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아 展

 

2020 척촉을 벗어난 꽃꽃

 

 

 

갤러리한옥

 

2020. 5. 1(금) ▶ 2020. 5. 11(월)

Opening 2020. 5. 1(금) pm 3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촌로11길 4 | T.02-3673-3426

 

https://blog.naver.com/galleryhanok

 

 

꽃들 속에서 희망을 담다_102.5x336cm_비단에 석채_2020

 

 

현실-희망의 진채-꽃꽃
척촉(제자리걸음)을 벗어난 꽃꽃


5월에 만연한 분홍빛 철쭉꽃, 그 어원은 제자리걸음이란 뜻을 지닌 척촉에서 시작된다. 풀을 뜯어 먹던 양들이 봄철 화사하게 핀 철쭉꽃 앞에서 걸음을 주저했기에 양척촉이란 말이 나왔고, 이후 척촉의 발음이 변형되며 오늘날 철쭉으로 불리게 되었다. 물론 양들은 철쭉꽃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독성 있는 꽃대의 치명적인 죽음 앞에 주저했을 것이다.
이런 철쭉꽃을 따다 받친 인물이 있었다. 신라 33대 성덕왕(재위 702-737) 때 순정공이 명주(현재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길에 그의 부인 수로와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때 수로부인이 천 길이나 되는 절벽 위에 핀 철쭉꽃을 따다 달라고 청한다. 시종들 어느 누구도 나서지 않을 때, 암소를 타고 지나가던 노인이 철쭉꽃을 따다 수로부인에게 바친다. 이때 불렀던 노래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헌화가’다. 수로부인은 철쭉꽃에서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보았을 것이다.
철쭉꽃이 지닌 치명적인 독성과 아름다움. 꽃이 지닌 이중성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나르시스(Narcisse, Narcissus) 이야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나르시스는 숱한 요정들의 구애를 모두 밀어내고 결국 물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 나머지 야위어 죽어간다. 자기애의 최극단에 선 나르시스, 이 나르시스가 죽고 피어난 꽃이 수선화다. 수선화의 어원은 바로 나르시스 그 자체다.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아름다움에 파멸되는 시간들, 인간의 탐미주의는 예나 지금이나 이 시간들에 사로잡혀있다. 숱한 작가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오브제가 꽃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경아 작가는 꽃으로 시작하는 늦깎이 신인작가다. 젊은 시절 품었던 화가의 꿈이 오랜 시간 척촉의 머뭇거리는 제자리걸음으로 남아있었다면, 이번 첫 개인전 <척촉(제자리걸음)을 벗어난 꽃꽃>을 통해 작가는 비로소 자신의 그림 꽃을 비단 위에 따다 놓기 시작한다.

진채(眞彩, 불투명한 원색의 진한 그림)로 뒤덮은 꽃꽃

비단 위에 울긋불긋 화사한 진채로 그려진 꽃들이 만개한다. 김경아 작가는 진채라는 매체를 연구하고 이 진채 꽃을 그리는 작가다. ‘진채’, 이 용어의 탄생은 조선 영·정조시대로 소급된다. 영조 때 임시로 시작된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은 정조 때 본격적으로 자리 잡는다. 이 차비대령화원은 왕실의 도화서에서 특별히 차출된 화원을 일컫는다. 당연히 까다로운 3차 시험을 통해 선발되었고, 김홍도나 김득신도 이곳 소속이었다. 여기서 매체적 특성에 따라 수묵, 담채, 진채로 나누어 시험이 치러졌다.
수묵은 종이에 무채색의 먹으로, 담채(수채)는 종이 위에 유기염료로, 진채는 비단 위에 무기안료로 그리는 차이를 지닌다. 서양의 유화가 캔버스 천에 제소 밑작업 후 유화를 바른다면, 동양의 진채는 비단 천에 아교수 바탕을 한 후 돌가루 석채를 바른다. 이렇듯 진채는 동양의 수묵이나 담채와도 다르고, 서양의 유화와도 다르다. 특히 진채는 자연에서 채취하는 천연 돌가루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 석채를 어떻게 배합하고 어떤 밀도로 덧칠하느냐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지는 묘미를 지닌다. 조선후기 도화원에서 차비대령화원을 뽑아 진채를 그렸던 것처럼, 김경아 작가는 현대의 진채연구소에서 그 역할을 하는 작가다.

 

 

Flower_35x42.5cm_비단에 진채_2019

 

 

희망상자에 반사된 자유의 꽃꽃

어느 날 미지의 상자 하나가 배달된다면? 택배문화에 친숙한 우리는 얼른 상자에 붙은 소장의 발신자와 품목을 확인하려 들 것이다. 인류의 호기심은 과도한 스피드광을 자처해왔다. ‘모든 선물’이란 뜻을 지닌 판도라는 신들을 얕보고 인간들에게 불을 준 프로메테우스를 벌하기 위해 제우스가 창조한 최초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온갖 치명적인 해악을 가졌지만, 궁극으로는 그녀의 호기심이 화근이었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의 동생인 어리석은 에피메테우스에게 판도라를 보내 결혼하게 만들었고, 그때 함께 보낸 상자가 궁금했던 판도라는 그만 그것을 열고 만다. 상자 속의 모든 불행이 빠져나오고, 유일하게 남은 것이 희망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상자 하면 이내 떠오르는 것이 희망이 아닐까.
김경아 작가는 진채의 흐드러지게 핀 꽃들 사이에 큐브상자를 띄운다. 작가는 작업을 지속하면서, 속이 비치는 반투명 상자로부터 차츰 반사되는 불투명 상자로 전이한다. 작가는 반투명 상자 속에 자신이 가고 싶은 시원한 바다 같은 이상향을 담기도 하고, 상자 외벽에는 주변의 반사된 꽃들을 채워 넣는다. 판도라의 것처럼, 상자 속에 남아있는 희망은 작가의 유토피아가 된다. 하지만 그 상자를 감싸 안은 꽃잎들은 현실의 불행이 아니라 작가로서 꿈꾸는 자유를 향한 몸짓에 가깝다.
최근에는 반사되는 상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비단 화폭의 화사한 꽃들 사이에 마치 초현실적인 공간처럼 직육면체의 상자가 부유한다. 더 이상 내부를 보여주지 않는 상자는 현실에 만개한 꽃들을 되비치며 미스터리하게 남아있다. 꽃을 그리고 또 그리며, 작가의 생각이 닿은 곳은 어디일까? 꽃과 꽃이 계속 피어나는 것처럼, 우리는 그저 척촉을 벗어나기 위해 현실을 살고 또 살아가야 한다. 작가는 꽃과 꽃을 그리며 보다 친숙한 현실의 희망을 기원하는 중이다.


미술비평가 반아

 

 

Flower_비단에 석채_40x33cm_2019

 

 

Flowers_38x50cm_비단에 진채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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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00501-김경아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