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희 초대展

 

PATHWAY OF BLESSING

 

축복의 통로2(Pathway of Blessing)_45X71cm(each), 3pieces

판유리, 유리에나멜, 나뭇가지, 도기 (Fused sheet glass, glass enamel, wood, ceramic)_2017

 

 

횃불 트리니티 갤러리

 

2017. 6. 13(화) ▶ 2017. 7. 2(일)

Opening 2017. 6. 13(화) pm 4.

서울특별시 서초구 바우뫼로31길 70 | T.02-570-7079

 

 

아버지의 시간(Not My Time But God’s Timing)_132X48cm

판유리, 유리에나멜 (Fused sheet glass, glass enamel)_2017

 

<아버지의 시간-나의 시간과 하나님의 때>

나는 물리적인 시간에 맞춰 하루를 보낸다.

계획하고 시간에 맟추려고 동동거린다.

조급한 나머지 일을 그르치기도 하고 왜 내가 계획한대로 안되는지 속상해 하기도 한다.  24시간이 전부 인 것 처럼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나의 시간과 다르다.

내인생의 대부분을 지내온 후에야 다르다는걸 깨달았다..

이제는 조급해 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적기에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시간은 나의 물리적인 시간과 전혀 맞물리지 않는 시간이다.

하나님의 때는 언제나 가장 최적의 시간에 이뤄진다.

언제인가 디지털 시계의 표지판을 보며 지극히 기계적이고 물리적인 시간이 느껴졌다. 물리적인 시간은 12시간 혹은 24시간 단위의 시계표지판, 60분과 60초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

그럼 하나님의 시간은 어떨까…엉뚱한 상상을 하며 그 이상의 숫자들을 시계 표지판 위에 그려 보았다. 그 이면엔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의미하는 숲을 유리에 그려 여러 장 겹쳐 배경에 넣었다.

내게 10시간은 하나님의 시간으로는 1초일수도 있고 순간일수도 있다. 오래 기다려야 할 줄 알았던 시간은 단 몇 초 만에 지난 것 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나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은 참 많이 다르다…

 

 

 

 

최진희의 세계:

‘해석되는 해석자’, 또는 치유적 해석학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동덕여자대학교)

자유의 여정

사전적 정의를 따르면 자유는 ‘남에게 얽매이거나 강제 없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일’이다. 속박됨 없이 자신의 결정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조건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인 ‘자유의지’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의 자유다. 이 철학적 자유로 인해 인간의 행위는 무한한 다양성을 획득한다. 이것, 곧 철학적 자유가 예술의 근간이다. 인간은 결단을 강제받는 상황에서도 최종적으론 자신의 의지로 결단하는 존재인 것이다.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의 표현을 따르자면, 인간은 “상황에 따라 스스로의 실존을 자유롭게 창조해 나가는 존재”다. 같은 맥락에서 K. 야스퍼스(Karl T. Jaspers)도 인간을 자유로운 선택과 결단에 의해서만 ‘본래의 자기’로 향할 수 있는 존재로 정의했다 : “결의하는 가운데에서 나는 자유를 경험하며, 이 자유 속에서는 선택과 자아(自我)를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 자신이 선택의 자유인 것이다.”

19세기는 이 자유주의 철학을 최대한 밀어붙였다. 이 과정 동안 ‘종교의 자유’는 ‘종교로부터 자유’로 대체되어야 했다. 그 대표 주자였던 마르크스는 신이 존재하는 한 인간은 의존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어떻게든 신을 역사로부터 배제시켜야 했다.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결론도 대동소이했다. “인간이 자유하려면 신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니체는 신은 물론이고 도덕의 권위도 폐기할 것을 주장했다. 도덕 역시 자유를 속박하는 구실일 뿐인 것으로 폐기해야 할 악덕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자유주의 철학이 승승장구함에 따라 존재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억압하는 일체의 권위들, 인간을 피조물로 전락시키는 신에서 백성을 노예화하는 군주까지 차례로 형장(刑場)으로 보내졌다. 존재는 신도, 진리도, 도덕도 없고, 그것들을 향한 의지조차 없어야 하는 존재 그 자체일 뿐, 어떤 목적도, 의미도, 계획도, 실천도 그를 결박해선 안 되었다.

