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만수 展
" 겹겹의 시간들 "
봄눈1324_161x130cm_캔버스에 채색_2013
갤러리 울
2015. 3. 25(수) ▶ 2015. 4. 26(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중앙로 1286 아람누리 지하3층 | T.031-922-7797
봄밤1501_227x181cm_캔버스에 채색_2015
이만수의 회화
가두리 속 삶의 정경 위로 꽃비가 내리다
고충환(Kho, Chung-Hwan) ......작가는 그림을 마당에다가 비유한다. 그리고 알다시피 마당은 평면이다. 이렇게 해서 작가의 그림이 평면으로 와 닿는 이유가 설명이 된다. 너무 단순한가. 그래서 허망한가. 주지하다시피 평면은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핵심이며 중추가 아닌가. 회화가 가능해지는 시점이며 최소한의 조건이 평면이다. 이처럼 평면을 추구하는 이면에는 회화의 본질과 이유를 묻는 개념미술의 일면이 있고, 회화의 가능조건으로 회화를 소급시키는 환원주의적 태도가 있다. 작가는 말하자면 마당이라는 결정적인 베이스를 가정함으로써, 그리고 마당과 평면을 일치시킴으로써 의식적으로나 최소한 무의식적으로 회화 자체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마당은 누워있는 그림이고 평면은 서 있는 그림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누워있는 그림으로 하여금 어떻게 서 있는 그림에 일치시킬 것인가. 서 있는 그림을 어떻게 마당처럼 쓸 것이며 마루처럼 닦아낼 것인가. 여하튼 순백의 화면을 그렇게 쓸고 닦아야 비로소 그림이 되지가 않겠는가. 무정의 화면을 유정의 화면으로 바꿔놓을 수 있지가 않겠는가. 여기서 마당은 다른 말로 하자면 장이다. 장은 알다시피 회화의 됨됨이와 관련해 미학적으로 더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알려진 개념이다. 회화의 전제조건으로서의 장과 마당과 평면이 하나로 통하는 것. 그렇다면 작가는 이 장이며 마당이며 평면 위에 무엇을 어떻게 올려놓고 있는가. 작가의 그림은 그 실체가 손에 잡히는 모티브들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평면적이고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다. 이를테면 핸드폰을 거는 사람, 물끄러미 쳐다보는 사람, 종종걸음을 걷는 사람, 새와 오리와 강아지 그리고 가옥과 같은 일상의 정경들이 전개되고 있지만, 그것들은 하나같이 어떤 감각적 실재로서의 배경을 가지고 있지가 않다. 적어도 외관상 깊이가 없는 평면 위에 일상으로부터 채집된 단상들이며 모티브들이 마치 콜라주 하듯 얹혀 있다(작가는 실제로 콜라주를 주요한 방법으로 차용하기도 한다). 원근법에 의한 환영적인 깊이나 화면 속에 공간적인 깊이를 조성하는 내진감이 만들어낸 화면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에서 감각적 현실을 재현한 공간으로서보다는 작가의 관념에 의해 재구성된 관념적 공간에 가깝다. 말하자면 작가의 작업에서 관심의 축이며 방법론의 축은 감각적 현실의 재현에 있기보다는 일종의 관념적 공간을 재구성해내는 일에 그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것. 그렇다면 이렇게 재구성된 작가의 관념을 읽어내는 일이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작가는 자신의 관념으로 세계를, 자연을, 일상을 어떻게 재구성해내고 있는가. 관념의 프리즘을 통해 본, 그래서 작가가 제안하고 있는 우주의 꼴은 어떤가.
