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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대리만족의 상관관계 Desire and Vicarious Satisfaction
스페이스 캔
2018. 5. 10(목) ▶ 2018. 5. 31(목) 서울특별시 성북구 선잠로2길 14-4 | T.02-766-7660
인간의 욕망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연구는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정신분석윤리의 “네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라는 명령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욕망에 대한 긍정적 태도는 그 급진성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당혹감을 선사할지도 모른다.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추구하라니 이것이 과연 ‘건전한’시민에게 어울릴만한 윤리인 것인가? 사실 욕망은 흔히 윤리나 선(善)의 대척점으로 여겨져 왔다. 종교적이나 철학적 관점에서 욕망은 인격도야에 요구되는 덕업을 수양하는데 장애물로 여겨졌을 뿐이다. 더구나 개인의 사적욕망 따윈, 공리를 달성하기 위해 마땅히 제거할 대상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그러나 라캉은 당연시되는 상식적 윤리를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그러한 윤리를 ‘권력의 질서’를 정당화하고 유지하는데 기여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도덕적 '선'과 경제적 '효용성'에 바탕을 둔 권력의 윤리라는 것은 다른 욕구, 소수의 욕망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더구나 윤리와 다수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지배질서에 순응할 것을 강요해왔다. 다수의 욕망과 배치되는 이질적인 개별 욕망들은 공동체의 이익에 반하는 '쓸모없는' 욕망이고 따라서 도덕적으로 악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윤리는 결국 기존 질서의 현상유지에 기여하는 체제 순응적인 윤리로 전락하고 만다. 앞에서 언급한 체제 순응적 윤리가 개인의 욕망을 억제해온 것은 역사적으로 집단주의사회체제에서 살펴볼 수 있다. 때론 개인의 생명까지도 그릇된 집단의 욕망으로 인해 희생되었던 시대가 인류사에 대부분을 차지한다. 현대사회에서 이런 문맥에 따라 권력에 위협적이고 파괴적이며 비타협적인 욕망을 긍정하는 정신분석의 윤리는 급진적인 정치성을 띠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변화와 새 출발을 요구하는 정치적 실천으로도 이어진다. 세상에는 욕망하고 싶은 수많은 것들이 존재하나, 현대인들이 충족할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다. 갈수록 팍팍해지는 경제상황과 양극화 속에서 이러한 현상은 더더욱 가속화되는 추세이다. 라캉은 결핍은 욕망을 야기한다고 말한다. 상징계 안에 ‘빈 구멍처럼 결여된 실재’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계층 간 소득격차가 증폭되는 양상에서, 욕망의 눈높이가 상승하는 것과 결핍의 양은 정비례한다. 그러나 매스미디어를 통한 소비의 유혹은 거부하기 힘들다. 그러한 와중에 사람들은 ‘대상행동(substitute behavior)’ 즉, 한 목표가 어떤 장애로 저지되어 그 목표달성이 불가능 때 이를 대신하는 다른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처음에 가졌던 욕구를 충족시키려 한다. 본래의 행동과 그 유사도가 다른 각종 대상행동이 있을 수 있다. 또 유사도가 크면 클수록 만족을 주는 대상의 정도, 즉 ‘대상가(代償價)’도 커지게 된다. 현대사회의 고도의 기술발전은 그 ‘대상가’를 고양시켜 본래의 욕구를 넘어서 전도(顚倒)되는 현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인간의 기본적 욕구인 식욕은 ‘먹방’이란 콘텐츠로 치환되어 사회현상이 된 것이 그 일례이다. 그 외에도 성욕, 물욕, 유희욕 등 다양한 욕구가 가상·증강현실 같은 테크놀로지등을 통해 사람들의 무한한 욕구를 대체한다. 나아가 인간이 충족하고자 하는 자아실현 역시 다른 방식으로 충족할 기제를 찾아 나아간다. 앞서 언급한 ‘권력의 윤리’라는 명제 하에 억눌려왔던 개인의 욕망은 갖가지 기묘한 대리만족적 형태로 발현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캔 파운데이션은 상관관계 전시시리즈를 기획하였고, 그 두 번째로 ‘욕망과 대리만족’라는 주제를 통해 개인의 다양한 욕망 실현을 현대미술의 문법으로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타진해 보려한다. 