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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위한 몸짓들 展
김규식, 신형섭, 윤호진, 정재희
스페이스 55
2020. 4. 23(목) ▶ 2020. 5. 17(일) Opening 2020. 4. 23(목) pm 6 서울시 은평구 증산로19길 9-3
https://blog.naver.com/newacts29/221909933362
어떤 사물이나 대상의 본질적 의미를 이해하는 철학적 방법론 중 하나는 그 대상을 동태, 동사로서 사유하는 것이다. 사진은 어떤 동사로 풀어낼 수 있을까? 후보는 많다. 보기see, 관찰하기look/observate, 기록하기document, 시각화하기visualize, 개념화하기conceptualizaton, 박제시키기stuff/taxidermize, 소통하기communicate와 같은 개념들이 줄지어 나온다. 두 세배는 많은 단어들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단어들을 살펴보면 어느 한 곳이 부족하다. 보기, 관찰하기, 기록하기 등 관찰자-사진가의 관점의 단어들은 사진의 신화적인 특성이나 조작성에 관한 내용이 결여됐다. 시각화하기, 개념화하기, 박제시키기, 소통하기 등 이미지 제작자-사진가의 관점의 단어들은 반대로 물질적인, 물체로서의 사진의 의미나 대상에 대한 관찰과 재해석 가능성을 완벽하게 내포하지 못한다. 비록, 몇몇 동료 큐레이터들은 사진을 다뤄질 만큼 다뤄져 단물이 다 빠진 매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 본질은 생각보다 다양한 면을 동시에 갖고 있어서 총체적으로 다루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사진을 가장 총체적으로 잘 나타내는 동사는 무엇일까, 물론 ‘사진photograph’ 그 자체이다. 부드럽고, 딱딱하고, 감동적이고, 폭력적인 이 대상을 더 잘 설명하는 단어는 없다. 사진은 그 자체가 물리적 대상이고, 동작이며 몸짓이다. 이런 대상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전시<사진을 위한 몸짓들>는 신형섭, 김규식, 정재희, 윤호진 네 명의 작가가 자신이 ‘찍은’ 사진 한 장도 없이 구성한 사진 전시이다. 사진 대신 몸짓으로 구성된 이 전시는 현대 사진 담론에서 ‘제일 잘 팔리는’ 서사성도 없고 네러티브에 의한 감동과는 거리가 멀다. 이미지의 기호학이나 신화학으로 읽을만한 내용도 없다. 그러한 접근이 가능하다면, 사진 매체 혹은 사진을 찍고, 만들고, 보는 이들의 관계에 대한 기호학적 접근 정도가 최선일 것이다. 그렇지만, 네 명의 작가는 각자가 주목하는 사진의 주요 특성을 중심으로 한 문제의식에 천착하고 독자적인 작업방식을 설정하여 사진의 존재에 관한 질문과 답을 이어나간다.
신형섭作
신형섭은 카메라의 기술원리를 기반으로 한 조형, 설치 작업을 통해 사진 기술-매체의 재현 형식을 재해석하고, 현실과 사진이미지의 관계성을 드러낸다. 실물환등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조각-설치 작품 <Argos Panoptes>는 카메라의 기본 원리인 투사(projection)를 중심으로 그 논의를 풀어낸다. 투사는 특정 대상의 이미지가 센서를 통해 인식되거나, 필름 혹은 인화지의 감광면에 닿아 사진을 만들어 내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실제 오브제를 이미지로 투사시키는 화려한 조형기계만이 존재할 뿐, 이미지가 도달할 감광면이나 센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그림자극 판타스 마고리의 유령, 환영에 가깝다. 환등기를 통과하여 투사된 이미지는 확대, 왜곡되어 현존 자체로서 인식되는 독립적인 시공간을 구성한다. 하지만 그저 환상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실물환등기 내부 시계와 같은 오브제는 끊임없는 자기지시로 자신들의 존재와 이미지의 사실성을 증명한다. 객관적 사실, 혹은 왜곡된 환상과 같은 이분법적 개념이 혼재된 긴장 상태는 작품-기계가 꺼질 때까지 계속된다. 긴장을 해소하는 또 다른 방법은 작품의 제목에서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아르고스 파노프테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100개의 눈을 가진 거인으로 도망칠 수 없는 절대적인 감시와 시선을 상징한다. 제우스는 일탈과 밀애를 함께 한 내연녀 이오를 그의 감시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지하와 지상, 땅과 하늘을 오가는 전령의 신 헤르메스를 보내 아르고스 파노프테스를 죽인다. 구분지어진 경계를 횡단하고, 절대적인 감시를 종식시켜 자유를 되찾는 헤르메스는 특정 대상 자체와 대상이 존재하는 형식에 대한 이해를 다루는 학문 ‘해석학(Hermeneutics)’의 어원이기도 하다. 전시장 내 투사된 사진(photographic) 이미지들을 해방하는 ‘헤르메스’는 누구일까? 작품을 마주하는 수용자 그 누구라도 될 수 있다. 기계가 꺼져 이미지의 시공간이 소멸하지 않는다면, 이미지들의 해방은 수용자의 해석과 그로 인한 실존으로의 이행으로써 가능하다. 그렇게 작품은 관객의 수용과 해석, 새로운 가치의 창발로 사진을 위한, 사진에 의한 몸짓을 이어나간다.