니체에게 자유의 표상, 주군적 인간은 예술가였다. 예술이야말로 신의 사랑과 진리의 이정표를 모두 포기한 대가로 손에 쥔 유산으로, 사유와 철학의 종점이며 자유 자체였다. 예술의 자유는 더더욱 의심되어서는 안 될 마지막 보루였다. 예술가는 새로운 주군으로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이전의 노예적 질서와 싸움을 벌이며, 유일하게 허무로부터 도래하는 휴식을 보장받을 수 있는 특권적 인간이다.

지난 세기 내내 예술의 행보는 전적으로 자유주의 철학의 산물이었다. 이 여정의 궁극, 미적 사유의 토대는 결국 자유를 찾는 것이었다. 다양한 모색과 실험이 20세기를 수놓았다. 세기 초의 표현주의자들은 부조리한 역사와 사회에 대한 울분을 토함으로써 세계가 보다 자유와 균형을 취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들의 분노를 이미지로 표현함으로써 마음의 평안과 자유를 되찾는 방식을 택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예술을 “시대가 안고 있는 수 천 가지 문제들을 다루는 의식있는 예술”, “바로 지난주에 폭발로 갈갈이 찢겨진 예술”, “어제의 충돌사고로 잘려나간 사지를 다시 끌어 모으는 예술”로 만들고자 했다.

잭슨 폴록의 공로는 이성과 합리가 자유를 억압하는 족쇄라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었다. 알다시피 그의 드립 페인팅은 존재 내면의 ‘불확실한 차원’을 끄집어내는, 즉 이성의 간섭을 넘어 더 본래적인 자유를 구현하는 전략이었다. 이에는 존재의 내면에 훨씬 더 좋은 것, “근본적인, 핵심적인, 중요한, 의미있는” 것, 인간 본연에 보다 가까운 어떤 것으로서 이성과 논리에 의해 억압받아왔던 것이 고여 있다는 전제가 내포되어 있다.

같은 시기에 폴록과는 정반대 쪽에서 자유의 가능성과 마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예술가들이 등장했다. 팝(Pop)으로 불리는 영국과 미국의 젊은 작가들로서,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슈퍼마켓의 쇼핑목록과 포르노 사진과 광고문구로 채우기 위해 전통을 등졌다. 이들에게 자유의 숨통을 조이는 것은 엄숙주의적 전통인 반면, 슈퍼마켓이나 백화점이야말로 그 안에서 얼마든지 자유로운 삶이 가능한 민주화된 유토피아였다. 반면, 도널드 저드 같은 작가들은 팝아트가 권장하는 번잡한 유토피아에선 잠시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 전체를 일상의 환영과 환타지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키는데 사용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들로부터 환영주의적 잔재의 일소하고 기본 형태로 축소시켰다. 결벽적인 탈 일루저니즘을보다 더 자유를 담보하는 질서로 여겼기 때문이다.

 

 

 

 

바다로 부터 온 아버지의 편지(Father’s Letter from Heaven)_72X45cm

판유리, 유리에나멜, 나무껍질 (Fused sheet glass, glass enamel, wood)_2017

 

<바다로부터 온 아버지의 편지>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뿐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서 2:9)

바닷가에서 돌돌 말린 나무껍질을 주웠다.

신기해서 주워 든 순간 하나님 아버지가 내게 편지를 보내신 것만 같아 가슴이 뭉클했다.

진희야 사랑한다 라고...

유리병 모양을 만들어 그 속에 편지를 넣었다.

유리병 편지..

