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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금보성아트센터 한국작가상 심사결과 및 수상기념전
유휴열 展
2016. 6. 27(월) ▶ 2016. 8. 21(일) Opening 2016. 7. 7(목) PM 7 시상식 및 평론집 출판기념회 2016. 8. 9(화) PM 7 서울시 종로구 평창길 338 | T.02-396-8744
심사위원 | 고충환ㆍ김종근ㆍ박영택ㆍ신항섭ㆍ전혜정(미술평론가)ㆍ이기영(월간미술 대표) 이상 6명 부대행사 | 금보성아트센터 평론 공모 주관 | 금보성아트센터
심사평 [한국작가상]
유휴열, 반짝이는 영(靈)들의 춤.1
바람의 머리냄새를 맡아
쏜살같은 수평을 뚫고
솟구치는
저, 훨
안지명의 시 구절에는 춤추는 나비의 생명의 몸짓이 날개짓을 한다. 무용가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은 “춤꾼은 신들의 메신저(Dancers are the messengers of the gods)”라고 했다. 유휴열은 다양한 매체(medium)로 모든 신들의 영(靈)을 손끝으로 붙잡아 작품의 무늬 무늬마다 나비처럼 춤을 아로새기고 ‘영매(medium)’로서 거기에 혼을 불어넣는 춤꾼이자 메신저이다. 최근 집중하고 있는 알루미늄 작업은 금속판을 펴고 굽히고 두드리는 작업을 통해 꿈틀대는 춤들이 새겨진다. 영들이 날아오른다.
춤사위에 세상의 모든 시름을 풀어헤치는 <추어나 푸돗던고> 연작의 춤사위는 죽을 운명인 땅과 신적 존재인 하늘 사이에 있는 인간이 자신의 몸짓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순응하면서도 하늘에 닿고자 하는 우리의 모습을 담고 있다.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는 죽을 운명인 인간이 땅 위에서, 그리고 신적인 것들인 하늘 아래에서 사방을 간직하며 땅을 결집하며 모아들이는 것을 건축(혹은 사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유휴열의 작품들은 전주 모악산의 모든 신적인 것들을 작품으로 끌어들여 응축하고 있다. 그래서 작품 속 인물들의 춤사위는 땅도 하늘도 아닌 신명의 세계를 손짓하고 있다. 무거워 보이는 재료임에도 불구하고 땅과 하늘 중간에서 춤을 추고 있는 유휴열의 인물들은 단순한 형태로 복잡하고 고단한 현실의 모든 제약을 벗어버리고 춤을 춘다. 나비처럼 새처럼 쏜살같이 저 하늘을 향해 솟구치지는 않지만 유휴열 작품 속의 신명은 우리와 함께 이 땅에서 춤을 춘다.
나비는 봄여름 태양 아래 그 화려한 날개를 뽐내고 날아올라 부지런히 꽃들을 누비며 가을 바람과 함께 날개가 쇠하여 알을 낳는 일생일대의 과업을 하고 사그라드는 것이 제 운명이지만, 유휴열은 4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을 오로지 작품 작품 작품에만 매진하였다. 오랫동안 ‘전주작가’로서 입지를 다져왔지만, 소위 장식적 모더니즘이 시장을 지배하던 한국 미술계가 유휴열의 날개짓에 같이 신명나게 춤추지 않았음은 어찌보면 당연하고도 슬픈 일이다. 여전히 모던적 강세에 자본주의와 미디어의 총애를 받으며 작품의 상품화와 작가의 스타화 브랜드화와 맞물려 한국적 팝아트가 K-Art의 첨병으로 문화상품의 효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행태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유휴열의 화려한 날개짓을 다시 주목하는 것은 한갓 유행 상품의 운명이 될 수 있는 우리 미술계 여러 작품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게다가 최근 불거진 이른바 대작(代作) 논란과 위작(僞作) 논란, 그리고 여러 미술인들의 도덕성이 도마에 오른 지금, 유휴열의 오히려 답답해 보이는 무섭도록 한결같은 성실성과 이제 막 노년기에 접어든 작가가 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대작(大作)들은 그가 바로 우리 미술계가 찾고 있었던 산자락에 숨어있는 대가(master)요, 작품들은 우리가 그렇게도 목말라 왔던 우리만의 마스터피스(masterpiece)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유휴열이 마음껏 날개짓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주고 그 반짝이는 아름다움을 다 같이 지켜보며 춤출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한국작가상 수상 소식은 최근 어두웠던 미술계에 그의 작품처럼 밝은 빛을 내뿜는 뉴스로 다가온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춤의 본질은 현실적인 운동이라기보다는 잠재적인 운동”이라고 썼다. 