김규식作
김규식의 작업은 빛의 입자성과 물질성을 제외한 대부분의 요소들의 거세로부터 시작한다. 작가는 과거 평면 이미지 작업 <Abstract Picture>, <Non Picture> 등에서 카메라로 촬영한 이미지 대신 필름을 잘라 붙인 필름 조각이나 아크릴 스프레이로 처리된 유리판을 암실에서 인화지에 노광 시켜 사진을 ‘만들어’냈다. 사진 자체는 아날로그 인화 방식을 통해 만들어 지지만, 이미지는 작가에 의해 철저히 계산되고 조작된 사진 인화물은 조형적으로 구성된 가상과 기실 사진의 경계에 자리한다. 이러한 배수背水적인 작업론과 작업방식은 역설적으로 절대적인 진실 몇 가지를 담보하는데, 그 중 ‘이미지의 창발’, ‘주체의 개입’은 그의 전반에서 작용하며, 사진의 사실성과 카메라의 의미, 그 절대적 시선과 이미지의 신화적 힘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 질문을 통해 너무 많은 표상과 메시지를 섭렵하고 끝없는 복제와 엔트로피의 증가로 인해 그 기능과 역할이 희미해져 가는 현대 사진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IVD>(Image Viewing Device)는 그 문제의식을 미디어 작업으로 확장한 결과물 중 하나이다. <IVD>는 나무상자와 그 내부에 프로젝션 맵핑을 통해 구현된 푸른 정육면체의 이미지로 구성된다. 소형 암상暗箱안에 보이는 정육면체는 허공에 떠있는 입체물로서 제시되지만, 사실은 여러 대의 프로젝터가 서로 다른 평면 이미지를 유리조각 위에 정교하게 맵핑, 투사하여 만들어 낸 이미지이다. 이 프로젝션 이미지들은 자신들이 투사되어 상을 맺을 매체에 맞게 변형됐다. 이들이 평면에 투사된다면 우리는 이 이미지들을 알아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IVD>안에서 사진이미지는 절대적인 힘을 갖지 않는다. 총체적인 이미지를 구성하는 일부로서 수정될 수 있는 존재이며, 총체적인 이미지 역시 비현실적인 입체물로서 존재할 뿐 현실적인 이미지들이 합쳐진 현실로 제시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이 사진의 독립적인 지위를 부정하거나 어떤 의미도 없는 그래픽 이미지 소스로 전락시키는 것은 아니다. 정육면체의 표면에는 작가가 촬영한 필름입자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비록, 이를 필름입자라고 인지하지 못해도 관찰자는 어딘가에서, 누군가에 의해 채취된 빛의 입자가 지금, 이 어두운 방 안에 투사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작동은 지극히 촬영, 보정, 투사 등 사진의 기술원리로 구현되어 있다. 작품을 통해 이미지의 절대성은 무너지고, 그 정체성은 규정할 수 없지만, 작가와 사진의 실존은 더욱 분명해진다. 작품은 혼동을 가져오지만, 그 혼동 안에서 끊임없이 메아리치는 것은 인간의 창발성을 대표하는 작가와 사진의 독립적인 존재이다. 오늘날 사진 이미지(영상을 포함한 기실 미디어 전반)를 기반으로 한 커뮤니케이션은 카메라의 객관성에 이미지의 독립적인 지위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오늘날 딥페이크와 같은 이미지 조작 기술이나 지난 20세기 전반의 시각문화 연구들을 통달하지 않더라도 그 객관성은 절대적으로 보장된 것이 아님을 우리는 편향된 미디어, 현실과 모순된 인스타그램의 피드를 보며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있다. 애초에 카메라가 정확성과 절대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관계를 규정하는 대타자의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15세기 이후 르네상스 시대에 카메라 옵스큐라가 건축, 자연, 과학, 예술 전반에 이용되었을 때, 기존의 방법론에 결여되어 있던 객관적 기준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고, 유클리드 기하학의 척도와 원리와 결합하여 절대적인 사실 기준을 구분하고 그 원리로 만들어진 사진이미지에 절대성을 부여하기까지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카메라 옵스큐라의 기원을 원시로 소급한다면 그 역할은 동굴 속 주술사의 주술을 위한 환영 제작에 사용됐다거나 입구가 가려진 동굴에 우연히 빛이 스며들어 동굴 밖의 이미지가 동굴 벽에 투사됐고 이를 원시인들이 상상의 기반으로 삼아 벽화를 확장하는 데 근간이 됐을 것이라는 추측 정도가 가능할 뿐이다. 