 

 

‘해석되는 해석자’, 또는 치유적 해석학

같은 맥락에서, 그리고 전적으로 다른 맥락에서 최진희의 세계도 자유의 출처를 찾아 나선다. 그 궁극이 무엇인가에 관한 단서를 그가 오랫동안 나무를 그려왔다는 사실로부터 추론할 수 있다. 그는 2001년에는 가을나무와 겨울나무를, 2013년에는 가시나무를 그렸다. 2016년인 현재도 나무와 숲을 그리고 있다. 자연예찬인가? 물론 자연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존중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자연은 세계를 아무런 메시지도 없는 물질의 세계로, 그리고 우연으로 가득한 것으로 인식하는 시각으로서의 자연주의로부터 도래한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최진희의 자연은 하이데거가 그렇게 말했던 것처럼 그 비밀이 온전히 밝혀진 적이 없는, 해석되어야 할 의미로 가득한 세계다. 하지만 여기서 해석은 대상과 주체 사이의 상호작용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이 해석학에서 대상은 그것에 함축적으로 반영된 메시지에 의해 단순한 객체 이상이며, 이에 따라 주체 역시 ‘결정적인 주체’에서 ‘겸허한 해석자’의 자리로 무한히 내려앉는다. 해석하는 주체에서 ‘해석됨으로써 해석하는’, 즉 ‘해석하기 전에 사랑받는’ 자로 자리매김되는 것이다. ‘치유적 해석학’이라 해야 할까. 이 세계가 치유의 세계라 할 때, 치유의 주체는 작가가 아니라 작가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다. 철학자 버나드 로너건(Bernard Lonergan)에 의하면, 사랑받는 체험이야말로 모든 종교체험의 뿌리다.

앞서 언급했듯, 모든 예술이 여전히 각각의 방식으로 자유를 추구하고 시도한다. 그리고 자유를 저해한다고 판단되는 것들과 결별한다. 하지만 그토록 추구했음에도 자유주의의 도덕적 공허는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갈수록 높은 이상이 결여되고 그 중심이 감정적으로 텅 비어가는 것이 그 결말이다. 자유를 더 극단적으로 실험하는 예술들의 이면에서 공허와 절망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리처드 코치(Richard Koch)와 크리스 스미스(Chris Smith)는 자유주의의 이러한 결말을 ‘자멸의 신호’라 했다.

최진희의 숲은 다행히도 ‘치유하는 숲’이다. 그의 가시나무는 기도하는 가시나무다. 그 나무는 하늘 높이 ‘자라고 싶어하고’ ‘하늘에 심기어지기를’ 소망하는 나무다. 최진희의 맥락에서 대지의 현상들은 모두 천상의 메시지가 담기는 그릇이다. 심지어 바람조차 그저 부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의 카달로그를 뒤적이다 점토와 나무를 사용해 만든 2004년 작 <바람에 눕다>를 보았는데 너무 인상적이었다. 그 옆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내 생명이 한낱 바람임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최진희의 세계는 웅장하거나 기념비적이지 않아서 좋다. 이 세계는 조촐하지만 가난하지 않고, 확신에 차 있지만 주장하지 않으며, 전혀 계열이 다른 미학을 공격적이지 않게 속삭인다.

유리라는 질료도 맥락을 공유한다. 유리는 최진희가 자주 사용해오던 종이반죽이나 세라믹보다 훨씬 다루기 어렵고 깨지기 쉬운 질료다. 마치 작가 자신이, 더 나아가 한낱 바람인 인간이 그런 것처럼. 모든 인간들은 정서적으로 쉽게 파손되고 그 상처를 안고 산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기도하고, 우울감으로 가득할 때 하늘을 소망하고, 아플 때 존재 차원의 내밀한 치유를 염원한다. 재료로서 유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작업자의 세심한 주의를 요구하는 것 외엔 없다. 그것이 하나의 작품이 되는 과정은 단순하다. 탁월한 재능을 지닌 성실한 작업자의 손에 들리는 것이다. 시인 존 던(John Donne)의 기도가 이를 대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주께 속박된 없이는 제게 자유가 없고, 주께 강탈됨 없이는 순결도 없나이다.”

