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길헌 展

 

너그러운 숨결

 

Visage Machine_55x46cm_Acrylic on canvas_2013

 

 

갤러리담

 

2020. 3. 17(화) ▶ 2020. 3. 26(목)

서울특별시 종로구 윤보선길 72 (안국동) | T.02-738-2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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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대한 숨결 Souffle indulgent_40.5x32cm_Acrylic on canvas_2013

 

 

영원을 향한 해체와 생성_서길헌의 그림

 

그의 그림 앞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떠보면 그림은 언뜻 도깨비의 얼굴로 보인다. 또 장승이나 사천왕의 얼굴로도 보이고 먹중탈로도 보이는데 모두 도깨비의 얼굴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서양적인 개념으로는 도깨비가 괴물(Monster)에 해당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서양의 신화에 나오는 여러 종류의 신의 얼굴로도 보일 것이다. 하지만 왕방울 눈에 뿔을 가졌으면서도 너그럽고 친근해 보이는 한국 도깨비를 떠올리자. 도깨비의 얼굴은 사악한 것을 물리치고 복을 부른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목구비가 과장되었지만 도깨비의 얼굴은 사람의 얼굴을 본떴다. 얼굴은 영혼의 집이다. 단정적으로 규정짓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서길헌의 일련의 그림은 얼굴의 해체이자 변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감정을 방사하는 다채로운 문화적 기호가 얼굴의 풍경인 표정”이라는 들뢰즈(Gilles Deleuze)와 과타리(Felix Guattari)의 ‘얼굴(안면성) 추상기계, Visage/Machine Abstraite’의 개념과도 상통하는 얼굴의 해체와 변형으로서의 일관된 작업을 계속한다. 한 인간에게는 수많은 표정이 있고 하루에도 각기 다른 수많은 표정을 짓는다. 한 인간의 얼굴은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일생 내내 수없이 변한다. 그의 작업도 유사성을 유지하면서 변화를 갖는다.

 

그의 그림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원이 존재한다. 원은 그림 안에서 모든 조형 요소들을 끌어들여 소용돌이를 일으키거나, 중심으로부터 밖을 향해 다양한 힘들을 내뿜는 태풍의 눈과 같은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눈동자일 가능성이 크다. 얼굴의 풍경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눈동자는 내면의 거울이면서 바깥세상을 받아들이는 창이자 우주를 향해 열린 창이다. 천수천안관음도(千手天眼觀音圖)에서 눈들이 중요하듯이 서길헌의 그림에서도 눈들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은 구체적인 설명들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서길헌의 그림은 추상화이다. 그것은 서정적이면서 따뜻함이 느껴지는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형을 부정하고(Informel) 새로운 조형세계를 창조하려고 했던 추상표현주의는 즉흥적 행위와 격정적 표현의 자유로 오히려 ‘표현으로부터 멀어지는’ 경향성을 가졌었다. 이에 반해 서길헌 추상화의 경우는 나타내고자 하는 작의(作意)가 뚜렷하다.

 

추상표현주의 작가 중에서도 잭슨 폴락(Jackson Pollock), 드쿠닝(Willem de Kooning)과는 달리 구성과 색채를 의식하고 좀 더 통제된 그림들을 그린 바젠느(Jean Bazaine), 마네시에(Alfred Manessier), 폴리아코프(Serge Poliakoff)와 같은 화가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별 의미가 없는 문양 같은 그림들을 그렸었다. 필자는 지금 누가 누구보다 낫다는 것을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서길헌은 부정형의 추상화를 그리면서도 독특한 형상성을 갖고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왜 지금 시점에서 60-70년 전의 미술사조 타령을 하느냐”고 힐난할지 모르지만, 추상표현주의를 밀어냈던 팝아트도 미니멀리즘도 이미 예전에 끝났고 지금은 그 모든 것이 공존하는 시대이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옛 시절의 비틀즈를 연주하듯이 그림 작업도 각자 자신의 길을 심도 있게 추구하면 되는 것이다.

 

서길헌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는 실로 생의 다양한 경험을 했다. 화력(畵歷) 자체도 특이하다. 남들보다 한참 늦은 나이에 미대에 입학해 졸업했고 유럽에서의 긴 방황 후, 프랑스 파리 1대학에서 조형예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까닭에 그는 생을 관조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그림의 제목이자 키워드이기도 한 ‘너그러운 숨결’, ‘그러나 너그러운 숨결’, ‘한없이 너른 숨결’은 그의 그림세계를 열 수 있는 열쇠다. 그는 우주 안의 모든 것은 변한다는, 말하자면 ‘역(易)’의 이치가 우주의 질서라고 생각하며 ‘우주의 숨결’을 화폭에 담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작품을 그리는 방식에 있어서도 우연성을 거부하고 의도적인 시도와 그 나름의 일관된 방식을 유지한다. 발색과 운필에 있어서 우연성에 의존하여 붓을 즉흥적으로 휘두르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생생하고 기괴한 이미지의 창출을 위해 동적인 호흡으로 야생을 기하면서도 선 하나하나에 미세한 떨림이나 파동으로 살아있는 느낌을 불어넣으려고 애를 써왔다. 모든 선들이 스스로 움직이듯 기혈을 타고 다른 요소들과 어우러지도록 집중해왔다.

프랑스에서 적지 않은 기간, 미술수업을 하고, 추상화를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선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정서가 느껴진다. 그것은 우선 그가 원색의 아크릴 물감을 즐겨 사용하는 데에서 기인하는 한국적 정서 때문이기도 하다. 어딘가 오방정색과 오방간색 같은 한국적인 색채의 미학을 환기하는 그의 그림은 일견 한국인이 늘 접하게 되는 단청의 이미지와도 닮아 있어 친근감이 든다.

