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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열 展
터치 Touch
〈Pou Sto〉, 2020. 나일론에 에폭시 페인트, 110x150x140(h)mm
원앤제이 갤러리
2020. 9. 22(화) ▶ 2020. 10. 25(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촌로 31-14 | T.02-745-1644
www.oneandj.com
Touch 터치
가족들과 뉴질랜드에 머무르고 있는 작가는, 적어도 일이 년에 한 번 정도는 한국에 들어왔다. 보통 전시 때문이었다. 지난 2018년 개인전과 아트페어 때도 작가는 서울과 홍콩에 와서 작품을 직접 설치했다. 두 볼이 가득 잡힐 듯 한껏 미소를 짓다가도 금세 미간을 찌푸리고 오른쪽 위로 시선을 보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이나, ‘음...’ 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저음의 목소리는 그와 함께 만드는 전시에서 늘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오랜 시간을 전시장에 머무르며 전시를 준비하는 그에게 설치 기간은 매우 중요했고, 우리는 그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설치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의 전시에서 그와 함께 전시 구성을 풀어나가고, 저녁에 맥주 한잔을 기울이는 일이 삭제될 수 있다고 상상해 본 적은 없었다.
코로나(COVID-19). 전 세계인에게 동시에 들이닥친 이 재난은 2020년, 서울에서의 개인전을 준비하는 작가의 발을 뉴질랜드에 묶어두었다. 이전 전시를 준비할 때도 작가가 입국하기 전까지는 전시나 작품에 관한 대화를 통화나 서면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전시를 한달 정도 앞둔 시점까지는 별다를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이전처럼 통화로 전시와 작품에 필요한 실용적인 이야기들을 주로 나누고, 작품에 대한 모호한 이야기를 가끔 나눴다. 그의 작품을 말이나 글로는 표현하기 어렵다고 (또는 무의미하다고, 아니면 영 엉뚱한 곳을 가리키는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작품의 주제를 파고드는 대화보다는 피상적인 대화를 택했다. 우리의 대화는 어차피 그것을 정통으로 뚫어내지는 못할 것이므로 오히려 그 주변을 더듬음으로써 우연히 찰나의 스트라이크를 경험할 수 있으리라.
작품에 관한 더 깊은 대화가 필요할 때는 채팅으로 텍스트나 이미지를 주고 받았다. 왜 그것이 통화하는 것보다 더 나은지에 대해 서로 이야기해본 적은 없지만, 맞닿은 것 같다가도 순식간에 흩어져버리는 소리를 한데 모아 붙잡아 두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남겨진 글은 어떤 식으로든 주변에 남아 뒤돌아 탐색할, 그리하여 어쩌면 그 찰나를 조금이나마 연장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미지. 때로 제멋대로 확장되어 예상치 못한 곳에 안착하기도 하는 이미지는, 그의 골똘한 눈이 멈춘 곳일지도 모를 어떤 곳을 가리킬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는 그가 보내온 이미지의 여러 가능성들 안에서 찬찬히 그의 흔적을 좇았다.
그의 말들은 짧지만 길었고, 명확하지만 모호했다. 이미지들 역시 보는 순간 바로 쾌감이 전달되는 명확한 것들이었지만, 웃음을 거두어내고 현실로 밀착시킬수록 알듯 말듯 모호한 것들로 둔갑했다. 그의 작품은 지나치게 뚫어져라 바라봐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때 오히려 시선은 길을 잃고,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다. 그의 작품은 텅 빈 시선, 무료한 감각이 어느 순간 포착하게 되는 짧고 강렬하게 파열하는 섬광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것이 우리 모두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니 그것은 단순히 환영이나 착각으로 치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칸트가 말했던 사심 없이 바라볼 때 인지되는 ‘쾌’와 어쩌면 유사한 것이리라.