유휴열 작품은 견고하고 단단한 재료가 노래하듯 굽이굽이 우리의 산과 들, 강물처럼 춤을 추고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튀어나오고 들어간 형상들은 제각기 자신만을 뽐내지 않고 소리는 없으나 흥에 겨운 가락에 맞추어 움직임은 없으나 신명나게 춤추고 있다. 재료의 한계도, 형태의 제한도 벗어버린 그의 춤은 그래서 땅과 하늘, 생(生)과 사(死),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어느 누구도 향하지 않은 채 제 흥에 겨워 오랫동안 수많은 춤사위로 그의 열정을 내보이지만, 그 춤이 울리는 내면의 반짝임과 색채의 찬란함은 우리의 망막에 부딪쳐 우리 피 속의 혼을 일깨운다. 이제 유휴열은 모악산 자락 여려 영(靈)들과 혼(魂)들을 불러보아 자신의 춤을 온 세계에 내보인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나비가 제 날개를 드디어 창공으로 펼쳐 보이듯, 유휴열의 반짝이는 춤은 나비효과가 되어 온 세상에 날갯짓을 울리리라.
잉태도
탄생도
죽음도 춤이다. 훨훨
* 참고 시 - 안지명 ‘배추흰나비의 변이곡선’
유휴열의 작품세계, 신명나는 놀이의 아름다움.2
우리는 놀이와 일상을 분리하면서부터 어른이 되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에는 생활의 모든 것이 놀이였고, 모든 조형 활동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놀이와 일상, 놀이와 공부를 구별할 필요가 없었으며, 그림을 그리거나 흙으로 만들기를 하면서 누구의 평가를 기다릴 필요도 두려워할 이유도 없었다. 자라면서 우리의 삶은 점차 계획에 따라 진행되고, 작업에 따른 성과를 준비하게 되며 이로써 삶과 놀이는 점차 분리되게 된다. 놀이는 일상 삶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도피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가 되고 때로는 우리는 놀이에서만 자연인으로서 아무런 제약과 구속도 없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된다.
유휴열의 작품은 신명나는 한 판의 놀이이다. 색채도 형태도 모두 자유롭게 저마다의 표현을 내지르는 유휴열의 작품은 그 어떤 양식에도 장르에도 머무르지 않는 놀이와 같다. 그의 작품은 삶과 놀이가 분리되기 이전의 어린아이의 감성을 그대로 담고 있다. 어린 시절 우리에게 종이와 흙, 나뭇잎, 돌멩이 모두는 놀이감이었다. 놀이의 재료는 가장 잘 놀기 위한 선택사항이었을 뿐 꼭 그것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없는 것이다. 유휴열의 매체 탐색도 이와 같다. 회화, 조각 등 장르의 구분도 캔버스, 합판, 천, 알루미늄 등 재료의 구분도 작가 본인만의 소재를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할 놀이감일 뿐이다. 이 재료들을 자유자재로 마음껏 변용하며 한바탕 진하게 노는 그의 작업은 그러나 단지 재료들 사이를 유영하는 그러한 가벼운 놀이가 아니라 노동이 집약되고 치열한 성실성과 예술혼이 결합된 진중한 놀이가 되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태어난다.
유휴열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놀이 요소는 색채라고 할 수 있다. 초창기의 오방색 작품들은 절로 흥이나는 우리네 정서를 닮아있다. 어렸을 적 할머니의 이불 같은 키치스런 색감은 점차 다른 색들과 어우러져 흥이 겨워 춤을 추기 시작한다. 평평한 회화에서 조각을 닮아 점차 부조와 같은 형태를 띠게 된 유휴열 작품 속의 색들은 강렬함과 편안함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손으로 만져질 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형상들은 그러나 서로 다투지 않고 화면 속에서 빼곡히 조화를 이룬다.