선사부터 시작된 카메라는 전적으로 인간의 의지와 욕망과 함께 호흡했고, 필요를 근거로 발전했으며 이는 의료기술, 산업건설 현장, 우주탐사 등 특수목적을 위한 이미지 기술로 진화했다. 물론, 오늘날 감시, 도시체계 관리 등 인공지능을 위한 카메라 기술은 인간의 해석 범주를 넘어섰다. 입으로 발음하기도 힘든 수의 사진이미지가 매초 만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인간의 반성적 판단을 기준으로 탄생과 소멸이 결정되고, 이 사실은 아직 변한 적이 없다. 기술에 대한 환상과 공포가 혼재하는 이 시점에서, 김규식은 작업은 사진을 해체하고 다른 형식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을 통해 인간과 기술 각자의 독립적인 지위를 재확인한다.
윤호진作
윤호진은 사진이미지를 구성하는 조건과 주변 환경을 총체적으로 연구한다. 그의 작업에서 작가 자신은 작품을 창작하는 주체이지만, 동시에 사진을 구성하는 조건, 환경으로서 이미지의 존재 양식과 미학적 상태, 의미에 변화를 가져오는, 가변성을 지닌 주변 요소이다. 스톡이미지나 촬영한 이미지를 ‘자연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바라보고, 변형하고, 다른 매체로 이행하여 새롭게 재현하는 과정을 통해 사진의 기술적 대상으로서의 존재양식, 예술적 대상으로서의 존재 양식에 대한 논의를 작품과 관객 사이로 가져온다. 특히 사진이미지의 매체와 결부된 물리적 형태의 변형을 실험하며 사진‘이미지’가 사진으로서 독립적인 지위와 존재론적 근거를 확립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추구해왔다. 기술적 대상들은 복합적이고 당대를 기준으로 완벽에 가까울수록 그 안에서 여러 기술이 독립적인 기관이 아닌 하나의 신체, 환경, 다른 구조와 상호작용하며 하나의 거대 앙상블을 이루는 형태로 존재한다. 렌즈의 광학,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 투사와 감광, 확대와 화학인화-보존 처리 등 독립적으로 구분된 기술들이 총체적인 사진(술)을 구성하듯, 오늘날 사진은 영상, 홀로그램, VR, AR 등 다양한 이미지 기술들과 공존하며 함께 체계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연극 무대 위에서 무대 조명과 연기자의 몸짓, 발성과 대사, 설치 배경, 관객의 참여, 막과 막 사이의 호흡 등 각자의 기능을 독립적인 대상으로 분리하여 사유, 평가할 수 없듯 오늘날 사진은 기술적 대상으로서도, 예술적 대상으로서도 대부분의 이미지와 앙상블을 이루며 존재한다. 이미지의 크기, 스크린의 크기, 앞뒤 이미지와의 몽타주, 이미지 내에서 이뤄진 콜라주, 실제 사물과의 지표적 관계, 카메라의 판형, 종이-스크린-광학 프로젝션과 같은 재현 매체의 변화 등 모든 것이 독립적인 사진(술)의 의미에 변화를 일으키고 있지 않는가? 작품<#Transparent, #Translucent, #Opaque and #Reflective>는 이러한 사진의 환경 조건을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갈색 머리를 한 백인 여성의 스톡 사진이미지는 세 개의 프레임에서 각기 다른 형식으로 재현되어 있다. 그중 가장 ‘자연스러운’ 선명한 포트레이트 이미지는 명확한 ‘미녀’라는 신화적인 상징성을 가진 이미지이다. 그 옆의 두 장의 사진은 후보정으로 가공된 형태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한 장의 원본 사진과 두 장의 변형 사진으로 구성된 것일까? 실상은 완전히 다르다. 