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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준 展
매화인상-1_187x140cm_화선지에 수묵_2020
갤러리 H
2020. 6. 10(수) ▶ 2020. 6. 23(화)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9길 10 | T.02-735-3367
福-1_157x128cm_화선지에 수묵_2020
‘타고난 향기(天香)’를 듣다
나의 작업방향은 한국의 선비정신과 현대회화의 조형성을 접목시켜 한국 현대문인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여기서 선비정신은 작업과정에서 수묵정신과 문인정신으로 표현되어 조형으로 나타난다. 오늘은 내가 작업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수묵정신과 문인정신을 ‘향기(香)’라는 단어로 비유해서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동양회화가 추구하는 ‘향기’란 형식을 초월한 운치(韻致)를 말한다. 동양의 예술가에게 감각할 수 있는 사물의 형태는 작업의 시작일 뿐이며 무궁한 예술 세계로 인도하는 ‘형식[文]’일 뿐, 그 지향점은 ‘내용[質]’과 어우러진 운치 있는 향기라 하겠다. 이 때문에 동양예술을 감상할 때는 그 안에 은은한 향기가 떠도는 것과 같은 오묘한 운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동양의 고대 예술론에서는 이러한 사상을 ‘형상 너머의 형상(象外之象)’, ‘맛 너머의 맛(味外之味)’, ‘뜻 너머의 운치(意外之韻)’라고 표현하였다. 특히 문인화의 ‘향기’는 꽃의 향기가 아니라 작가 마음의 향기라 할 수 있다. 향기는 그릴 수 없는 것이지만 작가는 자신의 향기를 작품에 표현할 수 있어야만 운치를 얻을 수 있고, 그 작품 역시 감상자에게 향기와 여운(餘韻)을 줄 수 있다. 따라서 나의 작품에 드러나는 향기는 나의 영혼의 울림이라 하겠다. 동양예술은 인간 생명의 향기를 전달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예컨대, 시인 김경집의 시 <지금은 길을 잃었을지라도> 중에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 그 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라는 구절의 내용과 유사하다. 이러한 하늘 냄새는 생명의 향기이고, 이 생명에 내재된 향기는 인간 생명 속에 본래부터 있는 ‘타고난 향기(天香)’이다. 흔히 동양 예술가들은 ‘향기를 듣는다(聽香)’라고 표현한다. 이때의 ‘듣는다’는 것은 밖으로 표출되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 속의 향기로운 세계에 대한 탐색을 말한다. 따라서 내가 작품에서 추구하는 향기의 경계(境界)는 내가 좋아하는 대상의 향기가 아니라 나의 타고난 향기가 작품을 통해 사방으로 흘러넘치는 그런 경계이다.
댓잎소리-1_139x202cm_화선지에 수묵_2020
그렇다면 나의 타고난 향기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우선, ‘한(恨)’을 들 수 있다. ‘한’은 모든 한국인의 정서 중 가장 밑바닥에 자리한다. 나에게 있어서 ‘한’은 내 인생의 슬픈 추억들과 타고난 나의 정서가 한 데 엉기어 만들어낸 눈물과 아쉬움, 그리고 그리움과 원망이 켜켜이 쌓여있는 보따리이다. 또한 그것은 이러한 슬픈 추억들을 그 누군가에 하소연하지 않고 그저 나 홀로 간직한 아픔이다. 이 ‘간직’은 참거나 삭이는 정도가 아니라 그 ‘한’이 소멸되는 것조차 바라지 않고 오히려 잊혀질까 두려워 그 아픈 추억들을 두고두고 곱씹는 것을 의미한다. 돌이키지 못할 슬픔을 돌돌 말아 놓은 채 마냥 어루만지는 것, 바로 ‘처절한 그리움’이다. 어쩌면 이러한 ‘한’은 나의 향기이자, 나를 지탱해주는 힘일지도 모르겠다.
다음으로 ‘적막하여 어찌할 수 없음’을 들 수 있다. 이것은 개인의 슬픔이 우주자연의 섭리와 연결되어 있는 경계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인간의 유한한 생명과 달이 차고 기우는 그 끝없이 반복되는 자연의 영원성을 빗대어 울적해 하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의 감정 같은 것이다. 이러한 감정은 어찌 할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서러움이기도 하다. 세월은 총총 흐르는데 인생은 짧기만 하니, 그 잡을 수 없는 시간이 못내 서러운 것이다. 특히나 자연계의 봄꽃과 가을 달은 그 무엇보다도 쉽게 인생무상의 아쉬움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높은 산에 올라 먼발치를 내려다보면 언제나 그 자리 그 모습인 자연의 영원함에 비해 나의 인생은 너무나 짧고 보잘 것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자연의 영원함에 비한 인생의 무상함에는 우주의 질서와 역사의 순리가 담겨 있기에 이러한 경계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표현하기 어려운, 피할 수 없는, 말하자면 숙명적 슬픔이다. 또한 공손대랑(公孫大娘)의 검무(劍舞)와 같이 사람들은 늘 그녀의 춤추는 모습만 볼 뿐 적막한 영혼은 보지 못하는 것처럼 감상자들은 나의 작품 속에 표현된 대상의 형식만을 볼 뿐 나의 영혼은 보지 못하는 그런 경계라 할 수 있다. 뛰어난 예술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하는데, 나는 이처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처절한 그리움’과 ‘적막하여 어찌할 수 없는’ 나의 향기를 작품에 표현하여 사방에 흘러넘치게 하고 싶다. 대상의 외적인 형태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타고난 생명의 향기를 담담히 드러냄으로써 감상자들 개개인이 타고난 자신의 향기를 들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오늘도 나는 적막의 경계에서 하늘의 향기를 듣는다.
2020. 4. 20. 오수헌(午睡軒)에서 하영준
댓잎소리-2_41.5x31.5cm_화선지에 수묵_2020
난초인상-2_34.5x24cm_화선지에 수묵_2020
가시장미-1_139x182cm_화선지에 수묵_2020
가시장미-2_37.5x29cm_화선지에 수묵_2020
하늘소리-1_40x32.5cm_화선지에 수묵_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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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영준 | 河榮埈 | ha, young-jun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 예술철학전공 박사를 받았다. 개인전 12회와 단체전 및 초대전 300여회를 했다. 1995년 동아미술제 문인화부분에서 '대상' 및 1996년 대한민국미술대전 한국화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2010년 대한민국미술대전 문인화부문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현재 동방대학원대학교 문화예술콘텐츠학과 회화예술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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