유휴열은 본인의 작품을 '굿'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늘과 땅을 잇는 무당처럼 예술이라는 신성과 인간이라는 세상 사이를 본인이 선택한 매체들로 신명나게 노는 작가의 작품은 그래서 질펀한 놀이터가 된다. 작품의 재료인 매체(medium)가 영어로는 '영매'라는 뜻을 가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매체가 집약된 작품이야말로 저 세계와 이 세계를 잇는 영매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다. 항상 변화를 추구하기에 늘상 긴장하고 지루할 틈이 없다는 그의 작품은 그래서 응축된 에너지가 터질 듯 폭발하기 일보직전으로 보인다. 회화와 조각, 구상과 추상사이를 넘나드는 그의 작품에서 하나의 일관성을 찾는다면 바로 '흥'이다. 놀이가 된 작품 속 이미지들은 서로 빼곡하게 어깨를 맞대고 흥을 돋운다.
이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에 있을까. 즐겁기만 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 유휴열의 작품은 이를 모르지 않는다. 그의 작품 또한 수많은 이미지의 세계에서 선택되어 갈고 닦이고 색칠되는 치열함을 겪는다. 자르고 오리고 구부리고 붙여진 금속판들은 연마되는 그 시간만큼이나 오랜 시간을 작가의 거친 손에서 즐거이 그 본 모습을 버리고 다시 태어난다. 물고기와 꽃, 새와 나뭇잎이 되어간 이 금속판들은 우리 눈이 닿는 그 순간 꿈틀대며 눈에 닿는다. 작품을 손으로 만지지 않아도 우리의 눈은 이미 이 이미지들을 만지고 있다. 시각성을 넘어서 촉각성을 가지는 이 이미지들은 저마다의 흥으로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자 존 듀이(John Dewey)는 인류가 의복을 만들기 전에 장신구를 만들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따뜻하게 하기 위한 옷보다도 자신을 드러내고 주술적인 목적을 가진 장신구의 발달이 먼저 일어났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우리에겐 우리를 유용하게 할 그 무언가보다 우리를 표현할 그 무언가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듀이가 설명하듯이 유용한 노동은 가능하면 언제든지 의식과 제식의 수반에 의해 변형되며 직접적인 즐거움을 산출하는 예술에 속하게 될 수 있다. 표현과 주술의 목적에 제일 으뜸인 것은 바로 미술작품이 아닌가. 스스로 굿판을 벌이는 유휴열의 작품은 그런 점에서 우리의 본연의 욕구에 가장 충실한 것이다. 작가의 이름에 나타나는 쉴 휴(休)와 매울 열(烈)은 쉼과 놀이를 향한 맹렬한 작가의 욕구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유휴열에게 놀이는 생(生)의 에너지이다. 굽이굽이 넘실대는 알루미늄판의 율동은 그 시각적 촉각성을 넘어서 가상적 음악성을 들려주는 청각적인 효과를 일으킨다. 색채의 부르짖음 역시 축적된 에너지를 쌓아두지 못하고 작품 밖으로 넘쳐나는 표현주의를 보인다. 살아있는 한 놀이가 가능하고 가장 아름다운 놀이의 형태가 예술이라고 한다면 유휴열의 치열한 예술혼이 성실히 풀어낸 놀이의 예술은 마치 무당이 작두를 타듯이 굿을 하듯이 작품 속에서 흥이 넘쳐 살아난다. 놀이하는 인간이란 뜻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를 저술한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조형예술은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물질과 물질적 형태의 제약에 묶여 있어서 자유로운 놀이가 어렵고 손재주, 근면함, 끈질김의 특질이 놀이 요소를 막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용적인 목적으로 비놀이적 측면이 강하다고 설명한다. 하위징아는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조형예술이 의례에서 신성한 중요성을 가진 물체로서 인식되고 기능을 발휘했으므로, 조형예술 작품의 제작과 감상에서 의례의 놀이 특질을 자연스럽게 찾아낼 수 있다고 의례, 예술, 놀이를 연결시키고 있다.
