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호 · 금보성 展

 

허정호作_문자도1_30F_Acrylic ink on Canvas_2019

 

 

KATE OH GALLERY

 

2019. 8. 14(수) ▶ 2019. 9. 8(일)

50E 72ND STREET #3A NEW YORK NY 10021 | +1-646-286-4575 +1-212-452-3391

 

WWW.KATEOHGALLERY.COM

 

 

허정호作_문자도2_30F_Acrylic ink on Canvas_2019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케이트 오 갤러리에서 올해 8월 14일부터 9월 8일까지 한국 작가 금보성, 허정호의 2인전 Hangul and the Space Between이 열린다.  이번 전시는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이미지화시켜 한글의 미적요소를 극대화한 한글회화의 거장 금보성 작가의 평면 및 입체 작품과 돋보기로 확대해야 보일만큼 작은 문자들로 채움과 비움이라는 공간의 미학을 이야기하는 허정호작가의 회화 작품들을 선보인다.

 

금보성 작가는 서울문화재단, 여의도 국회의사당 등 국내외에서 현재까지 56여회의 개인전을 개최하며 30년 넘게 한글에 대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한글은 작가 금보성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도구이자,  우리나라의 역사와 이념이 담긴 매게체이기도 하다.  금보성 작가가 예술로서의 한글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작가가 시인으로 등단 후 문학 활동을 하기 시작한 20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집필 작업 중에 우연히 글에 색을 입힌 행위, 색 입은 글자들이 흥미롭게 보여 시각예술작업을 시작했다며 말하는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한글이 지닌 가치와 다양성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러한 작가의 노력은 한국의 예술을 발전시키는 데까지 이어져 있다.  서울 종로에 자신의 이름을 딴 금보성 아트센터를 운영하며 현재 활발히 작가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평면 한글 작업 외 함께 전시되는 입체 작품은 한글 ㅅ과 한자 人를 모양을 한 ‘방파제’이다. 기존의 콘트리트 방파제에서 형형 색색 원색의 컬러로 생동감이 가미된 방파제는 지진.전쟁.태풍 등 피해를 입은 개인과 국가를 지켜주며 함께한다는 평화와 희망의 메세지를 담고 있다.  

 

허정호 작가는 중앙대학교 및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후 추계예대, 중앙대, 백석대에서 강사로 활동하는 동시에 수차례 개인전과 그룹전을 거치며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다. 작가의 최근 문자도 시리즈는 한글이나 영문자로 구성된 텍스트가 선과 면의 요소를 를 대신해 캔버스에 자리한 도자기를 채운다. 작가에 따르면 도자기의 본질은 빈 공간이며, 작가의 작품은 채움과 비움 사이의 간극을 미학적으로 풀어낸다.

작가가 선택한 항아리는 채움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그릇이면서도 비어있음을 본질로 삼는 철학적 명제를 보여주는 것이다. ‘대영약충(大盈若沖)’ 즉 ‘큰 채워짐은 텅 빈 것과 같다’는 노자의 도덕경에서 발췌한 고사성어가 이를 잘 보여준다. 사물로서의 항아리가 아니라, 인식론적 개념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서 항아리의 입체감은 최소한으로 표현되었으며 이에 따라 표면에 새겨진 텍스트 이미지는 더 극대화 된다.

 

케이트 오 갤러리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가고시안 갤러리 등이 즐비한 뮤지엄 마일에 위치해 있으며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예약제로 운영된다.

오프닝 리셉션은 8월 15일 목요일 오후6-8이며, 예약자에 한에 가능하며. 예약은 이메일(info@kateohgallery.com) 혹은, 전화나 문자 (646 286 4575 , +1-212-452-3391 )를 통해 가능하다.  

