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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윤숙 展
" 마음자리_말도 끊기고,생각도 끊긴 Place of Mind_Punctuated speech and thinking "
陀羅尼(다라니)_33.4×45.5cm_Mixed Media on Canvas_2016
갤러리 한옥 Gallery Hanok
2016. 10. 6(목) ▶ 2016. 10. 15(토) Opening 2016. 10. 7(금) PM 5-7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 30-10번지 | T.02-3673-3426
無名(무명)_53×72.7cm_Mixed Media on Canvas_2016
획(劃)과 탈주선, 혹은 생성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이번 전시의 비평문을 맡기로 하고서, 2015년 10월에 열린 고윤숙 작가의 개인전 도록을 바로 찾아보았다. 그리고 이번 전시작들의 이미지를 서둘러 훑어보게 되었는데, 짧은 간격을 두고 벌어진 작풍의 변화와 차이에 얼른 눈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혹이자 매혹. 흔히 이야기하는 ‘같으면서도 다른’ ‘다르면서도 같은’ 미묘한 연속과 불연속의 심상을 어떻게 포착해서 풀어낼 것인지 한참 주저하다가, 마감일을 앞두고서야 겨우 책상머리에 앉아 이렇게 옮겨놓게 되었음을 고백해야 하겠다. 지난 전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무엇보다도 문자의 형상들이었다. 황색과 녹색, 또는 여러 중합된 색상들 전면에 나타난 크고 검붉은 초서체의 문자들. 한자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그 문자적 형상들은 글자의 형태와 이미지를 충실히 따르고 있으며, 강렬한 힘의 역동(力動)을 발휘하는 듯하다. 문자의 도(道)로서 ‘서예’가 갖는 최대치의 능력을 목도하는 기분이랄까. 반면 이번에 전시하는 작품들은 전작(前作)의 풍모와는 사뭇 다를 뿐만 아니라 상이한 역동성을 방사하고 있어서 놀랍다. 배경의 색채는 이전의 단색조를 넘어서 다성적인 울림 속에 혼합되어 있고, 이러한 배경 위에 문자의 형상은 글씨인지 아닌지 구별되지 않는 모양새로 해체된 채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번 작품들에도 식별가능한 문자적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것들이 없진 않다. 그러나 그 대부분에는 한자 특유의 필치나 형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누구에게나 익숙하게 인지할 만한 한자 고유의 서체 형식은 박탈당하고 제거되었으며, 지워지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사라지는 문자들? 아니, 문자는 남아있으면서도 지워지고 있다고 말해야 더욱 정확할 텐데, 왜냐하면 붓이 간직한 기세와 흐름 가운데 문자의 이미지적 힘이 여전히 감지되는 탓이다. 그러나 이는 통상의 문자적 의장(意匠)과는 전혀 다르다. 알다시피 서양화를 그릴 때 사용하는 붓은 색을 입히고 붓의 텃치감을 물감의 형태로 남겨두는 ‘도구’에 가깝다. 이와 대조적으로 동양의 붓은 색을 칠하고 텃치감을 살리는 용도로 사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동양의 붓, 글을 쓰는 붓은 문자의 형태를 조형하고 기세를 통해 전체의 형상을 탁마하는 ‘손’이라 할 수 있다. 붓을 쥐고 써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이는 비유가 아닌 실재의 감각으로서 획(劃)의 본질을 이룬다. 따라서 붓을 잡는 것은 도구를 사용하는 행위가 아니라 붓과 신체가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감각의 운동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문자의 형태, 그 형상을 구축하고 질서화하는 힘이 붓 끝에 담겨있다. 