 

다시 그의 한 그림 앞에서 눈을 감았다 떴다 해본다. 영원히 불멸한다는 불사조의 해체가 보이기도 하고 창세전의 혼돈(Chaos)이 보이기도 한다. 생명을 발아시키는 원소들이 서로 착상되어 새로운 영혼을 가진 개체가 생성되는 순간이 보이기도 한다. 예술 작품은 보기 나름이고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작품이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는 것은 그 작품의 함의가 다양함을 의미한다.

이번 전시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작업이지만 2017년 8월과 10월에 연거푸 두 번 전시를 가진 그의 수상(水上) 설치작업인 ‘신성한 숨결(Sacred Breath)’에 관심을 가져 볼 필요가 있다.

 

선홍색의 지극히 가벼운 폴리스틸렌 패널을 이용하여 약간씩 다른 곡률의 부메랑 모양의 형체를 만든 다음, 쌓아올려 탑처럼 만든 조형물을 자연 호수나 혹은 실내에 여러 개 만들어 놓은 조그만 인공호수에 띄워 놓는 작업이다. 조형물들은 자연의 바람에 움직이기도 하고 실내의 경우에는 선풍기 바람에 움직인다. 설치 작업이면서 일종의 움직이는 미술인 카이네틱 아트(Kinetic Art)라고도 할 수 있다. 또 관람객을 참여시켜 손으로 밀게 하거나 실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조형물들을 살며시 당겨 보게 하는 것이다. 변모하는 조합이 만들어가는 형태나 서로의 상호작용, 전체적인 움직임의 변화를 조용히 응시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변하고 흐른다. 조형물들의 변화와 움직임은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호수 위에 꽃잎들이 떠도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그 움직임이 지극히 미세하여 동양적인 정서를 느끼게 한다. 이를 보는 관객들은 명상과 힐링의 효과를 얻는다. 관객과의 소통을 꾀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서길헌은 2012년 5월, 파리1대학인 ‘팡테옹 소르본느’에서 ‘세계 안의 순간과 유동태-이미지와 움직임에 관한 연구(L’instant et l’état de flux dans le monde-recherche sur l’image et le mouvement)’라는 제목의 독창적이고 내용이 실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상의 모든 것은 짤막한 순간의 연속으로 이루어지고 모든 일은 순간적으로 지나가지만, 시간 속에서 기억이라는 형태의 흐름으로 지속된다”라는 이미지의 지속성이라는 문제가 내용을 이룬다. 수상 설치작업인 ‘신성한 숨결’은 그의 ‘이미지와 움직임’에 관한 연구의 발전된 형태의 구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주제는 사물의 움직임을 통해 자신의 생을 암시하기도 하면서 유목민이나 부평초처럼 떠도는 우리 모두의 인생이다.

 

이 수상 설치작업은 그의 평면작업인 추상화의 세계와 연결된다. 그의 ‘추상의 변’을 들어보자.

 

“... 모든 것을 포함하는 열린 세계로서의 추상이다. 이 점에 있어서 범신론적인 관용의 세계와 그 맥이 통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회화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재론적인 숨결로부터 나온다. 그 숨결은 유한한 삶이 뿜어내는 불가해한 색깔이라든가 끊임없이 변이하는 세계의 물질이 빚어내는 비속한 형용들이며, 고통스러운 시간이 꾸는 모든 꿈의 모태이자 무덤이다. 이는 그동안 내가 그려왔던 ‘너그러운 신성’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그는 우주 안에 생명의 일원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절대자의 관후(Generosity)’로 여기며 감사해 한다. 그가 그 나름의 확고한 철학 위에서 작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말하자면 눈과 손이 여러 개 달린 천수천안관음도를 그리고 있다. “끝없이 겹쳐진 세상을 가진, 천 개 만 개의 눈을 가진, 모든 것을 보거나 보아서는 안 되는 이미지. 수정구슬처럼 단단하고. 명징하고. 결코 깨어지지도 않을 것. 삶도 이와 같을 것. 모든 시간이 서로 맞물려. 하나의 구조가 될 것. 그 얼개는 꽃이어도 좋고. 꽃이 아니어도 좋다.”라고 그가 언젠가 작가노트에 썼듯이,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형태의 변형되고 해체된 천수천안관음도를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제삼자들은 이와 같은 주장을 어이없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그림에 대하여 종교적인 오해나 해석을 경계하는 작가 자신도 이를 부정할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일관되게 ‘너그러운 신성(la divinité indulgente)’을 그리겠다는 그의 작업의지는 자비로움과 구원의 능력이 무한한 천수천안관음(Sahasrabhuja-avalokitesvara)을 그리던 고려시대 화가의 의지와 어딘가 궤를 같이한다. 오해를 피하고자 덧붙이자면, 그는 파리 시절 한때나마 세속적인 삶에 회의를 느끼고 잠시 카톨릭적인 스테인드 글라스 작업을 통해 절대자, 또는 구원의 빛을 추구하는 길을 꿈꾸었을 정도로 예술가로서 자신만의 신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하였다고 말한다.

 

절대자는 자신의 얼굴을 본떠 사람의 얼굴을 창조했다고 한다. 서길헌의 그림은 우주의 얼굴이자 절대자의 숨결이다. 이토록 그는 영원을 위한 해체와 생성의 작업을 거듭하고 있다.

 

이만주(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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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200317-서길헌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