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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나 展
긴 머리와 그보다 더 긴 혀를 가진 동물의 실종
OCI미술관
2020. 7. 23(목) ▶ 2020. 8. 15(토)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45-14 | T.02-734-0440~1
https://ocimuseum.org
A동의 밤_비단에 채색_75x170cm_2020
말 없는 존재들의 실종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논고』 마지막 문장이다. 모든 철학의 문제는 언어의 문제이고, 언어는 마치 그림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없는 가치 명제들에 관해 우리는 마치 검증 가능한 사실인 양 주장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로 환원할 수 없는 가치 명제들에 대하여 침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의미 없는 명제로 무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이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는 우리가 이 말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하여 그저 느끼고 볼 수 있을 뿐, 발화할 수 없는 언어적 침묵을 가져온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 정해나는 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언어를 통해 표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침묵할 수도 없기에 자신의 화폭을 통해 ‘말한다’. 작가의 작업은 가치 명제의 대상들, 즉 가치 평가를 당하는 대상들이라는 나약한 존재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작가의 과거 작업은 가치 중립적인 듯 보이는 언어가 사실은 얼마나 폭력적이고 편파적인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작가의 말처럼 언어는 사고를 반영한다. 그렇기에 우리의 말에는 우리 생각의 가치들이 녹아 들어가 있고, 그 말은 다시금 우리에게 가치의 척도로 작동한다. 여성을 의미하는 러시아 속담에서 제목을 따온 《긴 머리와 그보다 더 긴 혀를 가진 동물의 실종》 작업은 여성을 표현하는 다양한 문화 속 언어들을 통해 여성의 이미지가 어떻게 재생산되고, 그 언어들이 어떻게 다시금 여성을 제약하는 도구로 작동하는지 보여준다. 언어를 통한 이미지의 생산은 다양한 작가들이 드러내고자 노력했던 부분이다. 다만 정해나의 작업은 언어와 이미지 생성의 관계보다는 약자로서 말하지 못하는 존재들에 그 관심이 더 기울어져 있다. 2018년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사람들’에 관한 작업 〈Hider〉, 〈고통을 증명하는 법〉 역시 같은 맥락 위에 서 있다. 기존에 존재하는 언어들은 그들을 위해 작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의 언어를 갖지 못한 채 기존 언어들의 가치판단 위에 서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입이 있어도 스스로의 입장을 항변할 수도, 해명할 수도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 고통의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는 것이다. 그 견딤이 힘에 부쳐 작가는 끊임없이 의미 없는 말을 한다. 하지만 그 말은 허공을 맴돌 뿐 어떠한 내용도 전달하지 못한다.
작가의 지난 작업은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고자 하기에, 끊임없이 언어를 발화하는 방식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거나, 혹은 음성 언어로 발화하지 못하는 것들을 시각 언어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언어 체계는 태생적으로 성기기에 그 내밀함을 다 담을 수 없다. 따라서 정해나의 과거 작업들은 불가피하게 파편적이고 분산되어 있었다. 또한, 비언어적 표현 방식을 통한 언어의 전달이라는 필연적 한계는 관람자들에게 그 내용을 온전히 전달하는 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결국 관람자들이 작품을 이해하거나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어려움을 남겼다. 그 어려움이 아쉬움으로 남았던 필자에게 이번에 선보이는 작가의 작업은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한 반가움으로 다가왔다. 이제 작가는 말하지만 발화(發話)하지 않는다. 언어로 발화하지 않지만, 시각 언어와 이야기, 이 두 가지를 도구로 하여 내용을 전달한다.