 

 

허정호作_문자도3_30P_Acrylic ink on Canvas_2019

 

 

허정호作_문자도4_30M_Acrylic ink on Canvas_2019

 

 

글, 여백을 그리다

금보성아트센터

작가 허정호

평론 고연수

유하고 폭신한 시감각안에 담긴 치열

새하얀 캔버스에 말간 백자 달항아리가 둥실 있는 회화작품이 새초롬하게 비친, 작가 허정호의 작업을 첫 대면한 첫 느낌이다. 캔버스 안에 안정적인 구도로 안착되었다기보다 무심히 떠 있는 백자는 마땅히 가진 위풍스러운 모습으로 또렷하지 않지만 확실한 양감으로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다. 단지 선명하지 않고 보얗게 보이기에 작가가 의도한 재현의 방식쯤으로 간주한 뒤 습관처럼 작품에 성큼 다가가면, 시각예술을 대할 때 늘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는 해도 예상 밖 감각적 공격(?)을 가하는 작품을 향한 부지불식간 반응인, 나름대로는 점잖게 절제한 놀라움의 탄성은 여지없이 세어 나온다. 캔버스 안에서 구성된 선과 면은 획이 아니다. 코앞에서 간신히 식별되는 크기의 문자들은 일필휘지로 나열되어 선으로, 꼭꼭 새겨지고 심어져 채워진 면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작가 허정호의 글로 그리는 그림의 방식은 초창기 작업에서 이미 밀도 있게 시도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충실하게 속속들이 들어선 글들 위로 더 세심히 묘사된 정물화와 모사된 명작 등에서 당시 작가가 시각예술에 있어 재현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무겁고 치열하게 기술되고 있다. 극사실주의 방식으로 재현된 것들은 단지 작가 허정호가 채운 글들 위에 똑같은 명분과 가치를 지닌, 일종의 오브제로 얹어진다. 당시 시류에 따라 세밀한 사실적 재현의 전통적 방식으로 작업을 지속하다가 시각예술이 보이는 대로 구현해야하는 당위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한 것이다.

얼핏 조화롭게 위치해 있지만 사뭇 생뚱맞게도 보이는 탓에, 자칫 전통적 시각예술의 프레임에서는 의도적 낯선 배열방식 장치인 데페이즈망 정도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하지만 그와는 맥락을 달리 한다. 작가가 채워놓은 바탕에 얹힌 이미지들은 밀도 있는 서사위에 잘 보존되어진, 오히려 작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존중된 표식으로도 보이기 때문이다. 2003년까지 지속된 이런 작업 방식은 그 이후 단절되었고, 축적된 시간이 기록된 작업은 2007년까지 층층이 꾸덕하게 쌓여 강도 높게 펼쳐진다. 실제 작업노트를 통해 자주 언급된 시간과 기록의 개념은 작가에게 있어 그의 작업을 지속하게 하는 중요한 동력으로 보인다. 과거에는 본인의 일기나 신문사설 등을 캔버스에 필사하여 물리적⋅절대적인 시간 안에서 작가가 조형한 시간을 도려내 보인 작업이었다면, 가뜩이나 기이한 조르주 쇠라의 원작을 작가만의 방식으로 기이함을 더욱 보태어 재현한 작품을 포함해 그 후 글의 근원적 의미마저 서서히 삭제하고 변용시켜 글-씨-로 그리기 시작한다. 그의 말대로 시간의 과정 및 기록이라는 시선에서 그의 작업을 보면 가늠하기도 힘든 시간이 엉겁 되어 보인다. 신기함의 차원을 넘어선 이러한 행위의 작업자체가 작가 허정호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돌연 되묻고 싶은 지점이기도 하다. 예상외로 작가는 치밀하게 보이는 작업에 대해 느긋하고 편한 입장이며 작업의 행위는 평온한 일상일 뿐이라며 담백하게 고백하는데, 이는 그의 작업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단초가 된다. 고행이 동반되는 수행의 과정이자 힘겹게 얻은 결과라고, 작업실 한편에 촘촘히 세워둔 캔버스들의 옆면마저도 글로 뒤덮힌 되직한 작업들 품에서 작가 스스로 그의 작업에 위용을 과시한다하더라도 그게 크게 거슬린다거나, 반박도 불가한데 말이다.  

