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권대영 展

 

무위자연(無爲自然)

 

무위자연-태백산맥2_260x162cm_Mixed media_2020

 

 

인사아트센터 2층 전시실

 

2020. 11. 11(수) ▶ 2020. 11. 16(월)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길 41-1 | T.02-736-1020

 

www.insaartcenter.com

 

 

무위자연-RED1_162x162cm_Mixed media_2020

 

 

무위와 무구의 자연을 노래하다

 

필자의 기억 속에 있는 화가 권대영은 흑백사진 혹은 그 같은 분위기의 그림들과 오버랩되어 있었다. 작가의 그림이 흡사 은유성 짙은 흑백사진처럼 절제된 단색조의 고즈넉한 풍경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지는 자연 대상을 고요하게 관조하고 노래하면서 물아일체의 경지 속에 유유자적하는 구도자의 면모가 느껴지곤 했다. 여러 해가 지나고서 오랜만에 마주한 작가의 작품세계는 기억 속의 이미지와는 화풍면에서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재현적 이미지는 절제되거나 단순화된 것과 반비례하여 구도, 색상, 필치 등에서 거침이 없는 파격적이고 인상적인 변화를 보이게 된 것이다. 마치 완만하고 고요하게 흐르던 강이 갑자기 급류가 되고 폭포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스포츠계 시쳇말인 ‘포텐(셜)이 터졌다’는 표현이 작가에게도 어울리는 것 같다. 추상적 표현의 잠재력과 내공을 오랫동안 감추었다가 이제야 한꺼번에 터뜨리는 것처럼 보여서다. 현재의 작업 완성도나 밀도를 감안할 때 어느 날 갑자기 새롭게 시도를 한 것은 아닌 것 같고, 오랫동안 감각을 연마하고 방법과 매체들을 조율해 온 것이 느껴진다. 세기말 진화와 진보가 봉착한 딜레마와 난관, 가중되는 불확실성과 불안감은 성찰과 자기갱신에 박차를 가하곤 한다. 그동안 작가의 성찰이 외부 대상들을 향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자기 내면이라 할 수 있다.   

 

 

무위자연-BLUE1_162x162cm_Mixed media_2020

 

 

작가의 근작들을 보면 이미지나 형태들이 명료하지 않은, 표현성이 결합된 추상적 양식들이 주를 이룬다. 형태가 선명하지 않은 가운데서도 맥락상 읽히는 바로는 꽃송이가 크게 확대된 채로 많이 등장한다. 바로 그 꽃 이미지에는 산이나 섬 같은 실루엣 이미지들이 오버랩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산 이미지의 경우 백두대간의 준령들처럼 웅장하고 위엄이 넘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강렬한 원색의 꽃 안에 온갖 광대무변의 삼라만상이 다 들어 있는 느낌이다.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 마침내 남은 한 잎이 /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 나도 아려 눈을 감네. 과거 중등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이호우 시인의 「개화」라는 시조이다. 한 송이 꽃의 개화가 가지는 알레고리는 천지의 개벽까지도 내포하고 있다.

한 송이 꽃과 우주를 관념적, 상징적으로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양자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시조 특유의 운율에서 응축의 절제와 정제가 강하게 느껴지는 데 반해, 작가의 화폭은 열정적이고, 극적이며 역동적이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자연은 스스로 존재하며 지속해가는 완전체이며, 따라서 미적인 아름다움도 인위적인 것들이 최대한 배제된 ‘무위’로써 구현될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즉 ‘숭고적 거리’를 전제하고 있음이다.

이는 동양적 세계관이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 특히 우리의 전통적 미의식 속에 내재된 것이기도 하다. 일례로 동학의 주요한 가르침 가운데 ‘物物天 事事天, 즉 수많은 세상사와 만나는 인연과 사물과 일들이 모두가 다 하늘이 아닌 것이 없다’는 데서 잘 나타난다, 특히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명제는 우리 세계관의 중요한 핵심을 이룬다. ‘꽃 속의 하늘’과 ‘꽃 속의 자연’은 충분히 호환 가능한 코드일 수 있다.

 

 

무위자연-VIOLET1_162x162cm_Mixed media_2020

 

 

다시 작가의 화면으로 돌아가 보자. 꽃과 오버랩되고 있는 이미지들은 이상향인 무릉도원으로 초대하고 있는 듯, 어딘지 모르게 화면은 몽환적이면서도 기기묘묘한 현상들로 가득하다. 초월적이고 드라마틱한 구성은 덤이다. 감미로운 파스텔톤의 그러데이션이 감각적으로 곁들여진 구성은 비의적이고 은유적 텍스트에 감성적 활력을 더한다. 또한 화면의 부분들에서 국소적으로 밝히고 있는 빛이 마치 묵시록 같은 신비적 환영을 고조시키고 있다. 작가에게 빛은 천지개벽으로부터 시작되어 영겁의 세월을 달려온 까마득한 태초의 것으로, 광년의 땅에 도달하여 누리를 밝히는 상서로운 기운의 광채를 발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화면에서 음양의 조화를 중시하고 있으며, 또한 세계를 음양의 조화로 해석하고 있는 바를 화면에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화면 곳곳에서 명과 암이 뚜렷이 공존하고 있는 이유이다.

