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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란 展
갤러리 H
2020. 6. 24(수) ▶ 2020. 6. 30(화)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192-46번지 | T.02-735-3367
https://blog.naver.com/gallh
모호한 경계
그림을 그리는 것이 좋았다. 시간이 나면 무얼 할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예전엔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나면 그림을 즐겨 그렸고, 지금은 해야 할 일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며 늘 생각하는 것, 나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내 안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본다.
어느 날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줍다가 문득 엄마가 생각났다.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머리카락을 더럽다며 몹시도 싫어하셨던 엄마, 하지만 나이가 들며 빠지기 시작한 머리카락을 아까워하시던 엄마. 엄마에게 머리카락은 어떤 의미일까? 머리카락이 가진 이율배반적인 이미지가 흥미로웠다. 머리카락을 하나씩 주워 모으기 시작했고, 캔버스 위로 옮겨와 작업을 했다. 그 이후부터 주변에 버려지고 효용가치를 다한 것들을 하나씩 모으고 있다. 버려진 나무조각을 모으고, 쓰고 난 플라스틱컵이나 빨대를 모으고 그것들이 가진 원래의 용도와 가치의 한계를 넘어 또다른 의미들을 찾고 있다. 낡고, 더럽고, 버려지고, 가치 없는 것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재해석하면서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 예술과 쓰레기의 경계, 유용과 무용의 경계에 대해 생각하고 고정관념의 탈피를 통해 새로운 의미로의 재탄생을 시도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나무조각을 이용한 작업이 주를 이루었다. 가치를 다해 버려진 자투리조각들을 모아서 자르고, 깎고, 다듬어 물감 대신 나무조각을 재료로 그림을 그렸다. 나무는 우리에게 여름날 시원한 그늘과 가을날 풍성한 과실들을 주고, 추운 겨울을 이겨낼 땔감이 되었으며, 목재가 되어 집이나 가구의 재료로 쓰였다. 그야말로 살아서도 죽어서도 온전히 베푸는 존재이다. , 이런 나무를 이용해 개인화와 이기주의가 만연한 현대사회의 인간관계를 표현했다. 작품 속 나무조각들은 크기, 형태, 색이 가지각색으로 다양한 개성의 인간 개개인을 상징하며, 나무조각들이 만나면서 생기는 틈은 인간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의미한다. 그것들을 하나씩 다듬고 메우고 좁혀가는 작업을 하면서 당신과 나, 우리들의 사이가 좀더 가까워지고 이 세상이 보다 더 살만 한 곳이 되기를 바란다.
2020년 6월 어느날 이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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