처는 치료될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그 흔적은 남는다. 마치 사라진 듯 깊숙이 가라 앉아있다가 휘저으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 상처다. 작품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현대적 사냥꾼의 기념비](2020)는 상처의 원인이라 할 만 한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그것도 서양의 오벨리스크나 동양의 샤머니즘 등, 이것저것이 조합된 ‘기관들 없는 신체’를 떠올리지만, 남근적으로 우뚝 서있는 모습이 사회의 지배적 질서인 상징계적 통일성을 갖춘다.

이 작품은 로마 시대 극작가의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Homo homini lupus)’라는 표현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 시대에도 지금처럼 생존경쟁으로 치열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보편적인’ 격언이다. 그러나 현대는 고대보다 훨씬 더 경쟁적이다. 세계화 시대에 서로에게 피해를 주기에 우리는 너무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전시장 바닥에 세워지는 이 작품은 오벨리스크 형태의 기둥에 실제 사슴뿔로 옷걸이를 만들었다. 검은 양복이 걸려있고 근처 바닥에는 총탄이 머리에 가득 박힌 검은 해골이 놓여있다. 승전 기념비같은 기둥도 웅장한 위용을 갖췄지만, 흑인 머리 스타일처럼 빼곡한 총탄은 죽음의 무게를 한없이 묵직하게 만든다. 해골은 사냥한 사람인가 사냥당한 사람인가. 머리칼처럼 보일만큼 많은 총탄은 머릿속으로는 실제보다 더 많이 사람을 사냥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상징한다. 사냥꾼도 자신이 사냥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사냥 당한다. 동물은 늙기 전에 사냥능력을 상실하고 사냥당해 죽는다. 영원한 포식자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수명은 동물과 달리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여기에 생명의 정치경제학이 끼어든다. 얼마 전 의료사고로 의심되는 상황에서 갑작스레 돌아가신 부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이 작품은 샤냥이 총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속에서 합법적으로 이루어짐을 알려준다. 사회적 약자들은 다양한 보험 및 복지 제도를 통해 이윤을 남기는 사업의 알리바이가 된다. 몸은 이제 자연이 아닌 자본이다. 근대적 권력은 광인들을 배에 태워 떠나보내거나 죄인을 공개 처형하지 하지 않고 감옥에 수감시켜 활용한다. 미셀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인간의 신체는 그 신체를 파헤치고 분해하며 재구성하는 권력 장치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말한다. 처벌, 즉 권력기술은 군주제 시대에는 신체에 낙인을 찍는 잔인한 의식을 통해 이루어졌고, 차츰 사회로 이전되어 신체의 훈련으로 변화한다. 감옥이라는 획일적 장치 속에서 수형자의 신체는 이제 사회적으로 변하여 집단적이며 유익한 소유의 대상이 된다.

감옥의 모델은 감옥에 한정되지 않고 학교, 병원, 병영 등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권력의 새로운 기술은 이제 가상현실까지 확장된다. 사람들은 스스로 국가 권력 및 기업의 이윤과 관련된 정보를 수신하는 단말기가 된다. 푸코의 결론은 개인이라는 것이 규율이나 훈련이라고 명명되는 권력의 특유한 기술에 의해 제조되는 현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개인은 ‘자아 생산의 기술’(푸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지, 결코 무역사적이고 자연적인 것은 아니다. 몸 그자체가 권력의 산물이 된다. 정상의 기준 또한 지배 이데올로기와 관련된다. 최재훈이 비유한 사냥꾼으로서의 인간은 사육자라는 의미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에서 미래의 인간공학은 명백한 형질 설계로까지 밀고 나갈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인간을 성공적인 사육자로 간주한다. 일찍이 사냥하던 동물들을 가축화시킨 이래 인간은 스스로를 가축화시켰다. 최재훈의 작품에는 사냥부터 고문에 이르는 잔인한 관례가 선명하며, 그것은 인간의 유예된 죽음을 통해 타자를 최대한 착취하는 음울한 역사를 각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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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01114-최재훈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