이런 의미에서 작가의 붓이 지나간 자리는 문자의 소진이 아니라 문자 아닌 것의 생성이라 말해야 옳지 않을까. 혹은 그것은 문자 바깥의 질서, 문자 아닌 문자의 형성을 가동시키는 그람의 운동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작가는 이번에 전시하는 작품들에서 사물의 모양새를 한껏 포착하고 조형해 낸다. 전작의 붓놀림이 무엇보다도 글씨의 형태를 유지하는 정력(定力)에 봉사하고 있다면, 이번 작품들에서는 그 정력이 세계의 사물들로 전이되고 변형되는 과정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물고기와 새, 거북이, 나무와 풀꽃, 벌레의 형상들이 자유분방하게 유동하며 자신을 드러내다가 어느 순간 문자의 형태로 환원되고, 또다시 세계의 형태들로 이행하는 열락을 누구든 만끽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길, 조금 더 섬세하게 관찰하길 바란다. 형태가 아닌 형세(形勢)에 주의를 기울여 보라. 물고기와 새, 거북이, 나무와 풀꽃, 벌레를 확인하는 게 아니라, 그 형상들이 문자로 탈바꿈하고 다시 사물의 세계로 돌아가는 생성의 풍경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니카 다나카의 탱화를 다시 언급한다면, 그것은 글씨이자 그림이고 문자이자 사물이며, 생명이자 비생명인 어떤 기이한 운동에 다르지 않다. 공-동적(共-動的) 사건으로서 문자-사물의 변형과정이 여기에 있다. 놀랍게도 작가는 이 일련의 과정에 ‘수기(隨器)’, ‘비여경(非餘境)’, ‘무분별(無分別)’, ‘불사의(不思議)’라는 탁월한 제목을 붙여놓았다. 형태(그릇)를 따르되 비형태를 버리지 않기에 형태의 안과 바깥의 구별이 없고, 논리의 언어로 재단되지 않는다. 식별불가능한 생성의 장, 그것이 글씨와 그림, 문자와 사물, 생명과 비생명의 분할을 가로지르며 화면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 이로 인해 작가에게 문자-사물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이분법적 형태화에 고착되지 않는다. 약간의 언어유희를 더 보태본다면, 모양새가 아니라 모양-세(勢)로서 우리는 오직 유동하는 힘만을 관찰할 뿐이다. 마치 세찬 물살이 길을 내며 흐를 때 그 형태를 드러낼 필요가 없는 것처럼, 작가의 붓길은 그것이 지나가는 형적(形跡)을 문자의 권리 속에 가두어 두려하지 않는 듯하다. 획(劃)과 강도만이 모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탈형태, 문자의 해체는 또한 역으로 문자를 만드는 형태화의 힘, 중봉(中鋒)이라 불리는 붓의 운용 없이는 도무지 나타날 수 없는 현상임을 기억하자. 글씨든 그림이든, 문자든 사물이든, 생명이든 비생명이든 관건은 (탈)형식의 이행하는 힘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놓여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라면 이러한 표현의 기예를 욕망하는 기계(les machines désirantes)의 운동이라 불렀을 것이다. 이것은 단지 신기한 체험, 즉 우리를 이상하지만 잠깐의 재미에 빠뜨리고 곧장 출입구로 인도하는 일시적인 유흥에 불과할까? 누군가에게는 그럴지도 모른다. 여가를 즐기는 문화생활로 작품들을 보고 지나칠 수 있다. 하지만 문득 이 변형과 생성의 이미지들이, 식물인지 동물인지 괴물인지 또는 그 무엇도 아닌지 모를 이 형상 아닌 형상들이 망막에 떠올라 어느 순간 뇌리를 자극할 때, 어쩌면 우리는 더 이상 이 세계를 종전의 방식으로 만나지 못할지 모른다. 문자는 더 이상 문자로서 읽히지 않고, 사물은 사물 아닌 것으로 꿈틀대는 시간이 도래할 수 있다. 그 단초가 지금 이 작품들을 마주할 때 심어졌음을 나중에라도 기억해 볼 일이다.