산조1306_162x131cm_캔버스에 채색_2013
작가는 그림을 마당(사실상 작가의 우주에 해당하는)에다가 비유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림을 마당처럼 비로 쓴다. 비유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쓴다. 가늘고 딱딱한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일종의 작은 비나 풀을 먹여 빳빳하게 세운 붓 내지 끝이 무딘 몽땅 붓을 붓 대신 사용하는데, 여러 겹 덧바른 안료 층 위에 이 비로 쓸어내리면 소지 자체의 신축성 탓에 화면에 비정형의 홈이며 자국이 생긴다(홈은 소지의 특성에 따라서 캔버스보다는 종이에서 더 또렷한 편이다). 그리고 그 위에 또 다른 안료 층을 덮고 마치 걸레로 마루를 닦아내듯 화면을 물로 씻어내는데, 그 수위를 조절하는 여하에 따라서 그림이 흐릿해지기도 또렷해지기도 한다. 여하한 경우에도 색 자체가 드러나 보이는 법은 없는데, 마치 시간의 지층으로부터 끄집어낸 듯, 기억의 한 자락을 건져 올린 듯, 과거로부터 불현듯 현재 위로 호출된 듯 아득하고 아련한 분위기가, 작가 고유의 아이덴티티랄 만한 특유의 아우라가 조성되는 것이다. 아마도 작가의 유년에 기인할 절간의 벽화처럼 시간의 흔적이며 풍화의 흔적 그대로를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색감이며 색채 감수성이 확인되는 부분이다. 이로써 어쩌면 작가의 관심은 그 흔적에 있을지도 모르고, 아예 어떤 흔적(이를테면 삶의 흔적 같은)을 만들고 조성하는 일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삶 자체보다는 삶의 흔적에 그 초점이 맞춰진 것인데, 비로 쓸어내린 스크래치(그 자체 삶의 상처며 트라우마의 표상으로 볼 법한)도, 굳이 씻어내고 닦아내면서까지 얻고 싶은 색 바랜 색감도 바로 그 흔적을 부각하는 일에 종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련의 과정 자체가 꽤나 의미심장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작가는 비로 쓸고 걸레로 닦아내고 물로 씻어내는 과정을 통해서 그림을 그리고 만든다. 비로 쓸고 걸레로 닦아내고 물로 씻어낸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만든다? 이야 말로 자기수양이고 수신이 아닌가. 전통적인 그림에서 요구되던 태도며 덕목이 아닌가? 윤동주의 <참회록>에는 밤이면 밤마다(왜 하필이면 밤인가? 시인에게 밤은 무슨 의미인가? 암울한 시대며 현실에 대한 표상? 무기력한 존재의 표상?)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거울을 닦는 시인이 나온다. 뭘 참회할 일이 그렇게나 많았을까. 더욱이 시인이. 시인의 참회이기에 그 참회가 예사롭지가 않다. 시인의 참회? 자기반성적인 인간의 참회? 거울은 자기를 반영하는 물건이다. 그러므로 거울을 닦는 행위는 사실은 자기를 닦는 행위이다. 작가는 이렇게 비로 쓸어내고 걸레로 닦아내고 물로 씻어내는 그림을 그리고 만들면서 사실은 자기를 쓸어내고 닦아내고 씻어내고 있었다(방심과 소요를 위한 방편으로서 의미기능하고 있는 낚시 역시 일정하게는 이런 수신과 통한다). 그렇게 자신의 관념과 그림의 방법론을 일치시키고 있었다. 흔히 관념과 방법이 겉도는 경우와 비교되는 것이어서 더 신뢰감이 가고 설득력을 얻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산조1319_118x91cm_캔버스에 채색_2013
작가의 그림은 감각적 현실을 재현한 것이기보다는 관념적 현실을 재구성한 것이라고 했다. 마당이며 장이며 평면적 조건으로서 배경을 대신한 것이나, 쓸고 닦고 씻어내는 방법론에다가 자기수양이며 수신의 관념적 의미 내지 실천논리를 일치시킨 것이 그렇다. 이처럼 관념적인 그림은 상대적으로 상징이며 표상형식이 강한 편이다.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상징으로는 대개는 화면의 정중앙에 위치한 큰 물방울과 원형을 들 수가 있겠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물방울은 사람들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을 상징한다고 했다. 삶의 희로애락을 압축해놓은 상징이다. 그리고 그 상징적 의미는 작가의 그림을 시종 뒷받침해온 산조의 주제의식과도 통한다. 산조 곧 노랫가락이란 것이 원래 삶의 희로애락을 녹여낸 것이 아닌가. 그리고 원형은 완전하고 온전한 삶의 지향을 상징하고, 반복 순환하는 존재의 원리(비의?)를 상징한다. 