화면들마다 편재하다시피 한 산 이미지나 섬 이미지, 물론 추상화되고 정형화된 기호적 이미지도 음미할 만한 대상들이다. 어떤 지역이나 장소를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작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백두대간의 수려하고 웅장한 산하와 연관성이 있을 수 있다. 관념적인 산수와도 같은 것일 수 있지만, 호연지기와 힘찬 기상을 역설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의 이미지들은 범자연에 대한 상징적 아이콘일 수도 있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때묻지 않은 무위의 자연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존중하고 보호해주는 상호성의 대상이자 우리의 영혼에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의 범자연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작가 화면에서의 색채도 음양오행, 특히 음양의 관념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보색대비와 스펙트럼 효과를 통해 강렬한 인상과 역동적 에너지를 생성시키고 있다. 보색 자체가 음양의 개념과 근접해 있다. 보색 관계의 색조들은 대체로 태극에서 보는 음양으로부터 파생되었거나 전이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이 주조색으로 사역될 경우 화려함은 말할 것도 없고 강렬함과 생동감을 준다. 대립성과 조화성이 동시에 함께 나타난다.

작가 화면의 색조는 오행에 기반한 오방색에 유사할 수 있지만, 대자연 현상으로 나타나는 무지개에 더 가까워 보인다. 전통 의상에 있는 색동의 경우도 오방색환으로 설명하기보다는, 화려함과 상서로움의 상징인 무지개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몽고인들이 우리나라를 부를 때 무지개라는 뜻을 가진 ‘솔롱고스’라 부르는 것도 색동옷의 인상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무위자연-RED2_60x60cm_Mixed media_2020

 

 

작가의 근작 주제가 ‘무위자연’이다. 그것은 노자가 아니었더라도,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보편적 미의식의 핵심적 개념이다. 우리의 전통 가옥이나 조경 등에서 가공이나 장식을 최소화한 성향들이 딱히 노자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도 아니다. 또한 현대 미술에서도 관조 개념을 중시한다거나, 표현 재료 혹은 매재(媒材)의 물성에 의의를 두고 있는 것도 이와 연관된다. “형상을 소거하고 내적 구조로서의 추상을 형상화하는 작업”(작가노트)임을 작가가 강조한 것도 형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도 연관된다. 물론 작가에게 ‘무위자연’을 노래하는 것과 표현의 절제는 일치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을 경지에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화면에서 주제로 설정한 ‘무위자연’의 개념을 표방하거나 적시한 현상을 구체적으로 도출하는 것은 쉽지 않다. 「도덕경」에서의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미 도가 아닌 것처럼, ‘무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무위’ 여부보다는 작업이 이 시대 무엇일 수 있느냐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작가의 작업이 가지는 의의는 우리 시대상황과 관련시켜 볼 필요가 있다. 전대미문의 코로나블루 상황에 무엇이 될 수 있을까. 호연지기가 필요한 이 시대 아닌가.

 

이  재  언 (미술평론가)

 

 

무위자연-VIOLET2_60x60cm_Mixed media_2020

 

 

작업노트

 

최근 나의 작업의 모티브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무위자연은 노자의 철학이다.

무위는 유위(有爲), 인위(人爲)의 반대이며 인간의 지적 오류에 의해 제정되고 실천되는 제도나 행위를 부정하는 개념이다.

자연은 물리세계의 자연이나 서양철학의 자연주의가 아니라 자유자재(自由自在)하고, 스스로 그러하고[自己如此(자기여차)],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정신의 독립이며, 사물의 실상과 합일로써 얻어지는 정신적 원만성이다. 즉 무리해서 무엇을 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한 대로 사는 삶이 곧 무위자연이다.

이러한 삶의 모습에서 형상을 소거하고 내적 구조로서의 추상을 형상화하는 작업이다.

자연(nature)의 이미지를 재현하거나 형상화 하는 것이 무위자연(無爲自然)인 것은 아니다. 자연(nature)이거나 아니면 다른 무순 이미지거나 형상이든지 그 속에 있는 진리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자연스럽다’는 것에서 자연은 유형의 ‘nature'가 아닌 무형의 ’自然‘이 더 가까운 뜻일 것 같다.

무위당 장일순선생님의 글 하나가 생각난다.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나’ 즉 인생에서 찾고자 했던 목표나 이르고자 했던 선(禪)을 가장 잘 가르쳐 줄 수 있는 스승은 다름 아닌 ‘그대’ 즉 항상 곁에 있는 지인들이었고 그중에 특히 가족이었음을 비로서 알게 된다. 모두 함께 살아가는 삶 속에서 도(道)의 길이 있음으로 해서 오늘을 살아간다.

 

 

무위자연201801_162x130cm_Mixed media_2018

 

 

무위자연-치악산1_117x91cm_Mixed media_2019

 

 

 

 

 
 

권대영

 

개인전 | 8회

 

그룹전 | 아트인 강원, 서울아트쇼 외 250여회

 

수상 | 강원미술상, 원주예술상 등

 

대한민국미술대전 및 강원, 경북, 대구, 신라, 전남미술대전 등 심사위원 역임 | 강원도미술협회장, 원주예총회장 역임 | 강원도미협,원주미협 자문위원 | 횡성미협 고문 | 강원미술대전 초대작가 | 아트인 강원 회원

 

작품소장 | 국민건강보험청사 | 강원도청 | 원주시청 | 춘천지방법원원주지원 | 알펜시아리조트 | 강릉현대호텔 | 롯데속초리조트 | 레이크오션리조트 | 성지병원 | 법무법인 위 등

 

E-mail  | kdy6226@hanmail.net

 

 
 

* 전시메일에 등록된 모든 이미지와 글은 작가와 필자에게 저작권이 있습니다. *

vol.20201111-제8회 권대영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