유휴열의 작품은 물질적 조형성과 기술, 근면함과 성실성이 응축되어 있으면서도 그 강렬한 색의 표현과 역동적인 조형성으로 생에 대한 의례를 보여준다. 오랫동안 몰두해 온 노동 집약적 작업 활동을 살풀이 하듯 작품은 꿈틀되듯 만져질 듯한 시각적 촉각성과 경쾌하게 리드미컬한 시각적 청각성으로 생에 대한 찬가가 울려퍼지는 신명나는 굿판이 된다. 샤머니즘적 요소가 강하게 보이는 그의 작품들은 우리 생의 요소요소들을 삶의 에너지로 치유한다. 영원한 존재인 하늘과 죽을 운명의 인간이 존재하는 땅에서 유휴열의 작품은 이 둘 사이를 매개하는 흥의 놀이를 보여준다. 캔버스, 아크릴, FRP, 알루미늄판, 자동차 도료 등 유휴열이 사용하는 재료는 다분히 서양의 것이지만, 작품이 보여주는 흥의 놀이가 동양적인 정서와 흥을 뿜어내는 것은 우리의 하늘과 우리의 땅 그 안의 우리의 사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함박 웃는 아이들, 상여, 가족들, 이 산하의 꽃들, 풀들, 물고기들, 새들, 그리고 그 에너지를 노래하듯 춤추는 추상적 형상과 색들… 오랫동안 가장 신(神)들이 많은 영험한 산중의 하나라는 전주 모악산 주변에서 작업을 하여 그 신기를 받은 것 같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질적인 여러 재료들은 작가의 손에서 신기를 통해 재주를 부려 흥과 놀이를 거하게 펼친다. 응축된 에너지의 장(場)이 된다.
실러(Friedrich von Shiller)는 인간의 감각적 본성에서 나온 감각충동(der sinnliche Trieb)과 이성적 본성에서 나오는 형식충동(Formtrieb)이 서로 자신 안에 결합하고 상호작용하여 놀이충동(Spieltrieb)을 일으킨다고 보고 이를 아름다움과 예술의 핵심적 개념으로 보았다. 실러가 “인간은 아름다움으로는 오로지 놀이만을 해야 하며, 오직 아름다움으로만 놀이를 해야한다”고 썼듯이 유휴열의 놀이는 무당(Shaman)으로서의 작가가 그 신기(神氣)의 감각을 여러 재료의 형식들로 오랫동안 연마한 아름다운 한 편의 놀이다. 그리고 그가 펼쳐 준 놀이의 무대에서 우리는 신명나게 같이 놀고 있다.
전혜정(미술비평,한국작가심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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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휴열
전주대학교 미술교육과 졸업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졸업(회화전공)
주요 개인전 | 2016 유휴열展(금보성아트센타) | 2012 유휴열展 (전북도립미술관) | 2011 MANIF 서울 국제 ART FAIR (서울 예술의 전당.인사아트.뉴욕) | 2003 KOREAN MISSION TO THE U.N GALLERY (NEW YORK) | 2002 오사카현대미술관 (OSAKA) | 1997 NICAF 동경 국제 ART FAIR (동경 국제 전시관) | 1997 MANIF 서울 국제 ART FAIR(서울예술의전당) | 1993 공평 아트 센터 (서울) | 1991 금호 미술관 (서울) | 1985 GREENICH HOUSE(NEW YORK) | 1982 금호미술관 | 1982 GRAMBIHER (PARIS)
외 단체전 300여회 출품
수상 | 한국작가상(금보성아트센터) | BELGO 국제 회화전 특별상 (RUBENS 상) | 예술평론가협회 제정 최우수 작가선정 최우수 작가상 | 1997 MANIF 서울 국제 ART FAIR 대상 | 목정문화상 | 전북대상(전북일보사)
소장처 | 국립현대미술관 |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 서울시립미술관 | 부산시립미술관 | 광주시립미술관 | 전북도립미술관 | 호암미술관 | 금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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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60627-유휴열 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