사진들 중 흐리고, 상하좌우가 반전된 이미지는 오래된, 빛 반사율이 낮은 카메라 파인더를 통해 보이는 이미지를 연상시키는데, 이는 완전히 디지털 후보정을 통해 재현된 것이지만, 어떤 사진가에 의해 해당 이미지가 관찰되었으며, 추가적인 개입이 있었음을 드러낸다. 다른 사진 한 장은 조금 더 노골적이다. 포토샵에서 흐림(blur) 효과를 더한 듯한 이 사진에는 이미지 정 중앙부에 디지털 보정 중 모니터에서 볼 수 있는 마우스 커서가 자리한다. 이 두 장의 사진은 이미지 내적으로 상징관계를 통해 환상이나 신화를 그려내지 못한다. 실제 광학을 통한 빛의 물리적 박제를 통해 ‘지금, 여기’로 상징되는 사진의 시간성이나 공간-장소성의 근거를 제시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어떤 사진보다 효과적으로 사진가와 사진의 존재 양식을 지표(index)한다. 이제 다시 처음 봤던 ‘자연스러운’ 사진을 보자. 이 이미지는 ‘자연스러운’ 원본인가?
정재희作
정재희는 다수의 메모리 장치 없는 카메라로 구성된 설치 작품 <Present>를 통해 기억과 시선의 분리를 시도한다. 카메라의 셔터음, 플래시 사운드의 반복적인 재생에도 불구하고 결국 메모리 카드 없이 시선의 단서를 남기지 않는 카메라들의 시선은 전시장을 기억과 관념의 폭력이 ‘다소’ 걸러진 공간으로 이행시키고, 관객은 ‘다소’ 순수한 시선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지만, 작품 자체로 장소특정적인 이 작업의 목적이 단지 순간적인 헤테로토피아 따위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작품의 설정이 관객에게 일시적인 자유를 반드시 보장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자유롭게 카메라를 마주할 것이며, 누군가는 그런데도 불구하고 불안함에 카메라를 피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정재희의 작업은 카메라 옵스큐라의 발명 이래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시각적 에피스테메(특정한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의 무의식적 체계)를 추적하는 현장 실험이기도 하다. 이 실험은 실험장소 밖에서 온 이들의 동태적인 반복, 몸짓의 진화를 촉구한다. 그리고 매년, 매 전시, 매번 그 반복 속에서 내적 차이를 만들어낼 것이다. 작품은 사진 없는 사진으로서, 끊임없는 동작과 몸짓으로서 진화하는 ‘지금’과 ‘여기’의 사진을 그려낸다.
전시 <사진을 위한 몸짓>에서 신형섭은 사진 기술-매체의 재현 형식, 현실과 사진이미지의 관계성을 논의한다. 김규식은 사진의 물질성을 중심으로 기타 요소들을 해체함으로서 작가의 창발가능성, 인간과 기술 각자의 독립적인 지위를 재확인한다. 윤호진은 사진이미지의 재구성을 통해 사진의 존재 조건과 주변 환경을 총체적으로 드러낸다. 정재희는 카메라 설치작품을 통해 사진이라는 행위 자체의 의미, 사진과 기억의 관계, 사진의 장소성, 사진에 의해 재현되는 일상성을 실험한다. 이렇듯, 이 전시는 현대 사진 담론의 주축을 차지하는 대부분의 담론을 다룬다. 하지만 제대로 된 ‘일반적으로’ 촬영된 사진은 한 장도 없다. 그렇다면, 이 전시는 사진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적어도 사진을 위한 전시라고 할 수 있을까? 그저 사진에 대한 회의 가득한 비관적 전시가 될 수도, 현대 사진 담론을 돌아보고 새로운 담론의 탄생을 촉구하는 전시가 될 수도 있다. 이 전시에는 사진이 없기에, 많은 부분을 사진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몸짓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저 그들이 이 전시를 거쳐 새롭게 만들어 낼 사진들이 후자에 가깝기를 바랄 뿐이다.
김진혁(독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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