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윤숙 展

 

변이의 여백,‘문자의 기억’에 말을 걸다

Margin of Variation, Talking to 'Memory of Characters'

 

-스물둘

 

 

갤러리 M

 

2015. 10. 21(수) ▶ 2015. 10. 27(화)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4길 12 | T.02-737-0073

 

gallerym.kr

 

 

 

봄-일곱

 

 

[비평] 이진경(수유너머n 회원, 서울과기대 교수)

글자가 그림이 될 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이런 대비를 통해 추상은 미메시스 안에 존재하는 모방의 일부가 아니라, 그것 자체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독자적인 길이 되었다는 것이다. 동일화하려는 충동과 변형시키려는 충동, 그것은 처음부터 다른 방향을 향해 난 다른 길이었다. 모방 안에도 어느새 끼어드는 변형이 있게 마련이고, 추상 안에도 피할 수 없는 동일성이 있게 마련이다. 문제는 어떤 평면/구도(plan) 위에서 다른 것을 위치 짓는가 하는 것이다....

...전서나 갑골문처럼 그림의 형상을 이용해 글자를 변이시켰던 이전 전시의 경우, 그림의 크기가 갖는 자유로움과 그림이 그려지는 2차원 공간으로 되돌아가면서 의미화하는 글자의 배열을 벗어날 수 있었다면, 글자를 글자인 채로 둔 채 그 와해되는 지점을 보여주려는 이번 전시에서는 글자를 하나하나 분리시킴으로써 단선화된 의미화의 수로(水路)에서 벗어난다. 글자들은 낱낱으로 고립되고 흩어짐으로써 애초에 두보가 전하고자 했던 시로부터, 그 의미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이 경우 남는 마지막 문제는 한 자 한 자가 그려지는 캔버스의 사각형이 애초에 글자들의 가두었던 사각형을 되살려내게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이를 깨기 위해 그 사각의 공간 안에서 글자들로 하여금 모든 방향으로 움직이며 흘러가게 한다. 굳이 가운데를 차지하려 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굳이 구석만을 고집하지도 않는다. 넓은 여백에 느긋하게 흔들리기도 하고 캔버스가 좁다는 듯 프레임에 의해 잘리며 주어진 공간 밖으로 밀치고 나간다. 삐딱하게 서 있기도 하고 술 먹은 듯 비틀거리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사각형 안에서 사각의 틀을 벗어난다. 캔버스는 그 선들이 노는 공간이 됨에 따라, 한자의 사각형을 지운 채 순수 배경이 된다. 그 선들이 더욱더 뻗어나갈 공간을 의도적으로 잘라내 역으로 그 바깥의 연장된 공간을 상상하게 하는 프레임이 된다. 아니, 다양한 종류의 이질적인 다른 글자-그림들과 다른 크기를 갖는 이 한자의 선들이 섞이고 침투하는 대기/분위기(atmosphere)가 된다. 중첩되며 서로 긁히며 드러난 색조의 여러 지층들과 상이한 질감의 재료들이 섞이며 만들어지는 촉감적 표면이 된다. 우리의 시선은 거기에 가 닿으며 이제 그 표면을 만지기 시작한다. 감각의 변이가 발생하는 질감적 표면이다. ‘변이의 여백’이란 변이의 여지를 남겨 보여주는 텅 빈 공간이 아니라, 이처럼 진하게 겹치고 섞이며 스스로는 물론 거기 와 닿는 시선마저 촉감으로 변성시키는 그런 꽉 찬 여백인 것이다.

 

 

소리-스물

 

 

여기서 더 밀고 나간가면 어떻게 될까? 더 빠른 속도로 글자의 선과 구부러진 각도를 가로질러 범람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 속도로 운동하는 힘을 밀고나가 글자들이 더욱더 흘러내리도록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추상의 끝까지 밀고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유롭게 구부러지고 또 그렇기에 얼마든지 곧게 펴질 수도 있는 선의 운동 그 자체, 우주적 힘을 담아내며 뻗어나가는 선과 구부러지는 마디, 원심력을 만들어내며 힘차게 구부러지는 선, 잡을 수 없이 구불구불 비틀어지는 선 등등. 잭슨 폴록이 색채들의 방울들을 떨구며 만들어냈던 색채적 추상기계와 다른 차원에서, 힘을 표현하는 속도와 운동, 순수한 강도만을 남기는 선적(線的)인 추상기계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더는 글자와 절대적으로 절연한 추상기계가 될 것이다. 그건 글자와 절대적으로 절연한 순수한 비형상적인 선의 ‘형상’ 그 자체만 남게 될 것인데, 그게 그림으로서 좋은 것이 될 수 있을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다.

 

 

구름-스물셋

 

 

[편지] 김대승(영화감독)

다른 글자는 뻗쳐서 힘이 있고 ‘강’자는 유독 조심스러워 보입니다. 글자의 흐름이 강물 같고 강에 드리워진 꽃 그림자가 보이는 듯합니다. 강 위에 진달래 언덕이 있고 그 빛이 물에 반영된 듯 말입니다. 간간히 떠가는 연두색 새 잎도 보이고... 봄의 들판을 강물이 가로지르지만 다시 그 강물에서 봄의 산하가 피어나는 듯합니다.