그람은 특정한 문자의 형태에 고착되지 않는, 차이화하는 근원적인 힘의 작용을 말한다. 만일 무(無)가 존재보다 앞서 있다면, 어떠한 생성도 근본적으로 허위나 결핍에 머물고 말 것이다. 존재가 우선하며, 그 존재는 정태적인 모양새가 아니라 동태적인 모양-세로서 생성을 가리킨다. 따라서 우리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거기엔 무엇인가가 항상-이미 움직이고 있다. 화선지의 하얀 바탕은 텅 비어서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가 아니라 제약없이 무한하게 유동하는 힘으로 충전된 장(場)이다. 데리다가 고심 끝에 안출한 개념인 ‘흔적’은 이렇듯 언제나 원(源)-흔적으로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관없는 신체와 멀리 있지 않다. 무엇이라 부르든 결국 우리는 생성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고윤숙 작가의 사유는 한편으로 불학(佛學)의 깊은 심연에 닻을 내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적 사상의 극한까지 아주 멀리 뻗어있는 듯하다. 예술가의 현재에 감탄을 금치 표하고 나면, 금세 우리는 그의 다음 여정에 관심과 기대를 걸게 마련이다. 예술가를 예술가로 만들어 주는 것은, 그의 신념이나 사상, 의지라기보다는 그의 신체에 장전되어 있는 힘을 그가 어떻게 불러내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 생성의 힘을 모종의 형태 속에 끌어들이고 다시 그 형태를 넘어서게 만드는 변형과 이행의 과정 속에 담아내는 능력이 문제다. 문자의 강고한 굴레에 결박되지 않으면서도 아무런 형태도 만질 수 없이 와해된 것만은 아닌, 기성의 감각과 인식으로는 지각할 수 없는 새로운 형태를 이루어내는 것. 탈주선은 이러한 능력과 표현에 붙여진 역설적인 이름에 값한다. 예술가의 붓이 전통과 규범이 정해둔 궤적을 넘어설 때, 탈주가 시작될 때 우리는 혼란에 빠지지만 그러한 혼돈을 돌파하고야 비로소 우리는 전통과 규범의 세계가 이미 죽었음을 깨닫고 낯설지만 살아있는 세계의 형성을 알게 될 테니까. 러시아의 미래주의자들에게 그것은 시를 짓는 일이며, ‘돌’이라는 문자에 진짜 돌의 무게와 물리력을 심고 가동시키는 주술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예술가란 이런 의미에서 주술사나 다름 없으리라.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만들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게 하며, 그로써 익숙했던 감각의 질서를 무너뜨려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현세의 파괴자. 하지만 예술가가 그러한 불길한 참언을 입에 담지 않는다면, 누가 우리를 이 죽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것인가? 그리하여 나는 고윤숙 작가의 다음 작업들에 관심과 기대를 감히 걸어본다. 하나의 작시(作詩)라 할 만하고 돌과 ‘돌’을 이어서 새와 나무, 거북이와 벌레, 물고기와 풀꽃을 생성시키는 획의 탈주선들을 벌써부터 만나고 싶다.
최 진 석(수유너머N 회원, 이화여대 연구교수)
無量遠劫卽一念(무량원겁즉일념)_50×65.1cm_Mixed Media on Canvas_2016
How are stroke, flight line and generation expressed?