연회장의 밤 2. 초봄 석양의 테라스_옻지에 채색_91x60.5cm_2020
작가의 작업실 옆 스산한 공간에 자리한 토끼장과 그 속에 살고 있는 토끼들의 ‘실종’ 사건, 그리고 그 사건을 쫓는 형사의 이야기는 단순히 흥미와 궁금증을 유발하는 하나의 이야기를 넘어 비언어적 도구들을 통해 실제와 허구가 겹쳐지는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실제 장소와 사건, 인물들을 기반으로 허구의 인물들과 사건, 대상들을 뒤섞어 놓음으로써 작가는 실제인지 허구인지 구분할 수 없는 모호한 실종 사건을 구성하였다. 사건은 실제도 허구도 아니지만, ‘사실’이다. 다시 말해, 무언가 사라진다는 것, 그 대상이 무엇이든 어떠한 방식이든 상관없이 무언가 우리 주위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그 ‘사실’만을 명확히 전달한다. 작품에서 나타나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시제의 뭉쳐짐, 얼굴을 가림으로써 인물을 분간할 수 없는 익명성, 익숙하지만 낯선 장소의 기괴함은 마치 프로이트가 설명했던 꿈과 같다. 꿈에서 나타나는 인물은 낯익지만, 그 낯익은 요소들이 서로를 분간할 수 없이 뭉쳐져 등장함으로써 오히려 ‘그 인물이 낯익기에 내가 안다’라는 사실 외에는 그가 정작 누구인지, 나와 어떤 관계인지, 왜 여기에 나타났는지 등 그 어떠한 것도 식별할 수 없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
마찬가지로 ‘사건 발생의 장소가 있다’, ‘실종된 자를 찾는 사람이 있다’라는 사실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은 정해나의 작업 속에서 기묘하게 엉켜있다. 비가 오는 날 작업실의 호젓한 분위기와 그 작업실 안에서 생경하게 흘러나오던 ‘쑥대머리’ 옥중가가 그러하고, 사건에 대한 형사의 이해할 수 없는 집착과 수사 방식이 그러하다. 무엇보다도 범인을 구체적으로 현현하기 위한 목적에서 그려진 〈몽타주〉 작품이 보여주는 식별할 수 없는 범인의 모습이 그러하다. 그 범인이 멧돼지인지, 고양이인지, 아니면 제3의 어떠한 존재인지, 그 몽타주는 실질적으로 범인에 관한 어떠한 정보도 제공하고 있지 않다. 그저 범인이 ‘있다’라는 사실만을 말한다. 정해나의 작업은 이렇게 우리에게 실종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외에 다른 모든 것이 허구일 수 있다는 의심을 지속하게 한다.
이제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명확한 단 하나의 사실은, 토끼의 실종, 아니 어떠한 털 있는 것들이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이 실종 사건은 단순히 하나의 이야기를 넘어 우리의 삶에서 무관심 속에 사라지는 것들을 상기시킨다. 이야기에서 사라지는 것은 나약한 토끼, 3번 방의 작가 등등으로 특정되지만, 사실 이는 우리 주변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모든 물리적, 심리적 실종을 의미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호기롭게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지만, 십 년 후 절반 이상의 여성들이 자신의 일터에서 사라진다. 어머니로 아내로 그들은 삶 속에서 자신의 이름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심리적 실종뿐 아니라 실제로 생존 여부조차 파악이 안 되는 여성, 청소년, 아동들의 수가 매년 수만에 달한다고 한다. 작년 한 해에만 경찰에 신고된 실종 아동 중 장기 실종 아동이 약 700명에 이른다. 작품 속 대상들의 얼굴을 가리는 익명성은 바로 이러한 사라진 불특정 다수를 떠오르게 한다. 그들은 얼굴이 없고, 이름이 없다.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더 정확히는 그들이 누구인지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연회장의 밤〉에 등장하는 얼굴 없는 여성들의 옷과 장신구를 통해 그들의 지위나 신분만을 추측하듯이, 우리는 사라지는 대상들이 진정 누구인지 관심 두지 않는다. 이러한 무관심과 무신경이 우리를 이러한 실종 사건에 둔감하게 만든다. 실종된 자들은 사회적 약자로서 스스로의 언어를 갖고 있지 않기에 스스로 발화할 수 없다. 그렇게 그들은 말없이 사라진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을 이렇게 만든 무신경, 무관심이 오히려 이번 작업의 이야기에서는 이 실종 사건을 손쉽게 해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궁금해하지 않은 만큼, 누가 그랬는지도 관심이 없다. 그렇기에 그 범인은 다수이고 은밀하고, 누구나가 될 수 있다. 어쩌면 토끼가 사라지는데 무관심했던 우리도 그 범인일 수 있다. 그리고 토끼의 실종 사건이 잊혀지듯이, 3번 방 작가가 사라진 것도 잊혀질 것이고, 그렇기에 사라짐은 그 잊혀짐 속에서 계속된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금 침묵한다.
김전희(미학/미술비평)
연회장의 밤 5. 실비 내리는 댄스홀_옻지에 채색_91x60.5cm_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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