정신없는 변화의 속도는 이제 디지털이라는 말조차 낡아 보이게 합니다. 그 속에서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는 소리는 높지만, 정작 그 정신을 되살리려는 노력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다시 문자로 돌아가는 작가의 거슬러 오르는 걸음이 수고스럽게 느껴지는 이유일 것입니다.

때를 맞춰 내리는 좋은 비가 꽃을 피우는 광경이 두보의 시에서 작가의 화폭으로 고스란히 담깁니다. 그리하여 아주 오래 전 봄비를 바라보던 두보의 시간이 고윤숙 작가의 공간에서 꽃 피우고 있는 듯합니다. 오래된 문자의 정서와 문자가 채우는, 혹은 비우는 공간이 비를 맞으며 바라보는 봄의 숲처럼 깊고 넓게 느껴집니다.

 

 

 

붉다-서른넷

 

 

[축사] 이병헌(영화배우)

과감하고 거침없는 필체에서 느껴지는 남성적인 힘과 여유마저 느껴지는 곡선의 노련미가 한데 잘 어우러진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작품 자체에 대한 주제넘은 평보다는, 작품을 처음 본 순간, 작가가 보냈을 땀과 고통의 긴 시간을 알기에, 더더욱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마흔하나 | -마흔둘 | 반갑다-마흔셋 | 비-마흔넷

(오른쪽으로부터)

 

 

철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예술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결국 본질적으로는 변이하는 것을 재발견하거나 다시금 그것에 도달하는 데 있으며, 따라서 변이가 기억을 통해서 코스모스(혹은 뒤섞인 지층들로 구성된 세계)로 보존해 왔던 것을 새삼 변이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무한속도> 제롬 로장발롱 지음

 

새로운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과의 차이를 통해서만 새롭다고 말해질 수 있다. 따라서 첫째, 새로운 것은 어떤 것이 존속하고 있음을, 즉 변이가 지층화되었으며, 나타나자마자 사라지는 것에 내재하는 순간적 망각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전제한다. 그러나 둘째, 새로운 것은 존속하는 것이(물리-화학적 지층이 본질적으로 그러하듯이, 단순히 불변적인 것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존속하는 대신) 그럼에도 계속 변이하고 있으며, 변이를 통해 계속 차이 나는 것을 생산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무한속도>, 제롬 로장발롱 지음

 

[작가노트]....나는 왜 초서체의 흐름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끼는가? 이 낱자 하나 하나의 아름다움을 더 밀고 나아가볼 수는 없는가? 낱자가 가지고 있던 한정된 의미와 이미지가, 두보를 통해서 하나의 시로 엮어지면, 그의 고된 삶과 세상 돌아가는 바가 사계절과 밤낮의 변화와 녹아들어 나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 새삼스레 놀라웠고, 이러한 의문들이 맞물려 나의 선택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믿고 탐구하는 것으로 이번 전시의 주제를 정하였다.

이 실험이 어떤 결과에 이르든지, 서예라는 예술은 무수히 많은 이들의 선택에 의하여 그 흐름을 잇고 있고, 그 과정에서 무수한 변이들이 창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이 선택의 흔적들이 어디로 나아갈지를 사실 나 자신도 아직 잘 모르고 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세상에 열려 있는 다양한 방식의 길 중에서, 왜 이 길을 선택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성실한 답변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나 자신에게 묻고 답하는 흐름의 흔적인 것이다. 다만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 흔적을 통해서 유전되기를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결국 세상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가 더욱 명료해지고, 풍부해지는 것이다.

-산목재에서, 2015.10.12.

 

 

 

 
 

고윤숙 | 高允淑 | KOH YOON SUK) | 호 향산(香山 Hyangsan), 산목재(散木齋)

 

선화예술고등학교 졸업 |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열림서예연구회 회원

 

개인전 | 5회 | 2004-경인미술관 | 2006-토포하우스 | 2014-가나아트스페이스,한옥갤러리 | 2015-갤러리M

 

2014 제1회 열림필가묵무(筆歌墨舞)전,이화여자대학교 이화아트센터 | 2013, 2014, 2015 샤샤전(선화예고동문전) | 2014 대만 ․ 한국미술교류전-의난현예술학회 | 2014 43회 이서전(이화여대서양화과동문전) | 2008 한국미술의 빛 초대전 서양화부문 출품, 갤러리타블로/밀라노 브레라아트센터(이탈리아) | 2007 아트엑스포말레이시아전

 

2007~2011 안견미술대전 | 경향미술대전 | 신사임당-이율곡 서예대전 | 세계서법문화예술대전 | 서예문화대전 | 한국서화명인대전 | 세계평화미술대전 등 13회 수상

 

E-mail | purple2233@hanmail.net

 

 
 

vol.20151021-고윤숙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