I read the catalog of the private exhibition by Koh Yoon Suk on Oct. 2015 before writing a critique about this exhibition. I looked at images of the work and was attracted by a change and distinction of the work within a short interval. I confess my late writing before pending time limit after long hesitation about how to capture and express imagery of subtle (dis)continuation like embarrassing and attracting, 'identical and different'. Last exhibition, the thing attracting my eyes was shapes of characters. Large and dark-red cursive characters in front of yellow, green or many overlapped colors. Even from eyes of people ignorant of Chinese characters, such character shapes followed faithfully forms and images of the letter and showed dynamics of the intense power. I felt like witnessing the maximum abilities of 'calligraphy', 'truth' of the character. On the contrary, it is amazing that these works emit dynamics different from prior works. Colors of the background are mixed under polyphonic resonance beyond the monochrome before. On such a background, shapes of characters are deconstructed, even making it difficult to distinguish letters and dancing together. Of course, in these works, there are a few characters holding identifiable shapes. However, in most cases, there are few strokes and shapes of Chinese characters' own. Unique handwriting type of Chinese characters' own was expelled and excluded and even removed. Disappearing characters? Never, it is correct to say that characters are left but removed because power of character images can be still felt from vigor and a flow of a paint brush. However, it is clearly different from ordinary character design. As you know, brush for Western painting is near a tool for coloring and leaving the touch of the brush as paints. On the contrary, Eastern brushes are not used for coloring and making use of the touch. Rather, Eastern brushes may be said as 'hand' for polishing the entire shape through vigor while forming a shape of a character. I think you can understand if you have used a brush. It is not comparison but an actual sense, forming the essence of the stroke. Hence, holding the brush is a sensory exercise through joining a body with the brush rather than an act using a tool. The end of the brush has the power to construct and give character shapes order. In such a sense, maybe a wake of the brush may be said as generation of a non-literal thing rather than exhaustion of characters. Or, perhaps it may be called motion of gram operating generation of order outside characters, or characters rather than characters. The artist captures and creates shapes of the object in these works. Strokes in the prior exhibition concentrated on the fixed power maintaining shapes of a letter but these works show a process that such fixed power transfers and transforms to object of the world. Everyone can feel the joy from a process that shapes of fish and birds, turtles, tress, wild flowers and bugs move freely while displaying themselves and are reduced to shapes of characters and again to the world. However, a step forward for delicate observation. Pay attention not to shape but to situation. Rather than identifying fish, birds, turtles, tress, wild flowers and bugs, capture the scenary of generation where such shapes are transformed into characters and returned to the world of objects. Return to the altar portrait of Buddha by Nica Danaka. It is certain mysterious movement of the character, picture, object and the animated and inanimated. There is a transformative process of character-object here as the event of join-movement. Surprisingly, this artist gives excellent titles including Sugi(隨器)’, ‘Biyeogyeong(非餘境)’, ‘Mubunbyeol(無分別)’, ‘Bulsaui(不思議)’ to a series of process. There is no distinction of the inside and outside since they do not abandon non-shapes while following the shape(vessel). They are not also cut with logical language. Unidentifiable generation seizes the entire screen crossing character and picture, letter and object and the animated and inanimated Hence, character-object for the artist are not fixed to dichotomic formation, "this or that". As the linguistic play, we may observe only flowing force not as Moyangsae(shape) but as Moyang-se(shape-force). As the strong current covering its shape when flowing while making a road, stroke of the artist is not willing to confine its wake into rights of characters. Stroke and intensity are everything! However, remember deconstruction of characters is a phenomenon impossible without the power of formation to make characters, operation of the brush called Jungbong(中鋒). The key lies in the way to express the transitional power of de-formation, whether letter or picture, character or object, animated or inanimated. Deleuze and Guattari may have called such artistic expression motion of es machines désirantes. Is it only mysterious experience or temporary entertainment to make us immersed in the play for a while and lead us to an exit? It may be true for some. They may overlook works during a cultural leisure life. However, when we recollect such images of transformation and generation, shapes uncertain whether it is a plant or an animal, ghost or nothing, and stays in our mind, we may not encounter with this world as the way before. The time has struck when characters are not read as character, and objects are wriggling as non-object. I hope I will remember later that its seed was planted when encountering with these works.
Gram refers to action of the fundamental power differentiating certain character types. In case nought is ahead of the existence, every generation stays at the falsity or lack. The existence takes priority and it means generation not as the static Moyangsae but as dynamic Moyang-se. Hence, though invisible, there is already something always moving. The white ground of the Chinese drawing paper is the place charged with infinitely flowing power rather than voidness where there is nothing. The concept 'trace' devised by Derrida, always as the source trace, is closed to 'corps sans organs' by Deleuze and Guattari. Whatever it may be called, we are forced to encounter with generation. Ideas by the artist Koh Yoon Suk anchor on the deep abyss of the Buddhist learning but on the other hand extend to the limit of modern ideas. It is a tendency to express interest in and expect of the artist's journey hereafter after admiration for her present. Making someone an artist depends on how she invokes the power loaded to her body rather than on her belief, thinking and intention. In other words, the key is an ability to contain the power of generation into a process of transformation and transition while drawing it into certain form and transcending it. Rather than being bound in the solid fetters of characters and collapsed without any form to be touched, a new form is made, which may not be perceived with the existing sense and recognition. A line of flight is a paradoxical title for such an ability and expression. When the brush of the artist transcends the traces fixed by the tradition and the norm and its flight begins, we get into confusion but we come to recognize that the world of the tradition and the norm was already dead and know the formation of a strange but living world when overcoming such confusion.
