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세환 展

 

온실 속의 노마디즘 My Toes Are Free

 

 

 

복합문화공간에무 B2갤러리

 

2020. 6. 11(목) ▶ 2020. 7. 31(금)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희궁1가길 7 | T.02-730-5514

 

www.emuartspace.com

 

 

My Toes Are Free 001, 200x400cm, Digital Archival Print, 2020

 

 

My Toes Are Free.
소통의 부재는 소통하고자 할 수 있는 창구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이해의 범주를 이기적인 관점에서 미리 정해 놓고, 소통을 시작하려는 마음에서 온다. 자신이 겪어온 상황이 만들어낸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범주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혹하게 걷어버리는 태도가 소통의 부재라는 결과로 이어진다.
‘My hands are tied.’라는 영어권의 관용적 표현을 접할 때 얄밉고 야속한 마음이 드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상대방을 도와주지 않으려는 의지를 자신에게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표현하기도 하고, 사실은 도와주지 않을 수 있는 자신의 권력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오래된 가치관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마치 당연한 가치관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그것이 개인의 이익과 권한에 침범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도 상당히 강한 것처럼 보인다. 남을 돕기는 돕지만, 희생의 범주는 한정적인 것.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하기도 하고, 또 다른 관점에서는 너무 야박해 보이기도 하는 희생의 가치관은 조금 유연해져야 하지 않은가에 대한 고민에 빠진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 권력의 상하관계는 결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계속적으로 바뀐다. 신입 사원에게 속칭 꼰대 짓을 하는 직장 상사가 이런저런 사연 끝에 회사의 중역이 된 과거의 신입사원의 인턴으로 들어가는 한 방송사의 드라마는 많은 비약이 있긴 하지만 상하관계가 뒤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한 예다. 오늘은 내가 남을 도와주는 입장일 수 있지만 내일은 내가 도움이 필요로 하게 될 수 있다는 상황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이행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런 상황을 제시하면서도 또다시 나에게 불리한 상황이 될 수도 있으니 잘하자는 식의 논리를 펴나가는 것도 불편함이 있다.
‘My hands are tied.’ 당신의 상황은 안됐지만 나의 권한 밖의 일이라는 일종의 포기를 요구하는 이 표현을 두고, 멍해진 머리가 엉뚱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양 팔에 신체적 장애를 가진 이가 저 자리에 있다면, 그들은 ‘나의 발이 묶였어요.’라고 대답을 할까? 혹은 그들이 도와주고자 하는 의지를 갖는 다면, ‘나의 발이 자유롭다.’고 말해 주기는 할까? 이런 엉뚱한 상상 속에서 발이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이 시작이고, 어떤 누군가가 나를 도와줄 의지가 있다면 나에게 “나의 두 손은 묶였지만, 두 발에 발가락은 자유로우니 그것들로 당신을 기꺼이 도와주겠다.”라고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My Toes Are Free 002, 200x400cm, Digital Archival Print, 2020

 

 

My Toes Are Free 003, 200x400cm, Digital Archival Print,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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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00611-노세환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