정연두, 신제현, 이빛나 3인의 작가들의 작업을 바라보며, 집단 혹은 권력의 윤리에서 벗어난 욕망의 충족은 어떠한 방식으로 대체될 수 있을까? 그러한 물음을 던져보며, 그 내밀한 속사정에 위치한 현대인의 고민을 엿보고자 한다. 1층 전시장에서는 신제현 작가의 작품을 선보인다. <디오티마 디오라마>시리즈는 가상의 사랑을 다루는데, 이는 현실에서 이뤄질 수 없는 이성과의 사랑을 꿈꾸는 것이다. 작품의 제목에 나오는 ‘디오티마’는 허구의 인물로서, 플라톤의 『향연(Symposium)』에 등장한다. 플라톤은 디오티마(제우스의 보배)라는 가상의 무녀의 신탁을 통해 그녀의 입을 빌어 사랑의 본질에 대해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에로스를 동경하기 때문에 최고의 신이라 칭송한다. 그러나 디오티마는 에로스가 영원한 사랑을 갈망하며 사랑에 결핍된 존재이기에, 신이 아니며 최고가 아니라며 평가절하 한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에로스를 찾는가. 디오티마는 인간이 언젠가는 죽는 존재라 말한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분신인 후손을 남기기 위해 육체적 사랑을 갈구하게 되고 이를 이어주는 것이 남녀간의 에로스라는 것이다. 디오라마 작품에서 이루지 못한 이성과의 연애를 통해, 사랑이란 욕망을 대리만족하고자 한다. 그런데 가상의 사랑을 다루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이 사랑을 갈구하고 연인이 되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은 곧 픽션, 마치 무대 위의 한편의 연극과도 같기 때문이다. 인간은 예술작품을 통해 사랑은 마치 무엇이든 초월할 수 있는 신화로 구축해왔다. 그러나 사랑은 사실 육체를 통한 인간의 생식을 아름답게 포장하기 위한 기제일 뿐이고, 남녀가 만나 열정적 사랑을 나누는 것 또한 단지 도파민 호르몬의 유효기간에 따라 좌지우지될 따름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디오라마 설치작업으로 이러한 불편한 사랑의 본질을 들춰내는 한편, 평면작품에서는 사랑의 호르몬처럼 퇴색되어가는 사랑의 추억들을 표현한다. 석고판넬 위에 뿌려진 잉크젯 프린트 사진은, 처음엔 선명한 색으로 아름다운 사랑을 표현하겠지만 전시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점차 색은 탈색되고 아련한 추억처럼 희미한 흔적만을 남길 것이다. 이 또한 현실 속 사랑의 덧없음을 말하며, 이를 바라보는 것 또한 대리경험의 범주에 속할지도 모른다. <발화하는 단어들>이란 작품 제목의 ‘발화(發話, Locution)’는 사람이 말하는 단어의 연속을 지칭한다. 특히 담화에서 앞과 뒤가 침묵으로 구분되어서 일정한 독립성을 갖는 단어 연속을 뜻하는 것이다. 발화는 어떤 의미를 가진 문장을 말하는 것과 관련되고, 하나 또는 둘 이상의 문장을 포함할 수 있어 분석의 출발점으로 간주된다. 인간이 언어를 통해 성취하고자하는 정보전달, 부탁, 명령, 설득, 격려 등을 의사소통 의도(communicative intention)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의사소통 의도를 실현시키기 위해 무언가를 말하는 것으로 그 무언가를 행하게 될 때, '무언가를 말함'의 행위가 발화 행위(speech act)라고 한다. 영국의 철학자 존 오스틴(John. L. Austin)에 따르면, 발화를 하는 것이 참과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행위라는 것, 즉 우리가 말로써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작품에서는 나체의 남녀가 혀를 이용하여 상대방의 육체에 초콜릿 글씨를 써내려가는 움직임이 보인다. 사실 작가는 초콜릿 글씨를 핥아먹는 모습을 역으로 재생함으로써 마치 혀로 메시지를 남기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혀는 입과 함께 음성언어를 하는 신체기관이지만 이 영상에서는 초콜릿 글씨로 여러 단어들을 발화한다. 그것들은 매우 육감적이며 물욕적이다. 게다가 현실에서 그것들은 실현하기 힘든 욕망들이다. 그러한 욕망하는 대상을 핥아먹음으로써 짧은 미각적 즐거움과 함께 대리만족을 하는 것인지, 혀로 욕망의 대상을 써나감으로써 관능적 욕망을 더욱 발화시키는 것인지, 작가의 작업은 이렇게 우리에게 묘한 흥분과 혼돈을 선사한다. 2층에서 하나의 쇼룸을 꾸며놓은 곳은 이빛나 작가의 공간이다. 작가는 욕망에 대한 대리적 만족을 수단으로 하여, 작업의 추동력을 얻는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나 욕망을 인형과 같은 대상으로 치환하여 소유하고자 하는데, 작업에 등장하는 남성의 모습은 마치 조립된 피규어의 형상이다. 최근 현대미술에서도 하나의 경향으로도 대두되는 키덜트나 오타쿠 서브컬쳐는 개인의 욕망을 내면적으로 표출하는 하나의 사회현상으로도 전개되고 있다. 한 때는 성장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의 퇴행적 양상으로 여겨졌으나 현재는 하나의 문화현상으로서 자리잡아가고 있다. <Save as ‘Pick me up’> 이란 제목의 회화에서 상품화된 남성상을 살펴볼 수 있다. 