For Russian futurists, it was to write a poem like incantation made for operating the character 'stone' with weight and physicality of an actual stone. In such a sense, maybe artists are like a magician. They are destroyers of this world causing us to see the invisible, hear the inaudible so fail in living a life like before any more through collapsing the order of the familiar sense. Unless the artists do not give us such an ominous prophecy, who save us from this dead world? Hence, I express my interest in and expect of the following works of the artist Koh Yoon Suk. I'd like to see a flight line of strokes like a poem generating birds and trees, turtles and bugs, fish and wild flowers through connecting stone to 'stone'.
Choi Jin Seok(Member of research community 'Suyunomo-N' / Research professor of Ewha Womans University)
一中一切(일중일체)_33.4×45.5cm_Mixed Media on Canvas_2016
마음자리_말도 끊기고, 생각도 끊긴
말과 생각은 잠시 세상을 보는 수단 하나를 얻는 것일 뿐, 그것을 고집하는 순간 괴로움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삶이 본디 괴로운 것이 아니라 나의 무지와 편견, 집착으로 인해 괴로운 것입니다. 들꽃 한 포기, 그 위를 사뿐사뿐 날아다니는 나비들, 나의 키를 넘어 선 나무 그대로 서로가 서로를 살리고 있는 세계. 나에게는 그 모든 존재들의 힘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가운데 내가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 집 베다란 밑에서 매서운 겨울 바람을 이겨내고, 아가 고양이들을 홀로 낳고 잘 키우는 고등어무늬 고양이와 나는 하나입니다. 고양이와 나 그 자체로 독립적인 삶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나의 피부, 고양이의 털은 나이자 세상이고 세상이자 고양이이고, 고양이이자 나인 공존의 통로들입니다. 평등의 증거입니다. 나와 베개를 나누어 잠드는 고양이와 함께 우주를 호흡하는 나비와 키 작은 제비꽃과 분홍빛 개여뀌의 몸을 이루는 생명은 보이지 않는 힘으로 온 우주에 가득 차 있습니다. 나와 너, 모든 존재 생명의 몸은 우주의 크기와 같습니다. 막힘 없이 무한하게 의지하고 있는 모습은 끝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추상적으로, 부분적으로 포착하는 생각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깊고 묘한 것입니다. 변화란 늘 부동 그 자체의 변화이기 때문에 더더욱 말로나 생각으로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내가 있음과 없음, 내가 살고 죽음은 나 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나무와 하늘과, 꽃과 새들과, 달과 무수한 별들과의 의존관계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성은 모든 만물의 쉼터입니다. 나의 모습은 모든 인연이 만나 이룬 잠시의 모습일 뿐 그 자체로 우주의 전체 모습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각각의 존재는 우주의 부분이 아닌 우주 그 자체입니다. 각각의 모든 존재가 있음으로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존재할 수 있고, 각각의 모든 존재들이 없음으로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한 생명의 태어남에서 새로운 우주의 태어남을 볼 수 있고 한 생명의 죽음에서도 한 우주의 죽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태어남은 죽음과 같이 하고 죽음은 태어남과 같이 하는 생멸동시의 변화들이 무한히 겹쳐진 우주입니다. 때문에 바람 한 점 이는 것도 우주의 모든 움직임이고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움직임도 그대로 온 우주를 관통하는 우리 모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존재들이 무한한 우주의 모든 생명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결과가 되기도 합니다. 모든 존재들은 저마다 자기의 시간에 따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의 결정은 우주의 모든 존재들의 관계에 의존하기 때문에 한 존재의 시간이 결정되려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의 시간이 원인이 되어야 합니다. 곧 서로 다른 시간의 요소가 한 사람에게 그 사람의 시간이 되게 합니다. 이런 관계에서 본다면 한 사람의 시간 속에는 우주의 모든 다른 시간이 들어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량없는 존재들의 한량없는 시간이 한 사람의 시간을 위해 존재하고 이 한사람의 시간도 한량없는 사람들의 시간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아울러 과거와 미래의 끝없는 시간은 한 순간, 곧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을 위한 원인으로 존재합니다. 한없는 시간이 한 순간의 변화일 뿐입니다. 공성의 창조적 변화인 한 순간의 시간이 모든 순간의 시간을 창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없는 시간과 한 순간의 시간이 공성으로 아무런 다툼이 없는 데서 현재의 한 순간이 됩니다. 시공의 제한을 넘어선 사람은 현재의 한 순간을 철저히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삼세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살고 있고, 아울러 한 공간을 차지하고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온 우주를 넘나들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 그대로 모든 것이며 모든 것 그대로 하나인 것입니다. 나를 나로서 살게 하는 모든 존재들에 대한 자비는 실은 나 스스로에게 베푸는 자비로, 이는 나를 이루고 있고, 내가 이루고 있는 온전한 생명의 장을 이루는 바탕입니다. 꿈같고, 물거품과 같은 순간들의 보이지 않는 생명들의 흐름을 맑게 드러내고자, 잠시 방편을 그립니다. -스승들의 ‘지혜의 말’을 빌어서 쓰다.
