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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구 展
" Letters "
OCI미술관 1층
2018. 6. 7(목) ▶ 2018. 7. 7(토)
서울시 종로구 우정국로 45-14 | T.02-734-0440
www.ocimuseum.org
전병구의 전병구
“제가 보기에 현대 세계에서 인간 실존의 복잡성을 포착해 내기 위해서는 생략과 압축의 기법이 요구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끝없는 장황함의 함정에 빠지게 되고 말지요.”
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중에서
빠른 호흡으로 얇게 펴 바른 색채와 화면을 지배하는 편평함이 그림의 내용보다 먼저 내 시야로 들어온다. 그림에 대한 첫인상의 흔적이 사라질 즈음 다시 그림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얕지만 단순치 않은 색채의 조합과 마치 세상의 소리를 몽땅 흡수한 것 같은 정적이 가슴으로 밀려온다. 촉촉하지도 그렇다고 건조하지도 않은 상태의 질감은 비인칭적이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특유의 멜랑콜리는 머리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전병구의 그림이 실재인지, 허구인지, 직접 본 세상인지, 모니터 속 이미지인지를 식별하기란 쉽지 않다. 간혹 차이를 구별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이 갑작스레 작품의 의미를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때론 그림의 제목에서 단서를 찾기도 하고 어디에서 본 듯한 장면을 떠올리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이런 단서들이 다른 그림에서도 적용될 것이라고 확신을 가지는 건 무의미하다. 전병구는 의미를 담보하지 않은 일상의 일부,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이미지를 그림으로 옮긴다. 그러나 재현의 정확도, 이미지의 기호 등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전병구의 그림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 것일까? 다소 성급하지만 나는 전병구의 그림에서 전병구를 발견한다. “터미널의 남자”(2015), “Sugar”(2015), “Untitled”(2016), “편지”(2016),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6), “기댄 남자”(2017) 등. 여기까지는 그림 속 남성의 모습만 고른 것이지만, 실제로는 풍경, 새, 야구 경기장, 여성에게서도 전병구를 느낄 수 있다. 작가의 실제 모습과 그림 속 인물이 닮아서가 아니다. 그림이 지시하는 것과 그림을 느끼는 것은 다른 영역의 감상이다. 내가 그의 그림에서 느끼는 감정은 이미지의 외연과는 무관한 것임에 틀림없다.
전병구의 초기 그림들(2012-2013)은 일상의 주변에 관한 것들이었다. 자연스레 그의 고단한 삶이 그림 안으로 들어왔다. 주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모습이 화면 안에 담기기 시작했다. 일하는 과정, 쉬는 시간에 하릴없이 휴대폰을 뒤적이는 그 짧은 순간에도 왠지 권태가 포착되었다. 포장 박스들로 어지러운 공장 한구석에 피신하듯 몸을 누인 또래 동료가 단잠에 빠진 장면은 달콤하기보다는 씁쓸하다. 도대체 인생이 누구의 것이기에 그림 속 여러 명의 전병구는 빛바랜 색채들로 이뤄진 내일이 없을 것 같은 모습을 한 채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일까? 그나마 위로를 받는 건 가끔 시내로 나와 갤러리나 미술관에 들르는 게 유일했다고 한다. 전병구는 그곳에서 또 다른 전병구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반드시 화가가 되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또 다른 자신을 발견했다기보다는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피안인 그림이란 세계를 자신이 원하고 있음에 대한 자각이 일어났을 것이다.
조금 더 과거로 들어가 보자. “1996”(2013) 연작은 전병구가 그림 그리기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굳이 아픈 과거의 기억을 들추어내어 그곳으로부터 창작의 원천을 고를 수 있는 건 예술가만의 특권이다. 그들은 기억과 시간을 자신의 요청에 따라 자유자재로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신비는 아니고 그만큼의 대가도 치러야만 한다. 왜냐하면 기억의 시간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상처를 마주 보아야 하는 순간이 도래하기 때문이다. 막다른 골목에서 마주한 진실 앞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눈을 감기 마련이다. 우리는 마주한다고 표현하지만 그것은 이미 시각의 차원을 벗어난 상태로 마주함은 보는 행위를 넘어선 느낌의 순간일 것이다.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의 등장은 사고(思考)의 기능과 감각을 마비시킨다. 그처럼 기억과 시간의 문지방을 넘기 위해 누군가는 글을 쓰고, 술을 마시고, 밤바다를 향할 것이다. 전병구는 그렇게 어린 전병구의 기억과 이별한다. 우리는 잊기 위해 기록한다. 이미지는 그렇게 기억과 상처를 대체한다.
