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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채영 展
Dispersion of Life
비움갤러리
2019. 12. 24(화) ▶ 2020. 1. 5(일)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 36길 35 B1 | T.070-4227-0222
본인은 작업에서 수 없이 반복되는 무의식적인 행위의 반복을 통해 패턴을 가지게 되거나 특정한 형상성을 띄게 되는 밑 작업을 여러 번 겹쳐서 한다. 이는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사고의 패턴, 기억의 흔적들이 반영된 것이고 사람들의 삶의 겹을 나타내며 반 추상적인 형태의 이미지들로 함축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우연적인 배열과 질서가 캔버스 위에 생기게 되고 겹의 충분한 깊이가 느껴질 때까지 행위 한다. 덮고 덮은 행위 이후 마지막으로 반사되는 색을 지닌 은색, 금색 등의 색을 입힌 후 객체를 올리는 또 다른 행위를 얹힌다. 이는 심상적 대상의 표현의 우연에서의 필연성에 대해 말하고자 함이다.
작품을 함에 있어 인간이 살면서 무수히 느낄 수 있는 감정과 경험에 의한 내적 트라우마에 집중하였다. 파울쿨레(Paul Klee, 1879~1940)는 “geste는 무엇인가에 대한 표현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존재의 표현이다....geste는 즉각적인 자기 표현 속에서만 가치를 지니고 반복에 의해서만 공간에 도달한다.”라 하였다 본인은 작품을 통해 삶의 겹을 나타내는 여러 번의 물감의 덫칠함과 긁어내고 다시 얹는 반복적인 geste를 통하여 공간에 도달하고자 하였으며 이는 무의식에서 오는 반복적인 행위라 볼 수 있다. 이 행위는 또한 본인 스스로의 경험과 트라우마에서 해방 시켜주는 행위로 볼 수 있으며 감정의 집중을 느낄 수 있는 다분히 의식적이지만 비 의식적인 작업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마리에 루이제 폰 프란츠는 “무의식은 마치 무언가가 어딘가에 어떤 알려진 것으로 있듯이 그렇게 이미지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결코 의식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은 아니다.”라 하였다. 이는 경험이나 집단적 무의식이 개인의 의식 구조에 어떤 시각적 형태나 심상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뜻한다. 브루통은 모든 우연성을 활용한 예술작품에서 약간의 합리적인 통제가 나타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무의식적 역할, 즉 필연적인 의식이 그 중심에 있어 모든 것을 의식적인 형식으로 구축한다는 것을 뜻했다. 예술가에게 있어 작품에서 변형될 수 있는 방식들은 예술가 자신이기 때문에 필연적인 의식이 개입된다는 것이다. 예술작품들은 우연적이면서 필연적이다. 그것이 어떠한 시도로부터 출발한 우연에서 필연적인 근거를 기초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일이든 우연이라고 여겼으나 시대상 작가의 관념상, 필연적인 결과물일 수 밖에 없다고 결론짓는 것이든 간에 작품에 있어서 이 두 가지는 항상 공존한다. 작품에 나타나는 규칙적이거나 비 규칙적인 형상들은 본인의 개인적 경험이나 상념 속에 있는 것들의 표현으로 캔버스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 부유하듯 떠오르는 이미지를 따라 즉흥적이고 자동적으로 선택하고 그려내는 것이다.
Assemblage series 에서는 가장 위에 입혀지는 마감색은 반짝이는 색을 사용하였다. 우리의 심리 작용에는 ‘검열’의 힘이 있다. 사회생활의 관례와 도덕 윤리의 법칙에 위배되고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심리 과정은 이 ‘검열’에 의해 억압되어 무의식은 쉽게 의식의 표면에 드러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무의식의 내용은 풍부하고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나 억압 작용에 의해 제지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본인이 사용하는 마지막 색인 반사되는, 펄(pearl)감이 들어간 색채를 사용하는 것과 유사함을 띈다. 사람은 방어기제를 가지고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있고 이를 반사되는 화려한 색을 사용함으로써 대변하고자 하였다.
본인은 인간이나 자연, 사물의 실체가 원래의 형상의 크기를 가지고 있을 때 아름다움을 느끼지 않는다. 한 발짝 멀리서 보았을 때는 그것이 아름답지만 이를 가까이 마주하고 들여다 볼 수록 추악한 면모가 보이기 때문이다. 한 개인이나 가정의 형태를 예로 들어보자. 잘 차려 입은 한 개인이나, 다정해 보이는 한 가정의 모습은 관망하듯 한 발짝 물러서서 보면 그것은 아름답다. - 현대 사회의 SNS의 단면들이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아닐까. - 그러나 이들과 가까워지면 질수록 그들의 아픔과 고통, 그들의 사정이 얽히면서 그들의 추악함과 아름답지 않음이 다가오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이는 본인의 개인적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이면서도 대부분의 이들 또한 같을 것이라 본다. 한 발짝 물러서서 관망하듯 보기는 특히 자연형태나 인간이 만들어 놓은 구체적인 형태를 모아 추상적 형태를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형상이 있어서 볼 수 있는 것은 아름답기는 하나 동시에 보는 이의 가치관으로 인해 추하거나 또는 그 중간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의 경험의 층을 나타냄과 동시에 인간의 내면세계에 존재하는 추악한 면을 탈피하고 관조적인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이며 이를 위해 형태를 단순화 내지는 기하학적인 것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자연이나 도시의 이미지들이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형상을 추상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미세한 구체적인 조각들이 잘 결합되고 조화되어 그것들만의 이미지나 유기적인 형태를 만들어 내며 이 또한 새로운 세상의 한 단면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공간에 대한 객관적 이미지에 주관을 넣는 것으로 본인의 시각을 통하여 새로운 조형공간을 창출하는 과정 중 하나라 볼 수 있다. 새로운 공간은 재해석된 공간으로써 기술적으로 반듯하고 정확한 공간은 아니며 - 반듯하려 하나 인간이기에 바르게 할 수 없는 한계임과 동시에 - 본인의 이성적 의지와 무의식의 결합된 공간이다. 이렇게 배열된 기호학적이면서 추상적인 형태를 표현함에 있어 개체 하나하나를 묘사하는 방법을 버리고 개체 하나를 그리거나 짜서 올려놓는 행위로 대신하여 표현함으로써 사람들의 공통된 삶의 모습을 표현한다. 이러한 행위는 본인 개인의 무의식에서 비롯되지만 사람들의 공통적 삶의 무게와 감정이라는 점에서 집단의 무의식과 관련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이렇게 하나씩 그려내거나 짜내서 얹혀놓은 물감의 군집은 삶의 한 부분임을 나타내며 이것들이 모여 집합을 이루게 된다. 이는 또다시 하나의 추상적 형상을 만들어내며 이로써 본인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이 완성된다.
