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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령 초대展
2018. 5. 1(화) ▶ 2018. 5. 9(수) 서울시 종로구 평창36길 20 | T.02-396-8744
김예령의 생명나무- 인류의 보편적 꿈과 소망
감윤조(예술의전당 큐레이터) 1. ‘모든 회화는 자연을 그렸다기보다는 자신의 감각을 그린 것이다’. 수많은 작가들은 이러한 명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운명에 처해왔다. 실상 화가란 같은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는 이들이다. 개별적 환경과 사유, 그리고 철학과 종교에 따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선천적으로 감각이 서로 다른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김예령 작가의 예술적 촉수는 어디로 향해있을까? 그의 더듬이로 파악하는 세계란 어떤 곳인가? 이러한 질문은 그의 작업세계를 이해하는데 유효하리라 본다. 그는 대상의 충실한 재현에는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보다는 형태를 단순화시키는 것에 더 익숙해 보인다. 이 말은 작가의 눈이 외부에 가있지 않다는 뜻이다. 대상은 빌되, 내면에 관심이 더 크다. 때문에 그의 작업은 자연의 구조적 질서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가 선택한 것은 아동화 같은 단순성이다. 대개 사물을 단순화한 작품 앞에 마주한 독자는 그 속에 담긴 함의를 읽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김예령 작가의 경우 그 과정이 지루하거나 어렵게 다가오지 않는다. 친근하기 때문이다. 진부할 수 있는 소재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화가도 몫이다. 김예령 작가는 우리 주변 익숙한 풍경을 왜 다시 불러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기에 앞서 잠시 우리가 처한 정황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인류의 역사는 일찍부터 일을 어렵게 만들어갔다. 유혹과 탐욕 그리고 시기질투와 다툼. 이 상황의 역사적 반복. 요컨대 실낙원에서 인류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끝없는 갈등의 생산이었다. 그나마 꿈과 희망이라는 단어가 살아나게 된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다. 김예령 작가는 사람들이 눈감아 온 감성을 회복하고자 말한다. 우리의 삶을 재발견하자고 제안한다. 방법적으로 그는 자신의 일상적 요소를 수집했다. 자잘한 일상사들이 모여 인격체를 이루듯이 사소한 주변을 결합시켜 작품으로 연결시켜내고 있다. 여기 소개하는 작업은 어쩌면 인생의 변곡점들을 지난 화가에게만 가능할지도 모른다.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자신만의 풍경이기에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다. 김예령 작가에게 있어서의 자연대상은 사생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지성의 영역이다. 나아가 영적영역에 해당한다. 창조주의 피조물들은 예술가들에게 늘 경이로움의 대상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움직임이 아름답고, 하늘을 나는 새도 경이롭다. 아이와 함께하는 강아지조차도 충분히 놀라운 존재다. 그는 우리가 감았던 눈을 뜨길 원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요청한다. 저 하늘을 나는 새를 바라보자. 저 한그루의 나무, 저 뛰노는 아이에게도 눈길 한 번 주자. 그의 작품을 유심히 살펴보면 아기자기한 삶의 파편들이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삶의 에피소드를 다루는 이야기꾼이 되었다. 그는 잠시 앉아서 여기를 바라보라고 권유한다. 저 작은 피조물에 대한 경이로움에 감사하자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작품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2. 화가가 익숙함에서 빠져나오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창작에 필요한 재료나 기술적 테크닉은 말할 것도 없고, 작품주제나 소재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모험에 가깝다. 이 점에서 본다면 김예령 작가의 전환은 관심을 끄는 부분이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과감히 도자를 도입했다. 