 

 

 

 

바다-아버지의 마음(Heart of Father)_72X35cm(each), 2pieces

판유리, 유리에나멜 (Fused sheet glass, glass enamel)_2016

 

<바다-아버지의 마음>

바닷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두 팔을 벌려 내가 어떤 모습이라도 품어주시는 하나님이 느껴진다..

그 품이 너무 넓어서 나는 그저 작은 모래 한 조각 같을 뿐이다.

 

 

 

 

World of Jinhee Choi: Healing Hermeneutics and an Interpretable Artist

 

Freedom’s Journey

Freedom is the state of being free or at liberty rather than in confinement or under physical restraint. This definition also includes a premise that one can decide and act without being restrained. In that sense, free will is a nobler form of freedom, for one proactively wills to act even against constraint or restriction. This form of freedom grants the man unlimited diversity of expressions and actions. Thus, this freedom is the foundation of art. Man is what he wills himself to be, even under the coercion. Jean Paul Sartre said, “Man makes his own destiny.” In the same vein, Karl T. Jaspers defined man as a being who can freely create himself under the given circumstances, saying that “I experienced freedom in the midst of my own resolution, and in this freedom it is impossible to distinguish myself and my will to make choices. I am free to will.”

19th century experienced fervent growth in liberalism philosophy. In the course of its development, ‘freedom of religion’ had to be replaced with ‘freedom from religion.’ Karl Marx, the figurehead of this ideological wave, had to rule out god from the history of mankind, for man could not be free as long as god was.

Nicolai Hartmann came to the similar conclusion, saying “If man wants to be free, then he must not accept god.” Nietzsche emphasized the abolishment of not only god but also of morality. Morality too was just one of the evils that man should rid of, for it merely was an excuse to retrain the freedom. As liberalism continued to grow its influence, anything that suppressed freedom of being would be taken down, including the monarchs who enslaved people under his rule and the god who demoted human beings as its own creations. A being shall have nothing to do with god, truth, and morality. Therefore, a being at its essence should belong to no one but itself, freed from purpose, meaning, plan, and action.

According to Nietzsche, artist is symbol of freedom, master of one’s own self. And art is an inheritance man acquired at the cost of forfeiting the love of god and the guidance of truth. It is the endpoint of philosophy and reason; it is the freedom itself. Art is undoubtedly the last bastion of freedom. Artist is the new master of one’s own self and stands against the existing rules and orders, which enslaves and limits his freedom. He is uniquely privileged with the rest from futility.

For the entire span of the past century, every movement in art bore product of liberalism. The ultimate objective of aestheticism was the discovery of freedom. Various trials and experiments embroidered 20th century. Earlier in the century the expressionists had let out pent-up angers toward the improperness of society and history, hoping for the arrival of freedom and balance to the world. They tried to recover inner peace and freedom by expressing their angers through artistic image. Their aim was to make “art that was exploded and torn apart into pieces,” “art that united all the limbs lost from the accident,” and “art with consciousness, shouldering thousands of problems shared with this generation.”

Jackson Pollock’s contribution to art was raising the awareness that reason was the shackle, which restrained freedom. His drip painting was the discovery and exploration of the unknown dimension of oneself; in other words, his approach expressed what was truer to freedom, what was essential and meaningful, and what was closer to the nature of man, all under the suppression of reason

 We also saw the emergence of artists contemporaneous with Pollock, who tried to attain freedom from the opposite spectrum. These young artists from the U.S. and U.K. created the pop art movement and turned against the tradition by exerting their ideals to the world by means of supermarket merchandize, pornography, and advertisements. To them, what suffocated freedom was the solemn tradition, and they found their democratic utopia in the supermarkets, McDonalds, and Cola Colas of daily life. On the other hand, some artists, including Donald Judd, thought they could not attain a moment of freedom in the crowded world of utopia made by the pop artists, and they used up all their privilege of freedom to disconnect themselves from the illusions of daily life. Judd eradicated all the remnants of the illusionism and reduced his art to the basic form, for he believed that the thorough rejection of illusionism was the better way to attain freedom.