시간이 지나 그 없이 그의 개인전을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욱 가까워지자, 나는 이전의 어느 전시보다도 이 전시에 골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없이 그의 생각을 구현해내기 위해 그가 보내온 작품 스케치를 반복해서 보고 그와 더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현재 뉴질랜드에 있는 그보다, 서울에 함께 있던 2018년의 그와 더 많이 접촉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표정과 말투, 눈빛과 웃음소리를 떠올리고 그것들을 그의 새 작품들과 잇는다. 액정 너머의 그와 접촉하는 일이 2018년의 그를 기억해내는 것보다 더 아득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클랜드의 오후 6시나 서울의 오후 2시가 아닌, 아무 때의 아무 곳에서 서로의 허상을 바라보며 흩날리는 말들을 주워 담느라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2020년, 오클랜드에 있는 그와 2018년, 서울에 있던 그 중, 누가 더 나와 가까이에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맞을까? 우리의 감각기관이 청각, 시각, 촉각 등의 기능을 각각 나누어 가진 것이 아니라, 사실 모든 기능을 두루두루 가지고 있는게 아닐까? 나는 액정 너머의 그와 지난 시간 속의 그를 번갈아 가며 바라본다. 한번은 눈으로, 또 한번은 털끝으로. 부피를 가진 분자와 시간을 가진 분자가 각각 있다면, 그중 무엇과의 접촉이 나를 더 깊게 포획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 아닌가.
작은 액정을 매개로 마주 본 그의 이미지,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사실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고 해도, 난 그것을 의심할 수도, 또는 그리하여 그것이 정작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에게 말을 건네온 이가 지금 남태평양 건너에 있는 그인지, 아니면 2년의 시간을 거스른 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이 전시는 작가 ‘오승열’의 전시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그것이 다른 누구의 전시인지, 의심하여 밝혀낼 방법도 없다. 오클랜드에 묶인 작가가 손에 잡히지 않는 자신의 개인전을 위해 무엇을 상상하고 그려내었을지, 그리고 그것이 내가 이곳에서 구현해나가는 것들과 얼마나 닮아있을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서로를 향해 던지고 받으며, 무엇인가가 우리를, 이 긴 시간과 먼 거리를, 오클랜드와 서울을, 2018년과 2020년을 연결하고 있다고 상상/감각한다. 그 상상/감각이 아주 강렬하고 생생하게 찰나를 빚어낼 때, 전시가 이미 완료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모든 시간과 공간, 거리가 뒤범벅된다. 그것은 앞에 놓인 것일까, 이미 지나간 것일까.
직접 만날 수 없다는 현실-현상이 작가와 나의 간격을 더욱 밀착시킨다. 함께 있었을 때 흘려보냈던 그의 이미지(어쩌면 실재)를 기억 속에서 불러내고, 그가 보낸 짤막한 농담 같은 글들을 정수리 위로 둥둥 띄운다. 그의 모습과 목소리, 말들이 아주 미세하고 습윤한, 보이지 않으나 보이는 형태로 나와 함께 전시를 준비한다. 화상통화를 하며 그가 즉석에서 그려내었던 스케치, 시간을 들여 다시 다듬어 낸 도면, 정확한 사이즈와 구성으로 완성된 설계사의 설계도를 시시각각 전달받으며, 머릿속으로 전시를 완성해나간다. 이미 나는 전시장에 있고, 설치된 작품들 사이를 걸어 다니며, 이렇게나 크게 확대된 분자구조들 안에 있을 보이지 않는 분자구조들을 다시 가늠한다. 그리고 전시장 어디쯤 작가를 세워본다. 여기쯤, 아니 저기쯤, 두 팔을 활짝 벌린 그가 서 있다. 본다는 것은 거리를, 분리의 결정을, 접촉 가운데 존재하지 않고 접촉 속에서 혼동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을 전제로 한다. 본다는 것은 이러한 분리가 그럼에도 만남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보는 것이 강렬한 접촉으로 당신을 만지는 것과도 같을 때, 보는 방식이 일종의 만짐이 될 때, 본다는 것이 거리를 둔 접촉일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본 것이, 마치 시선이 사로잡혀 만져지고 나타난 모습과 접촉하는 것처럼, 그렇게 시선에 주어지는 것은 언제일까? 그것은 능동적 접촉, 실제로 만지는 주도 행위가 아니라, 시선이 부동의 움직임과 깊이 없는 배경으로 이끌려 들어가 흡수되는 것을 말한다. 거리를 둔 접촉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이미지이고, 그리고 매혹은 이미지의 정념이다.
-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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