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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욱 展
" 산의 바깥, 바다 너머 "
갤러리 담
2018. 6. 5(화) ▶ 2018. 6. 17(일)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7-1 | T.02-738-2745
www.gallerydam.com
씨앗으로부터 우주까지 변신하는 자아
이강욱의 작품에는 식물, 동물, 광물, 하늘과 바다까지 다양한 계가 등장한다. 어눌한 표현방식 때문에 아이의 순진한 그림이 생각나는 그의 작품은 대상에 대한 정확한 재현에 충실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보고 느낀 바를 전달하는 데는 이상이 없다. 작가는 작업에 무의식이 최대한 발휘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그의 말대로 ‘바람한 점, 풀 한포기’에서 얻는 영감은 매우 크고, 그것은 작품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전 전시에서 ‘풀 한포기’ 얽힌 상상력이 피어났다면, ‘바람 한 점’은 이동하는 동물들이 등장하는 이번 전시에서 발견된다. 평평하게 채워진 바탕에는 대상을 감쌌던 공기, 즉 분위기가 전달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지속되는 맥락이지, 어떤 특별한 국면의 단편은 아니다. 움직이지 않는 그림은 단편이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굳어진 파편이 아니라, 생략된 앞뒤의 함축을 통한 일련의 서사를 가진다. 간략한 표현방식이 특징인 그의 작품에서 형식은 큰 위상을 차지 하지만, 그것은 예술언어의 자족성을 위해 세계를 괄호 치는 형식주의와는 구별된다. 작가는 예술에 대해 ‘그 시간을 온전히 내 시간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작업을 통해 작품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그림 안의 공기와 색감에 빠진다. 온갖 화려한 스펙터클이 대중의 눈을 현혹하는 가운데, 예술은 이러한 내재적 차원을 통해 자신의 차별성을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만든 세계지만 거기에서 또 다른 나, 즉 다양한 타자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작품에 들락날락 할 수 있는 사람, 즉 예술가의 특권일 것이다. 작가는 그림을 통해 뻔 한 일상을 탈출한다. 예술이라는 또 다른 차원을 통해 일상의 다른 결을 발견한다. 이강욱의 경우 다른 사람들도 같이 볼 수 있는 어떤 대상의 표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되는 것에 있다. 카프카적인 변신은 오늘날 겉보기의 자유로움 뒤에 더욱 결정론적 작용하는 시스템화 된 현대사회를 탈주하는 작가의 방식이다. 탈주는 산 넘고 바다 건너, 그리고 창공을 통과해 우주까지도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대개 제자리에서 하는 탈주이다. 단편과 단편이 난데없이 이어지곤 하는 이강욱의 작품은 탈주를 위한 변신의 한 방식이다. 변신하는 존재는 대지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나무같이 체계적이지 않다. 그것은 풀과 더 가깝다. 풀의 뿌리는 지층 바로 아래에서 서로 얽혀있다. 자연은 예술처럼 ‘창조’가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지만, 어떤 예술가적인 철학자의 말대로 ‘창조 또한 발견되는 것’(니이체)이다. 자연이 이미 실행하고 있는 것을 인간은 단지 발견할 뿐이며, 발견 또한 일부일 뿐이다. 인간의 신화적 상상력부터 동양 고전 [산해경]까지, 그리고 현대의 작가 보르헤스의 [상상 동물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기괴한 상상력은 자연의 파편을 재구성한 것에서 나왔다. 이강욱의 저 너머 바깥에 서식하고 있다고 상상되는 동물들에서 괴기스러운 면은 별로 없다. 그의 작품에서 상상 동물은 제압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것, 자기 내부의 타자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작품 속 동물들은 작가가 했을 법한 행동을 한다.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주사위 놀이는 예술에서도 실행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실행에 돌연변이, 실험 등의 명칭을 부여한다. 이번 전시의 부제 [산의 바깥, 바다 너머]는 식물보다 더 넓은 행동반경을 가진 존재를 등장시켜 ‘바깥’과 ‘너머’를 상상한다. 형식상의 변화는 ‘바깥’, ‘너머’라는 공간적 상상과 관련된 배경이 들어온 점, 그리고 그 배경을 채우는 붓질이 보인다는 점이다. 그것은 공간적 이동이라는 상상에 내재된 시간성을 조형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화면에 남아있는 붓의 궤적은 바로 시간성을 말한다. 작품은 자신 속의 타자적 존재가 변모하는 장이며 선택지는 무한하다. 특히 그가 현대미술의 전범들이 아니라, 주로 자연을 참조한다는 것, 또는 자연에 가까운 역사인 고고학, 또는 자연과 잘 어우러졌던 시대의 상상력이 결집된 [산해경]같은 고전을 참조하는 대목이 그렇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적 원천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는 않는다. 재현이 온갖 종류의 생산과 관련된다면 진정한 예술은 생성이다. ‘너머’와 ‘바깥’을 지향하는 이강욱의 전시에서 생성은 미지의 것, 즉 ‘되기’를 말한다. 이때 자연은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 되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작품에 대입하자면 식물 되기, 동물 되기 등이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변치 않아 보이는 광물조차도 광물이 되어야 한다. 자명한 출발점은 없다. 욕망을 따라 이동하는 과정에서 되기가 실행된다. 소유와 소유의 또 다른 형태인 소비가 직업이라는 기계적 반복을 요구할 때,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러한 시스템에서 벗어나 있는 작가는 오직 자신만을 대상으로 되기의 실험을 감행한다.
이선영(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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