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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타부레 展
형제자매들
The Siblings (orange)_Acrylic and ink on paper_139.7×106.7cm_2020 Photo: Martin Elder. Courtesy the artist and Perrotin.
페로탕 서울
2020. 5. 7(목) ▶ 2020. 7. 10(금) 서울특별시 종로구 팔판길 5 | T.02-737-7978
Zino and Enea (blue)_Acrylic and ink on paper_139.7×106.7cm_2020 Photo: Martin Elder. Courtesy the artist and Perrotin.
<생각하는 갈대> 우리는 더 많고 다양한 기준들이 필요하다. 희열을 망치는 벌레는 무엇인가? 모든 눈이 되어버린 자는 보지 못한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오해를 저지르는 일이다. 알려 하지 말고 계속하여라. 그 무엇이든 거울이다. 끝이 없는 방향이 두 개 있다. 들어가기와 나가기. --아그네스 마틴
“예술에 대한 보편적 요구는... 내면세계와 외부세계를 하나의 대상(object) 으로써 자신의 영적 의식(spiritual consciousness)으로 끌어올려 자아를 다 시 인식하고자 하는 인간의 합리적 요구이다.” --G. W. F. 헤겔
클레어 타부레의 신작 인물화가 시작되었던 2019년은 모임이 빈번하고 사회적 교류가 활발하던 때였다. 그리고 현재 전 세계가 봉쇄되고 생활이 근본적으로 바뀐 시점에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 시기 동안 타부레가 자신의 작품을 보는 관점 또한 진화하였고, 이 인물화들은 공동체의 힘, 또한 분리 속에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는 연대감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그의 전시 형제자매들은 우리 모두가 경험하고 있는 이 고립된 슬픈 상황에서 나오는 어떠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타부레는 “끝이 없는 방향은 두 개 있다, 들어가기와 나가기”라고 주장한 추상화가 아그네스 마틴을 인용한 적이 있다. 마틴이 파스칼(Pascal)에게서 빌어왔듯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 즉 외부세계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복잡한 존재이다. 우리는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내면과 외면, 몸과 마음, 자신과 타인, 이 모든 것에 주목해야 한다. 최근 타부레는 실재하는 사람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관심의 방향이 ‘안’에서 ‘밖’으로 전환된 것이다. 형제자매들을 그린 초상화들은 ‘가족’이라는 인간관계를 다룬다. 우리는 어떻게 연결되고 분리되는가? 개성(individuality)을 형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방향’이라는 것 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안에서 또는 밖에서 시작되는가? 작업 방향을 바꾸니 새로운 질문들이 생겨났다. 이 질문을 탐구하기 위해 타부레는 자신의 오빠를 그리기도 했다. 또한, 파운드 이미지를 사용하는 제작 방식을 고수하기 위해, 그의 작품들은 어린 시절 사진들을 이용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반투명의 섬세한 겹겹들로 구성된 남자아이의 기울어진 얼굴은, 고정된 면이 아니라 배경으로부터 떠올랐다가 물러났다를 반복하는 불안정한 인터페이스(interface)로 묘사된다. 물결치는 물감의 흐름은,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며 진화과정 중에 있는 정체성을 연상시킨다.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사진을 가리켜 “현실을 가두어 놓는 방법,”3 시간을 하나의 프레임에 집약하고 고정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타부레의 회화는 그 반대다. 시간을 자유롭게 풀어주려는 시도이며, 고정된 경계가 없고 변수는 요동친다. 네명의 아이들이 집 앞에서 있는 모습을 담은 작품은 작가가 중고품가게에서 발견한 빅토리아시대 사진을 기반으로 그린 것이다. 파운드 이미지(found image)를 회화 작업에 활용하는 방식을 주로 택해온 타부레는 “내가 이미지 를 찾을 때도 있고 이미지가 나를 찾아올 때도 있다”고 말한다. 오래된 사진 속 익명의 가족에게 흥미를 느낀 작가는 그들을 위한 배경을 창작하기 시작했 다. 밝은 색의 추상 모양들로 꾸며진 아름다운 정원은 생기와 활기를 띠지만 미스터리한 느낌 또한 만연하다. 표현적이고 의미심장하지만, 동시에 단편적 이고 불완전하고 불가해하다. 역사적인 인물화 작품들을 찾아보던 타부레는 특히 에드바르트 뭉크의 <오스고르스트란의 네 소녀들>(1902)에게 강한 영감을 받았다.네 명의 어린 소녀들이 장례식에 가기 위한 복장을 하고 뭉크의 집 노란벽 앞에서 있는 모습을 그린 수수께끼 같은 그림이다. 뭉크는 상실감으로 가득 찬 어린시절을 보낸 후 인간존재의 연약함과 극단성에 관심을 갖고 작품을 통해 내면의 삶을 강렬하게 표현했다. 자연스레 아이들은 뭉크의 작업에 자주 등장한다. 타부레에게 뭉크의 작품은 화면구성에서뿐 아니라 유년기 경험에 대한 반추, 정서적·심리적 상태의 표현, 인간의 내면과 바깥세상 사이의 관계,그리고 개인과 집단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한 고찰 등의 주제 면에서도 영향을 주었다. 타부레 작품 속 아이들은 다같이 순응적으로, 의식적으로 정면을 바라보며 어떠한 일체감을 이룬다. 그러나 그들의 개별 표정은 어색하고 조심스럽고 경계하는 등 모호하다. 작가는 이 긴장감이 고조된 장면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여 몰입하게 한다. 그 종잡을 수. 없는 공간을 관람객 각자 나름대로 이해하도록 내버려둔다. 타부레의 작품세계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은 모네의 수련 그림들을 마주했던 경험이다. 물 그리고 움직임을 회화로 표현하는 일은 얼굴을 표현하는 일과 비슷하다.“누군가를 그릴 때 나는 그 인물이 시간 속에 갇히거나 고정되기를 원치 않는다. 진실은 고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타부레는 인물이 ‘살 수 있는 공간’을 주고자 한다. 마네의 작품처럼 타부레의 인물화 주인공들은 종 종 정면을 향해 관람객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말을 걸듯 다가와 관람객의 감상 과정을 주도하고 이끄는 힘을 가진다. 타부레의 작품은 직접적인 해석이나 즉각적인 의미파악은 어렵지만, 대신 관람객이 자기만의 상상력과 의문점을 가지고 작품 안으로 들어오도록 한다. 작가는 외부세계에서 영감을 찾고 그것을 자신의 예술세계로 들여보냈고, 관람객은 각자 개인적 관점을 가지고 작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아그네스 마틴이 제안했듯, “그 무엇이든 거울” 이 될 수 있다. 인간이 인지하는 세계는 결코 객관적 현실이 아니다. 각 개인이 보는 대로 보여질뿐이다.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내적 의도의 산물로서 일뿐 아니라 외부세계와의 상호작용의 산물로서 그 의미를 지닌다. 예술의 의미는 그 것이 예술가, 작품, 그 소재나 대상, 관람자, 그리고 세상 간 복잡한 협업 과정 의 결과물이라는 것에 있다. 타부레의 인물화는 마주하는 이에게 매번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며 ‘살아 있는’ 작품으로 존속한다. 루시 달슨(Lucy Dahlsen),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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