    

 

Healing Hermeneutics and an Interpretable Artist

In the same—or, perhaps in the entirely different—context with the above mentioned artists, the world of Choi Jinhee also explored the fundamental aspects about freedom. We can glimpse the hint of her trials from the pictures of trees she has been making for a long time. In 2001 she drew trees of autumn and winter, and then in 2013 she turned to thorny trees. Even today in 2016 she still draws trees and forests. Perhaps, she’s been presenting ode to nature? Surely, they possess a great respect for nature, but she portrayed it very differently from the naturalist’s view, which regarded nature as a materialistic world with no spiritual message, having been filled purely with accidents and chances. On the other hand, Choi Jinhee’s nature, like what Heidegger had said, is “filled with secrets yet to be revealed and meanings waiting to be interpreted.” Here, the interpretation is not limited only to the interaction between the object and its subject.

In hermeneutics terms the object, by implicit message, takes a role beyond just being an object. Likewise, the subject does not sit above, like the master with decisive power, but he descends to become a humble interpreter, too: Although you were once the subject, you transform to become the object of the interpretation. In other words, you first become the object analyzed, understood and loved. Perhaps, for this I can think of a term, “healing hermeneutics.” In this ‘world of healing’, the healer is not the artist but the one who listens to her prayer. According to the 20th century philosopher, Bernard Lonergan, the experience of being loved is the root of all the religious experience.

As mentioned earlier, all forms of art pursue freedom in their own ways, and it breaks up with anything that hinders its pursuit of freedom. However, despite all its attempt to pursue freedom, moral emptiness under liberalism is growing day by day. Noble ideals are missing, and in the center of it all, emotion is being emptied out to the end. It is no coincidence to observe the growth of emptiness and hopelessness by some art that experiments to a more extreme degree in pursuit of freedom. Richard Koch and Chris Smith called this destructive end of liberalism as “the sign of self-destruction.”

The art works of forest by Choi Jinhee is ‘the forest that heals.’ In her world, even a thorny tree is a tree that prays, hoping to grow taller reach the heaven. In her view the phenomena of the earth are all messages from heaven. Even a wind does not blow without purpose. When I looked through the catalogue of her collection, I was particularly impressed by her clay-and-wood work in 2004, “Lay down on the Wind.” There was a word next to the work saying, “Please remember that my life is nothing but only a wind.” I like her works and her world because neither they make grand statements nor do they pose to become monuments. Yet, her world is simple but not poor; confident but not outspoken; and it whispers about different aesthetic values without aggression.

The glass materials used in her works also reflects her ideal, too. Glass is much more difficult to work with compared the paper clays and ceramics. It’s as fragile as the artist herself will be, like she considers herself to be nothing but only a wind, all human beings are emotionally fragile and carry the wounds of breakage. Man gives prayers in his instinct, looks up to the heaven when he is let down, and yearns for a healing to the core of his being.  As a material of choice, glass demands nothing but careful attention from the artist. The process of becoming a work of art from glass is conceptually simple. This is formed from the hands of an earnest worker with superb skill. Perhaps, one of John Dunne’s prayers may sum it up:

“(Lord,) take me to you, imprison me, for I,

Except you enthrall me, never shall be free,

Nor ever chaste, except you ravish me.”

 

 

남은자의 기도 Prayer of The Remnant_69X140cm

판유리, 유리에나멜 (Fused sheet glass, glass enamel)_2015

 

<남은자의 기도>

잘못된 길을 가는 이스라엘백성을 거의 전멸상태가 되어 흩어지게 하신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하나님은 다 멸절하지 않으시고 그루터기 곧 남은자를 남겨 두신다. 그 남은자를 향한 하나님의 애틋한 마음은 스바냐에도 잘 나타나있는데 그들을 회복시키시며 다시 모으시고 축복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탄식을 하는 남은자에게 에스겔 9장 4절에서는 하나님이 그 이마에 표를 주게 하셨다. 성경의 난외의 주에는 그것이 “타우”(T자모양)라는 문자라고 설명하는데 나무 위의 하얀 점들로 표현하고 유리판 각 장에 나무를 그리고 두 장씩 겹쳐 소성하였다. 각박하고 메마른 세상에서도 남겨진 따뜻하고 정결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나무로 표현해 보았다.