모방송의 인기 쇼 프로그램에서 시청자가 직접 마음에 드는 아이돌 멤버를 뽑듯 도구화된 인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작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의 인격이 제거되고 도구화되는 모습을 보며 껍데기만 유사한 인형이란 형식을 발견한다. 이러한 깨달음에서 인형이란 물질에 감정이 이입되고 이는 곧 집착으로 귀결된다. 현실 속 갖가지 결핍은 다른 형태의 집착으로 이행되는 데, 특히 작가는 인형 뽑기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인형뽑기는 쉽사리 획득할 수 없는 난이도로 사람들에게 일종의 오기를 북돋기도 한다. 그 어려운 난이도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나름의 비법을 터득하여 뽑아낸 인형들에게서 말할 수 없는 성취감을 얻었다고 토로한다. 뽑아낸 인형을 변형하여 제작한 헌팅트로피 작업시리즈 <Save as ‘Dolling’>은 마치 사냥이란 행위를 연상케 한다. 북유럽에서 사냥감의 머리나 가죽 등을 자랑스레 벽면에 걸어 뽐내는 것을 헌팅트로피라 한다. 이는 단지 사냥을 통해 식량을 구하는 행동에서 나아가 일종의 오락이자 자신을 과시하는 행위임이 다분하다. 그러한 지점에서 작가는 복잡한 다층적 욕망의 대리만족의 행위로서 주위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인형뽑기를 택한다. 이는 인형획득이라는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인형을 뽑아서 성취감을 얻는 행위가 중요시되는 본말전도의 현상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작가의 작품들이 전시된 쇼룸은, 인테리어라는 명목으로 삶의 공간에 자연스레 인간의 욕망이 투영되고 있는 사회현상들을 암시한다. 2층 전시장에서 한 파트를 차지하는 곳에 정연두 작가의 작품 ‘사랑의 룰렛’이 있다. 이 작품은 태권도, 레슬링 등 올림픽에서 벌어지는 대결 스포츠를 소재로 한다. 올림픽은 픽션이 아닌 생생한 현실이지만나 작품에서 설정된 상황은 모든 것이 픽션이다. 또한 배경의 모든 관객은 정지되어 있으나 360도 회전하는 카메라를 통해 보이는 두 선수의 모습은 생생하기 그지없다. 작가는 올림픽 격투기 종목 선수들의 동작을 ‘싸움’이라기보다 하나가 되기 위한 ‘사랑’의 행위로 해석하였다. 잔잔히 흘러나오는 사랑의 독백(픽션)은 두 사람의 내면을 극대화하여 보여주며, 올림픽 경기라는 현실과 기묘하게 뒤틀리며 관람자에게 낯선 경험을 선사한다. 시적언어로 흘러나오는 독백은 지극히 혼재된 정보들을 관객에게 제시한다. 그 내용들은 때로는 그 운동경기를 설명하는 것 같기도 하나, 진득하게 내밀한 개인적 감정을 서술하기도 한다. 상대방에 대한 애틋한 연민을 내비치며 사랑을 암시하면서도, 한편으로 날카롭게 꽂히는 상대방에 대한 독설은 애증의 감정을 대변하기도 한다. 결국 룰렛의 탄환이 발사된 듯, 죽음에 대한 언급과 함께 종말론적 세계관을 형성하며 한편의 드라마는 이렇게 완성된다. 우리는 사랑하는 상대에게서 다양한 감정을 발견할 수 있다. 극도의 행복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반면 극도의 슬픔이나 분노를 느낄 수도 있다. 스포츠 또한 마찬가지이다. 상대에게 승리함으로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얻기도 하지만 패배함으로써 말 못할 절망과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작가는 그러한 지점에서 스포츠 경기에서도 사랑과 유사한 감정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를 바라보는 관객들 또한 선수에게 감정이입하여 유사한 감정을 대리 체험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작품 속 독백의 내용처럼, 사랑이든 스포츠든 모든 것이 한때 감정처럼 소멸되는 바니타스를 느끼며 결국 영원함은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 전시의 작가들은 각각 다채로운 미디어를 이용하여 인간내면의 섬세하면서도 복잡한, 때론 이기적인 욕망의 형태들을 연출한다. 관객들도 다양한 욕망과 그에 대한 해소, 만족, 혹은 당혹감을 전시를 통해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한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욕망 실현은 기존의 권력과 체제, 혹은 윤리와 어떠한 관계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또한 대리 만족은 그 관계 사이에서 어떠한 화학작용을 할 것인가. 이렇게 대리 만족이 기존의 질서와 개인의 욕망을 절충하는 매개자로서 작동할 것인가는, 지속적인 질문과 고민이 요구될 것이다. 큐레이터 신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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