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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민 · 송민규 展
Triva
플랜비프로젝트스페이스
2019. 12. 5(목) ▶ 2019. 12. 22(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가좌로 108-8
https://planbprojectspace.wordpress.com
박석민作_satellite 03_oil on canvas_60.5x73cm_2019
사소함에도 수사학(修辭學)이 있다. 다만 화려한 수사(修辭)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가만히 응시하던 사물이 덩어리져 얼룩이 되고, 사적인 감정이 작업과 밀착했을 때 일종의 무력감을 느낀다고 했던가. 매일(인 듯이) 작업을 지속하는 태도는 목적성을 수반한 특별한 아집 같은 것이 아니라 일상의 실천일 뿐이라고도 했던가. 시각적인 것은 텍스트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회화의 물성을 통한 작가들의 레토릭은 대상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고 역으로 무게를 두지도 않은 채 재창조된 실체 없는 이미지로 가공된다. 회화 자체의 자율적인 가치는 대상이라고 하는 자기 외적인 것에 완전히 예속됨으로써 상실된다고 하지만, 오히려 회화의 주제subject-matter를 개의치 않는 어떤 하찮고 사소한 풍경이나 일상의 한 조각으로서의 정물, 먼지 같은 것들은 조형적 어휘로 작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는 두 회화 작가 박석민과 송민규의 ‘트리비아’, 그저 당연한 것이랄지, 의미에서 거리를 두고 그려낸 사소한 것이랄지, 일각으로는 그렇게 하고, 되고 싶은 그림들을 위한 전시라고 해도 좋다.
“뭔가가 보이십니까?” 푸생이 포르뷔스에게 물었다. “아니. 자네는?” “아무것도요.” (발자크, 미지의 걸작 中에서)
발자크의 소설 속에서는 어느 늙은 화가가 자신의 아뜰리에에 고이 숨겨놓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이상하고 불분명한 혼돈의 그림을 보던 두 젊은 화가가 알아볼 수 없는 그 형상에 당황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작품으로부터 무언가를 읽어내야 한다는 사명감과 그 사명감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에둘러 표현한 것일 게다. 그래서 오히려 앞서 언급한 ‘그렇게 하고/되고 싶다’는 어찌 보면 회화 작가라는 정체성을 끌어안고 혹은 떠안고 이 시대의 흐름 속을 헤쳐 가는 여정이 조금 지친다는 표현일수도 있겠다. 이 시대는 미술관이 미술사에 적극 개입하며 큐레이팅의 상징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시대이다. (거의) 모든 예술작품은 주어진 전시의 주제와 공간에 융화하도록 재해석되고 재구성되던지, 아니면 처음부터 문맥에 편입되도록 촉구된다. 전시를 하나의 시나리오에 의해 완성된 작품으로 상정하면서 이미 오래 전부터 전시는 일종의 앵포르멜이자 퍼포먼스가 되었고, 수많은 작품들이 전시가 추구하는 이념을 위해서 생산된다. 사회의 모든 통념과 이념으로부터 무관한 고매하고 중립적인 예술작품을 생산하던 예술가들은 이 이념적이고 제한된 맥락으로 꾸려진 선택의 장으로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가 틀렸어, 잘 보게” 포르뷔스가 말했다. (발자크, 미지의 걸작 中에서)
이념의 맥락이라는 선택을 내려놓으면 우리는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을 더 잘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고, 당신을 위한 것도 나를 위한 것도,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그저 수많은 이상한 선들에 짓눌리고 혼란스럽게 쌓인 색깔들이 성벽 같은 그림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일지언정, 이미지의 양적 팽창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회화의 예배적 가치를 지탱하는 것은 그러한 성벽이며 누군가의 트리비아이다. 혹은, 예배적 가치 조차 사소함과 다르지 않은 것이 아닌가.
박석민作_satellite 04_oil on canvas_60.5x73cm_2019
송민규作_Drawing Trace Part A-84_Acrylic on paper_30×21cm_2019
송민규作_Drawing Trace Part A-93_Acrylic on paper_30×21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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