2016년 9월 23일 금요일 새벽에, 고윤숙
眞性甚深(진성심심)_21.2×33.4cm_Mixed Media on Canvas_2016
Place of Mind_Punctuated speech and thinking
Speech and thought make us obtain a means of seeing the world for a while but obsession with them may cause us to suffer agony. A life is not a thing painful itself but distress may be caused from our ignorance, prejudice and obsession. A wild flower, butterflies lightly flying over there, tress taller than me and the world saving each other. The strength of such beings comes into me. And I also come into everything. I feel we are one, I and a mackerel-patterned cat that gave birth to kittens by herself against the bitter winter wind under the veranda of my house. For the cat and me, there is no independent life at all. My skin., cat hair is both me and the world, the world and the cat, and the cat and me, so both passage of coexistence and evidence of equality. Along with the cat sleeping on my pillow, life forming the body of butterflies breathing the universe, shorter violets, pink smartweeds are filling the space under the invisible power. I and you, body of the life in every existence is identical to the universe in size. Their endless and free reliance is deep and mysterious that may not be understood by capturing the world boundlessly changing in an abstract and partial way.. A change is the transition of the immovable itself so may not be known with speech or thinking. My existence and non-existence, my life and death happen from the dependence on trees and the sky, flowers and birds and the moon and a myriad of stars. Such voidness is a rest area for all things. My image is temporary achieved by encounter with every connection, becoming the entire image of the universe. In other words, each being is not a part of the universe but the cosmos itself. Every being in the universe may exist along with each existence and every being may not exist since there is no being each. Birth of the new universe may be seen from that of a life, and death of the universe may be seen from that of a life. In addition, the universe has infinitely overlapped changes of Saengmyeoldongsi, in other words, birth sharing with the death, death sharing with the birth. Hence, a wind rising is every movement of the universe. Also movement of a vibrating bough is that of all of us penetrating the entire universe. Therefore, every being comes to be a cause and effect of every life in the endless universe. Every being lives a life under its time. Meanwhile, determination of such time depends on relations of every being in the universe so its time shall be a cause to determine time of a being. So element of time different from each other makes it be time of a person. Considering such relations, it shows that every different time of the universe comes into time of a person. Boundless time of boundless beings exists for time of a person and such time of such a person becomes a cause of time of boundless persons. Besides, endless time of the past and the future exists as a cause of a moment, or an instant when the heart stirs up. Unlimited time is only a change of a moment. Time of a moment, a creative change of voidness, creates time of every moment. Endless and instant time has no quarrel at all as voidness, being a present moment. A person beyond limitation of space-time, seemingly living a thorough life at the present moment, lives a free life crossing the three worlds,, and also seemingly occupying one space, lives a life crossing the entire universe. Everything of one and one of everything. Mercy on every being, making me live as I am, is mercy on myself actually, composing myself and being a basis for reaching a place of a complete life. I draw methods for showing clearly a flow of invisible lives at dreamy and foamy moments.