 

 

허정호作_문자도5_30M_Acrylic ink on Canvas_2019

 

 

작가의 시간은 거꾸로 몰입Flow된다.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에 의하면 몰입Flow은 시간의 흐름이나 공간 더 나아가 자기 자신조차 잊게 되는 심리적 상태를 말한다. 등산할 때 정상에 오르기 위한 목표가 행위를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닌 힘든 도전을 수행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존중과 경외심만 남은 상태, 그 행위와 자아가 동일시되어 마치 하늘을 나는 기분으로 긍정적 에너지를 발한다고 언급한다. 즉 행위자체에 골몰하고 심취해 있는 상태이자 의식의 질서가 최적화되는, 이를 최적경험이라고 정의한다. 작가 허정호의 작품에서 흘러간 시간이 빈틈없이 기록되면서 축적된 노고의 중량감이 여실히 육중하게 펼쳐져 있는 이면에 벅찬 부담감보다 집약된 산뜻함이 공존하는 특유함의 연유를 여기에서 찾아야 할 듯싶다. 익숙하고 뻔할 수 있는 개연을 반전시키며 유쾌해도 가볍지만은 않은 그 어딘가 혼돈 속으로 우리의 마음을 떨궈놓는 힘은 예술이 지닌 강력한 무기이기에, 자꾸만 높아지는 우리 시감각의 기대치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시각예술 그리고 창작자들에게 전가하고 싶은 마음은 예전부터 늘 한결같다. 그렇기는 해도 단순히 확연하지도 정확하지도 않은 시감각의 ‘모호함’이 뿜는 신비함이 전부는 아닌 그 너머에 진정 예술이게 하는 ‘실체’가 있는 작업일 경우, 마주한 자의 자격이자 권한일 수 있는 통찰의 힘은 우리가 지녀야 할 채비일 것이다.

중의적이고 모호한 경계에 위치한 작가 허정호의 작업이 묵직하게 중심이 잡히는 이유, 그의 작업 철학으로 노자老子 사상에 깊이 닻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 변혁기속에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길道을 천명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인간 내부에서 찾고자 한 공자는 '혼란'의 시대로 인지했으나, 노자는 '변화'라고 체감하여 세상 어떤 것도 절대적⋅보편적 가치나 기준이 될 수 없고 자연의 상태가 최상의 질서라고 좀 더 긍정적인 입장에서 사상을 포개어 내 놓았다. 거스를 수 없는 자연적 시간의 흐름 속에서 때론 그것을 견뎌내기 위한 인간의 행위가 절대적 가치를 향한다거나 이 세계의 일시적 현상인 ‘가유假有’가 목표가 아닌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어 작가만의 시간이 재정리⋅재질서화 된 것이며, 그러므로 작가 허정호의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몰입의 공간은 단순히 물리적 시간의 기록과 흔적은 아닌 셈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 <GEUMGANG MOUNTAIN> 시리즈에서 풍기는 첩첩산중 쌓여진 어마한 내공에는 곤궁한 집착이 걸러졌기에 되레 가뿐해지는 이유이며, 그가 고백한 본인의 심리적 여유가 그의 작업에서는 훨씬 더 깊은 여백의 풍미로 우러나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허정호作_문자도6_30P_Acrylic ink on Canvas_2019

 

 