어떠한 대상을 보고 지각한다는 것은 우선 시각 구조를 통해 인식하고 두뇌로 정보를 알려줌으로써 그것이 가능함을 뜻한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이미지(image)라고 부르며, 이미지를 특별한 기호로 간주하고 있다 존 버거의 이론에 따르면 하나의 이미지는 재창조되거나 재생산됨으로써 보여 지는 어떤 것이다. 혹은 무엇인가 우리 앞에 나타남, 또는 나타난 것들의 집합이다. 이미지란 예전에는 마음 속에 어떤 것을 떠올릴 때 드러나는 어떤 형상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점차 이미지가 그것을 표상하는 어떤 것 이상일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즉 이미지를 만든 사람의 특정한 시선이 이미지라는 하나의 기록으로써 드러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어떠한 대상을 부르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이미지가 이제는 그 대상이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가를 나타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경험이 개입됨으로써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본인은 자연이나 사물의 외형적인 형태를 기호화함으로써 본질적인 것을 드러내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 방식에 있어서 조금은 기하학적 추상과 닮아 있는 면이 있다고 하겠다. 이 반복되는 개체들은 모여서 어떠한 암호적 추상성을 띄면서 아름다움을 표현해 내고 있으며 이 또한 그들의 하나의 의미들이 모여 새로운 의미에 이르게 된다.
위로보다 시리즈를 통해서는 사람과의 관계, 외로움, 고독에 대한 물음과 고찰을 해보고자 한다.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인간 그 자체, 즉 그의 실재는 정의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항상 자신의 외부에 있는 무엇에 속하기를 욕구하며 그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개인과 사물로부터 분리되어 자기만의 고립 속에 놓이게 되는데 이러한 고립과 외로움은 사람과의 끊임없는 관계를 통하여 개선 또는 좌절되기를 반복한다. 이렇게 한가지만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물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세계 안의 대상을 욕구하는 사랑은 그것의 행복 추구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좌절을 겪게 된다. 이렇게 무언가를 갈망하는 감정은 그것이 계속해서 기대하는 욕구 대상이 현전하면 고요해 질 수 있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존재하는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사람이 있기에 사람과 사람이 있고 사람과 사람이 모여 세상이 생겨남의 연결고리가 있으며 이를 소유하고 박탈당하기를 경험하며 사람은 자신의 실존적 가치에 대해 되돌아본다. 세상에 있는 그들의 형상들. 그들은 개인적으로 실존하면서도 사회적으로 소속되어 있고 그 사회적 소속 안에서 실존을 경험한다. 그러나 개인적 실존과 사회적 실존은 간극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서로의 관계가 없는 세상은 의미가 존재하지 않을지, 과연 사람이란 존재가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지, 혼자 있음에는 익숙지 않아 외로움과 고독감을 느끼지는 아니한지, 홀로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있는지.....여러 모순되는 감정이 얽히는 가운데 실존에 대한 고찰의 중심에 놓인 ‘나’에 대한 것을 표현해 보고자 하였다.
사람은 혼자 살기도 하면서 혼자이지 않기도 하다. 혼자 있음에 익숙해질 즈음 다시 나 혼자 다른 세상에 가 있는 느낌을 느끼기도 한다. 혼자임에 익숙하였을 때 편안해 진다는 사실에 반은 공감하면서도 공감하지 못하는 이중적이고 모순되어지는 감정이 사람들의 마음 속 에서는 언제나 복잡하게 공존한다. 행복감 - 고립의 반대 상태 - 은 단순한 소속 상태 그 이상을 요구한다. 행복감은 사랑받는 자가 영구히 자기 존재의 내재적 요소가 될 때 비로소 성취된다. 한 순간, 한 들숨, 한 날숨에서라도 온전한 행복한 고요의 상태를 경험해 본다. 숲 속에 들어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나의 발걸음, 발아래 부서지는 낙엽의 소리, 돌을 밟았을 때 전해져 오는 미세한 통증, 나뭇가지가 뽀드득 부러지는 소리.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려 들리는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 혼자 걷고 있지만 혼자이지 않은 그런 곳에 있는 본인을 상상한다. 고독하면서도 편안하다. 항상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의 사랑을 갈망했지만 지금 이 순간 오롯이 혼자이면서도 혼자가 아닌 이 세상에 있는 당신을 느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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