-Borrowed from 'saying of wisdom' by teachers for this writing At dawn, 23rd, Sep., 2016, Friday, KOH YOON-SUK.
雨寶(우보)_24.2×33.4cm_Mixed Media on Canvas_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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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윤숙 | KOH YOON-SUK | 高允淑
호 향산(香山), 산목재(山木齋), 회화
선화예술고등학교 졸업 |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 | 2016 제6회 [마음자리_말도끊기고 생각도끊긴] (한옥갤러리, 서울) | 2015 제5회 변이의 여백, "존재의 기억의 말을 걸다" (갤러리 M, 서울) | 2014 제4회 하나의 꽃 (한옥갤러리, 서울) | 2014 제3회 花開華謝, 꽃은 피고 지고 (가나아트스페이스, 서울) | 2006 제2회 北冥有漁(북명유어) (토포하우스, 서울) | 2004 제1회 거듭나기 (경인미술관, 서울)
단체전 | 2016 의난현예술학회대만한국미술교류전(宜蘭縣藝術學會臺韓美術交流展), 의난현, 대만 | 2016 제8회 샤샤전 갤러리이앙, 서울 | 2016 제28회 대한민국 미술대전서예대전 전각부문 입선 | 2016 제2회 열림 조고관금(照古觀今)전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아트센터, 서울 | 2015 제7회 샤샤전 동국아트갤러리, 서울 | 2014 의난현예술학회대만한국미술교류전(宜蘭縣藝術學會臺韓美術交流展), 의난현, 대만 | 2014 제6회 샤샤전 갤러리이앙, 서울 | 2014 제43회 이서전(이화여대 서양화과 동문전) 인사아트스페이스, 서울 | 2014 제1회 열림필가묵무(筆歌墨舞)전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아트센터, 서울 | 2013 제5회 샤샤전 선화예술고등학교 솔거관, 서울 | 2011 세계평화미술대전 서예 한문부문(금문) 특선, 전각 입선, 안산단원전시관, 안산 | 2010 제14회 세계서법문화예술대전 한문서예(금문) 입선, 한국미술관, 서울 | 2010 제13회 신사임당, 이율곡 서예대전 전각 부문 입선,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서울 | 2010 제7회 서예문화대전 한문서예(금문) 특선,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서울 | 2009 제7회 한국서화명인대전 출품, 전각 부문 입선, 세종문화회관 별관 광화문갤러리, 서울 | 2009 제1회 경향미술협회전 서예 한문부문(전서)출품, 경향갤러리, 서울 | 2009 제13회 세계서법문화예술대전 서예 한문부문(전서)대련 동상. 한국미술관, 서울 | 2009 제6회 서예문화대전 서예 한문부문(전서) 입선.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서울 | 2009 제4회 경향미술대전 서예 한문부문(전서) 입선, 경향갤러리, 서울 | 2008 제12회 세계서법문화예술대전 서예 한문부문(예서)대련 특선,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서울 | 2008 제11회 신사임당, 이율곡 서예대전 서예 한문부문(예서) 입선,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서울 | 2008 “한국미술의 빛” 초대전 서양화 부문 출품, 밀라노 브레라아트센터, 이탈리아 | 2008 “한국미술의 빛” 초대전 서양화 부문 출품, 갤러리타블로, 서울 | 2008 제3회 경향미술대전 서예 한문부문(예서) 입선, 경향갤러리, 서울 | 2007 제10회 안견미술대전 서예 한문부문(예서) 입선, 서산시문화회관, 충청남도 서산시 | 2007 아트엑스포말레이시아, 서양화 부문 출품, 갤러리미즈, MECC, 말레이시아.
현재 | 동묵헌, 열림서예연구회 회원, 수유너머N 서예반 강사
E-mail | purple22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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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61006-고윤숙 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