여백, 풍만하고 안정적인 모호

2008년 이후 본격적으로 우리작품들로 작가의 시선이 옮겨지면서 자연의 모습이 담긴 자기磁器들에 한글과 영어가 혼용되어 캔버스에 차곡차곡 쓰인다. 입호立壺 형태의 항아리  <FREEDOM>, <MONEY>, <TIME>, <PASSION>등과 주병 <LOVE>, <GOOD>과 사발 <용서하소서>, <비나이다> 등 우리 작품들은 작가 허정호의 글자들로 성형된다. 원래 지닌 이름과도 상관없을뿐더러 오히려 기능에 따른 다양한 형태들과 그 안에 담긴 자연의 모습들이 작가 허정호의 글자들로 의미가 더욱 견고하게 다져지기도, 우리에게 익숙한 해학과 풍자는 작가만의 문자화된 코드로 색다르고 흥미롭게 읽혀지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좀 더 세밀히 들여다보면 형태의 틀을 잡아 안을 채워 형상을 구축한 것이 아닌 캔버스의 바탕을 문자로 채워 주제의 형태가 성형되는 방식에서 재현의 문제를 넘어선 공간에 대한 연구가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근래에 작가가 몰두하고 있는 작업 중 백자 달항아리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 진귀한 유물로서 귀히 여김을 받지만 실은 우리의 삶이 담겨져 품고 쓰인 도구임을 감안할 때 이것이 지닌 중의적이고 묘한 간극이 작가 허정호의 갖가지 언어와 문자의 표정으로 덧읽혀 품위의 진폭을 넓히고 있다. 유교를 바탕으로 성리학 문화가 발화된 진지하고 엄중한 백자를 캔버스에 오브제로 담은 채 심연의 슬픔을 자아내거나 재치 있는 농으로 버무리기도 하는 과감한 행위는 본질보다는 관계로 세상을 바라본 도가의 노자 사상이 작가에게는 뒷심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레로 빚어 성형되는 제작과정과 처음부터 한 덩어리의 몸체가 아닌 상하 따로 모양을 잡은 뒤 인공적이고 자연적인 적절한 가압의 조율로 접합되는 달항아리의 태생과정상, 관조되는 미묘한 골곡진 흔적의 형태와 그 빛깔에 작가 허정호의 몰입이 더해져 다양한 표정들로 캔버스에 떠 있다. 문자가 함유한 뜻을 지키고 있는 글과 그려진 글씨들은 합을 이루어 때론 기발하게 상충되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때론 우회적이고도 강한 직설적 화법으로 촌철살인하는 듯하다가도 다정다감한 격려의 말로 다독여주기도, 오브제가 지닌 보편적 정서에 암호 같은 글씨조합으로 당혹스런 혼란의 감흥 속으로 우리를 역시 떨구어 놓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작가는 보는 이의 시선대로 통찰하고 ‘사유’하길 바라는 심정을 작업을 통해 슬쩍 종용한다.

촘촘하지만 얼기설기 틈이 섞인 글씨들로 서로 오밀조밀 뒤엉켜 질서를 이루며 성형된 작가 허정호의 자기瓷器들은 현실에 안정감 있게 정착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마치 하늘의 공기 빛깔과 구름은 그 자체가 실상이 아닌 여러 요인들이 얽혀져 이루어진 ‘가유’의 현상인 듯, 세상 모든 것이 평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얽힌 관계에 의해 엮어진 가변적 무게는 작가 허정호의 작업에서 그대로 느껴진다. 충만함이 가뿐히 들리는 공간을 품은 기器로서의 달항아리의 품성과 치밀하게 채워져 있으나 바스라지거나 어딘가로 훌쩍 미련 없이 떠날 듯 긴장감서린 작가 허정호의 작품 분위기는 ‘모호하게 닿아있는 지점’이기도 할 것이다. 대상을 표현하기보다 공간을 그린다는 작가는 어떠한 것을 존재하게하기 위한 비어있는 공간無을 마련하고 채우고 있다. 초창기 작업에서 치열하게 고심했던 재현과 시간과 기록의 개념들을 짐작컨데 집요함으로 풀 것이라는 예상을 정확히 빗겨간 반전, 오히려 가늠조차 불가할 것들을 담기 위한 빈 공간으로 채우고 있는 듯 보인다. 그래서 그의 작업에는 어쩌면 상상보다 훨씬 더 깊은 ‘유무상생有無相生’의 여백이 마련될 것 같은 짐작이 서서히, 점점 더욱 깊이 드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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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90814-허정호 · 금보성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