아무리 설명해도 도무지 이해를 시키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특히 자신의 삶에 대하여 타인의 이해를 얻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오늘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세계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우리는 아침에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살아갈 기운을 얻기도 하고, 지나가는 행인의 어두운 낯빛을 보고 어색한 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나 없이도 세상이 잘 돌아갈 것이란 사실을 재차 자각하는 순간 공허함이 밀려오는 걸 막을 길이 없다. 전병구는 그렇게 단절되고 이질적인 것들로 혼합된 세상의 파편들을 관찰한다. 무한의 이미저리 속에서 어떤 찰나를 포착하고 이 장면은 그림이 된다. 최근 들어 전병구는 그림들이 어떤 서사적 흐름이 만들어지는 걸 배제하는 편이다. 각 그림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는 문맥을 없앴다기보다는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이미지만의 세계에 집중하고 있다는 표현이 보다 정확할 것 같다.
의미의 비움 전병구의 그림에서 전병구를 발견했다는 말은 그의 그림이 특정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는 대신 그림이 뿜어내는 (추상적인) 정서가 더욱 두드러진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그림이 그려지는지는 과정은 어떠할까? 우선 일상의 일부를 발췌한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발췌 대상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이미지들이다. 발췌한 이미지를 그림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원래의 맥락은 상실된다. 재현의 과정은 역설적으로 의미를 비워내는 과정에 더 가깝다. 그렇게 형상의 의미가 지워진다. 지우기 위해서 그리는 셈이다. 실패의 미학을 추구한 사뮈엘 베케트는 반복적으로 실패하라고 말했다. 이는 언어로부터의 해방에 관한 사유이다. 베케트는 평생 언어로부터의 도피를 좇았고 결국 실패했다. 그러나 그렇게 문학이 탄생했다. 즉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보다 글 자체를 보여주고 읽고 다시 쓰고 말하게 하는 데 주력한 것이다. 우리에겐 주어진 언어가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그 언어를 사용하여 우리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 언제나 자신과 자신에 대한 재현/표현은 배반적이고 불일치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동시대의 예술가들과 철학자들은 문법을 해체하고 다시 쓰고 읽기를 반복하면서 언어로부터의 짜릿한 탈주를 감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미가 비워진 그림에는 무엇이 남아있을까? 전병구의 그림은 전병구의 성격, 태도, 자세, 기분이 스며들어 있다. 그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은 바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이다. 무엇을 그리든, 어떻게 표현하든, 전병구의 그림에는 전병구의 ‘존재’가 기입된다. 베케트의 실패를 전병구의 그리기 실천과 연결해보자. 그가 얼마나 부조리한 상태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를 떠올릴 수 있다. 이미지와 형상이 있지만 결국 텅 빈 상태의 그림이 남는다. 그는 현실의 요구에서 벗어나 오로지 그리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싶다.
언뜻 조르조 모란디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그도 그럴 것이, 전병구가 가장 동경하는 화가가 바로 모란디라고 한다. 모란디는 회화의 세계에 살기 위해 처절하게 투쟁한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소박한 정물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모든 소란이 숨을 죽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전병구도 바로 그 순간을 찾아 그리기에 집중한다. 얼마 전 전시부터는 배치에 의한 내러티브가 생성되는 것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오롯이 하나의 그림에만 집중하도록. 그는 더 깊숙한 그림의 세계로 들어가려 한다. 마지막으로 베케트의 소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에서 발췌한 문장을 남긴다.
“(……), 그 모든 작은 덩어리들이 바로 나야, 내가 어디를 가건 간에 나는 나를 다시 발견하고는, 나를 버리고, 나한테로 가서는, 나한테서 나오거든, 결국 다 나인 거지, 되찾고서는, 잃어버리는 바람에, 사라져버린, 나라는 작은 한 조각일 뿐인 거야, 단어들, 내가 그 모든 단어들이야, (……).”
정현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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