남은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이 세상이 다시 살만한 세상으로 회복되어져 가기를 소망한다.

 

 

 

 

평범한 일상에서 값없이 주어지는 것들이 참 소중하고 감사하다.

이른봄, 굳어졌던 땅 위로 내리는 봄비와

한 낮의 더운 열기를 식혀주던 여름 밤의 시원한 소낙비,

매일 여러 모양으로 살아 가는 따뜻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감사하다.

내 능력과 의지와 상관없이 나의 일상에 주어지는 선물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음에 참 감사하다.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의 순간과 만나는 사람들을 포착하여 드로잉으로 판유리 위에 그려 여러 장을 겹쳐 만들어 노트처럼 메모판 모양의 걸이에 걸어 놓기도 하고 석고로 뜬 몰드를 판유리 사이에 넣어 공간을 만들고 그 사이에 나뭇가지나 새싹 등을 넣어 생명의 소중함을 표현하였다.

이번 작업도 유리를 주재료로 사용하여 평면작업과 반입체 작업을 하였다.

판유리에 가는 유리가루로 만든 에나멜물감으로 그림을 그려 여러 장을 겹치고 780도의 가마에서 퓨징하여 만들었다. 유리를 사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두껍지 않은 2차원의 평면 작업에서도 여러 장의 그림을 겹쳐 공간의 깊이를 보여줄 수 있다는 투명성에 있다.

낮엔 해가 뜨겁게 내리 쬐어 길가의 풀잎이 축 쳐져 있다가도 새벽에는 그 풀잎들에 이슬이 어김없이 송글 송글 가득 맺혀 생생하게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았다. 유리 작업은 이슬로 덮인 풀잎을 표현해보고 싶어 시작 했는데, 내겐 새로운 경험이었다. 유리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유리가 빛을 품고 있는 것 같지만 빛을 통과 시키는 통로 역할을 할 뿐이며 빛을 통해 더욱 분명한 존재감을 갖는다.

예민한 유리의 특성과 시행착오로 몇 개의 작품이 작업 과정중 어이 없이 깨지는 상황도 있었다. 천천히 식혀야 하는 서냉 과정이 잘못되어 작은 흠집으로부터 시작하여 이미 깨지기 시작하는 유리를 보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깨지기 쉽고 연약한 유리와 같은 존재일 뿐이지만 나를 통해, 작품을 통해 그런 나의 모습이 아닌 빛 되신 하나님의 따뜻함과 밝음이 보여 지는 맑은 통로가 되기를 소망해본다.

 

 

Note from the Artist

How I am grateful for the priceless gifts given to me through all the days of my life. The spring rain over the hardened wintery earth I become thankful for;

The cool summer shower after the heat of the day I rejoice about;

And then, the delight is my encounter with people, whose lives all different

and beautiful in their own ways. For all the gifts given to me regardless of my deeds, I thank again and again.

 During my brief stay in Los Angeles, a city blessed with sunny and dry Southern California climate, I happened to observe how a life can change its looks just over the course of a day. The leaves would shrivel under the intense heat of sunlight,

and yet when the night passes and the dawn arrives, they would come to full life, embellished with bright beads of dew and dressed in the vibrant colors of morning. I begin my glass work to express these leaves moist with dew, which was an all new joyful experience for me. At first glance the glass seems to possess the quality of light, as if it was capable of beaming the light on its own, but I realized that this material merely was a medium to pass the light to somewhere.