작업과정도 만만치 않다. 흙을 선별하고 유약을 바르며, 심상에 걸 맞는 형태도 얻어야 한다. 예상되는 화면의 주조 색 여하에 따라 채색도 달라진다. 결과적으로는 밝은 아이보리색에서부터 짙은 흙 갈색에 이르기까지 여러 색상의 도자가 만들어졌다. 워낙 우연의 요소가 많아서 예상치 못한 결과가 연출되는 것도 도자다. 도자는 속성상 두께라는 공간감을 형성하게 된다. 이를 활용하여 그는 캔버스에 오일이라는 그간의 평면적 방법에서부터 반입체적인 형태로 나아갔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온전한 입체작업까지 선보인다. <생명나무>시리즈가 바로 이것인데, 그는 도자기를 나무형태로 구워서 그대로 제시했다. 50여 점에 이르는 그의 입체작업은 캔버스작업과 함께 짝을 이룬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평면회화 보조역할 정도의 도자를 완전한 3차원 공간으로 해방시켰다. 그가 제시한 도자작업은 흔히 공예영역과는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물론 형식적인 측면만 따로 떼어놓고 보자면 일반적인 도예와 유사한 문맥을 지닌다. 그러나 종합적인 관점에서 그의 작업을 유심히 살펴보자면 평면과 입체가 상호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즉, 채색만으로 이루어진 회화에서 도자를 오브제로 도입한 회화, 이윽고 순수 도자작업까지 두루 다루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살펴보면 자신의 조형영역을 확장시켜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그는 캔버스에 채색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마티에르를 만들어내었다. 평면회화에서 일종의 오브제로 기능하는 도자는 그 두께로 인해 요철을 형성시킨다. 페인팅된 영역과 오브제의 조합은 촉각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도자는 유약 때문에 빛을 반사하게 되는데, 이 점에서 보는 이로 하여금 응시의 시간을 만들어준다. 이와 함께 그가 사용하는 겔 미디엄은 도자오브제와 함께 병치되면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 미디엄은 약간 거친 입자를 가지고 있는데, 건조 후에는 고체 상태로 굳어지는 재료다. 탄성과 견고성을 가지고 있어서 여러 가지 형태를 만들어가는 데도 유리하다. 특히 도자 못지않게 두께 감을 줄 수 있는 것은 제작자에게서는 큰 장점이다. 그의 미디엄은 도자 오브제와는 달리 채색으로 마감된다. 새, 나뭇잎, 꽃잎, 아이들, 마을과 교회와 자전거, 강아지 형태는 공히 이 미디엄을 활용한다. 무광의 미디엄과 유광의 도자오브제. 화면에는 이 두 가지 물질이 대조를 이루어 시각적 유희를 만들어내고 있다. 여기에다 김예령 작가는 한 가지 기법을 추가했다. 화면바탕에 스크래치를 남기는 일이다. 그는 빗, 숟가락 등을 위시하여 흔적을 낼 수 있는 여러 도구들을 활용했다. 결과적으로 화면에는 다양한 형태의 패턴이 생성된다. 화면의 대상들을 이어주고, 수직과 수평구도가 가지는 단조로움을 무너뜨리는 효과도 가져왔다. 과정을 보자면, 초벌화면에는 효과가 드러날 수 있는 색채가 먼저 놓이고 차후에 또 다른 색상이 채색된다. 어느 정도 건조 후에 화면을 긁어내면 바탕색상이 드러난다. 다시 진행의 추이를 살피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최소 3, 4회 수정작업이 이루어지게 된다. 관람자에게는 대단히 소박해 보이는 그의 작품은 실상 손길이 무척 가는 노동의 결과물인 셈이다.
3. 고대철학에서는 흙을 세계의 구성요소로 규정했고, 창세기에는 최초의 인류가 흙으로부터 탄생한다. 그러므로 흙은 단순히 지구의 표면을 덮는 유기물의 일부가 아니라, 형이상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흙을 굽고 화면에 붙이는 과정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것은 다름 아닌 작가의 영적 삶이다. 그는 다양한 회화작업과 도자작업을 통해 꿈과 소망, 그리고 희망을 이야기해왔다. 그 중심에는 늘 성경 텍스트가 있었다. 그로서는 작업의 영감, 아이디어의 보고였다. 시편에서 해와 달과 별을 발견하였고, 비둘기로부터 부활과 찬양, 그리고 꿈을 읽어낸다. 이와 같이 김예령 작가의 작품은 상징성이 짙다. 이러한 도상들을 통하여 주변 모든 이들도 꿈과 소망을 같이 갖게 되기를 원한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일련의 작업들은 이러한 그의 정신세계를 집대성하여 보여준다. 이 모든 창작행위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 영역 너머의 존재가 항상 동행해왔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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