The glass is transparent; it does not push itself forward to show its being;

rather its existence becomes more obvious and real, when the light shines onto it.

 Working with the glass taught me a good lesson:

Its delicateness would sometimes lead to a total breakage to my dear works.

A tiny crack in the beginning would grow until it became fatally large to destroy the whole work, and I was left helpless watching its irrecoverable progression of breakage to the end. Maybe, I too am just a fragile being that can crack and shatter like the glass. However, despite of my fragile existence—as all human are,

I am thankful, and through my works I would rather hope to show my thankfulness for all the things given to me to my audience.

 

 

하늘이 보이는 집(The House with a View of Heaven)

 44x34cm, 46x32cm, 23x35.5cm, 28x24.5cm, 14.5x30.5cm, 35.5x21.2cm, 21x33cm(7pieces)

판유리, 유리에나멜 (Fused sheet glass, glass enamel)_2015

 

<하늘이 보이는 집>

우연히 공장지대를 지나며 보게 된 큰 회색 빛 공장 건물.

그 건물 삼각지붕 밑에 작은 창이 보였다.

큰 건물에, 겨우 작은 창문에 불과했지만 그곳으로 바람도 들어가고 햇빛도 들어 갈 것이기에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한 조각의 빛만 있어도 어둠은 물러갈 것이고 시원한 바람으로 인해 숨도 쉬어질 것이다.

그 작은 창문이 참 고마웠다.

 

 

 

 
 

최진희

 

1997 Art Student League, Manhattan, New York수학 | 1996 OCCC School of Art-Ceramic, New Jersey수학 | 1987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 | 2017 “축복의 통로(Pathway of Blessing)” 횃불트리니티미술관 | 2017 “통로(Pathway)” (사이아트 스페이스) | 2016 “The Little Moment 일상 그리고 감사”(금호미술관) | 2013 “조용한 대화”(인사아트센터) | 2009 “소박한 사랑”(인사아트센터) | 2004 “바라봄”(관훈갤러리) | 2001 “기다림”(관훈갤러리) | 1994 “기도”(관훈갤러리) | 1991 1회 개인전(윤갤러리)

 

그룹전 | 2017 “Express my heart” LA한국문화원 초대전 (Los Aangeles, U.S.A) | 2016. Art Feast, 아트미션, 한울회정기전(원주, 서울) | 제 24회 대한민국 기독교미 대전(우수상 수상-밀알미술관)외 다수

 

현재 | 기독미협회원 | 아트미션회원 | 영락미협회원 | 한울회회원

 

Blog | https://forestjinchoi.wordpress.com | E-mail | forestjh@gmail.com

 

 

Academic Experience | 1997 Art Student League, Manhattan, New York | 1996 OCCC School of Art-Ceramic, New Jersey | 1987 Seoul National University, BFA, Seoul Korea

 

Solo Exhibition | 2017 “Pathway of Blessing” (Torch Trinity Gallery ,seoul) | “Pathway”(Cy Artspace Seoul) | 2016 “The Little Moment”(Kumho Art Museum, Seoul) | 2013 “Quiet Conversation”((InsaArtGallery,Seoul) | 2009 “Simple Love”(Insa Art Gallery, Seoul) | 2004 “Looking up”(Kwanhoon Gallery, Seoul) | 2001 “Waiting”(Kwanhoon Gallery, Seoul) | 1994 ”Prayer”(Kwanhoon Gallery, Seoul) | 1991 1st Solo Exhibition(YoonGallery,Seoul))

 

Group Exhibition | 2017 “Express my heart” Korean Cultural Center Presents | LA Art Project 2017 selected artist show (LA, U.S.A) | 2016 “The 24th Korean Chrisitan Grand Art Show(Honor Award) and more

 

Present | member of Korean Christian Artist, Art mission, Youngrak Christian Artist, Hanwool Association

 

Blog | https://forestjinchoi.wordpress.com | E-mail | forestjh@gmail.com

 

 

 
 

vol.20170613-최진희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