알다시피 원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밑도 없고 위도 없다. 구심력과 원심력으로 작용하는 운동이 있지만 방향도 없다. 다만 끊임없이 연이어지면서 되돌려지는 과정이 있을 뿐. 아마도 그렇게 연이어지면서 되돌려지는 원주는 이렇듯 반복 순환되는 존재와 더불어 윤회하는 존재도 의미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 억만 겁의 원주 위에 잠시 잠깐 등록되어졌다가 삭제되는 찰나적인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처럼 의미심장한 의미들을 각각 물방울과 원형이라는 상징과 표상형식에 담아냈다. 여기서 상징과 표상이 강하면 자칫 그림이 도상학적으로 빠질 수도 있는데, 그러나 작가의 그림은 도상학에 빠지지가 않는다. 알다시피 비로 쓸고 걸레로 닦아내고 물로 씻어내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상징과 표상의 꼴이 그림의 살의 일부가 될 지경으로 스며들게 한 것이다. 상징과 표상의 의미를 무리 없이 전달하면서도 도상학에 빠지지 않는 것, 그것은 전적으로 감각의 문제이며 작가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관념적 현실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렇게 재구성된 현실을 한정하는데, 바로 그림의 가장자리를 일종의 띠 그림으로 둘러친 것이다. 삶이 전개되는 장으로서의 마당이 갖는 의미를 삶의 가두리라는 또 다른 의미로 강조한 것이다. 삶의 의미를 지시하기 위해 각각 마당과 가두리가 호출되고 있는 것인데(보다 일반적으론 무대의 개념을 떠올려볼 수가 있겠다), 현실을 재구성하기 위한 일종의 관념적인 장치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리고 그렇게 재구성된 현실 위로 꽃비가 내린다. 매화 꽃잎이다. 어떤 매화 꽃잎은 무슨 밭고랑인양 가로 혹은 세로로 줄을 짓고 있어서 저마다 살아온 삶의 고랑(작가의 용어로 치자면 주름)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어떤 매화 꽃잎은 별자리로 둔갑해 사람들의 꿈을 대리하고, 이도저도 아닌 꽃잎들은 그저 삶의 정경 위로 축복처럼, 위로처럼 흩날린다. 그리고 그렇게 흩날리면서 쓸쓸한 삶을 감싸 안는다.
양지 1229_181x227cm_캔버스에 채색_2012
작가노트 나의 기억 속에서 마당은 숲-소리와 시시각각 변하는 색들과 비와 눈 등 자연의 모든 현상들이 관찰되는 장소이며, 이른 아침의 고요함, 한낮의 적막함과 비밀스러움, 오후의 느릿함 등이 느껴지는 감성적인 공간이 된다. 또한 마당은 자연과 인간 등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며, 현실 속에서 삶의 희열과 욕망으로 인한 집착과 갈등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현실적인 공간이 되며, 일터이면서 쉼터인 장소로 인식된다. 누군가는 여기에 앉아서 바깥 세상을 이해하고, 안쪽 세상을 들여다본다. 순례자들처럼 이곳을 통로로 하여 밖으로 나가고 들어오며 혹은 정주하고 ... 늘 새로운 공간이 된다. 이러한 흔적들이 리듬처럼 울려 퍼지고, 마당에 먼지처럼 쌓여 있다. 마당을 쓸거나 혹은 무엇인가를 씻어 낸다는 것은 그 속에 묻혀 있는 주름들을 불러내고 사유하는 일종의 내면적 행위이다. 이러한 생각은 칠하고 파내고, 다시 메우고, 닦아내는 나의 작업과정 속에 적극적으로 드러나 있는데, 이는 동양사상과 예술의 정신적인 측면과 깊은 관련이 있다.
회화에 있어서 평면성(현대미술 속의 평면성이라는 개념과는 다른)은 깊이(빛과 어두움)와 공간 또는 재현이라는 임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이다. 작품속의 형상들은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운 평면적인 설정(전통회화의 부감시점을 비롯한 평면적인 경향을 활용한 것)과 중성적인 색채 속에서 물끄러미 서로를 바라보고 혹은 서성대거나 자유롭게 노닐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화면에 드러난 형상들은 개별적인 존재임과 동시에 인연의 그물로서, 시시각각 다르게 나열되며 결코 서로에게 과시적이지 않다. 이러한 나열 그 사이에 나와 우리의 삶의 모습들이 여백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여백 속에서 기억은 현실이 되고 현실은 다시 기억으로 환원된다.
해질녘 1304_91x118cm_캔버스에 채색_2013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현실적 삶을 반영하는 상징적 형상이므로 익명으로 존재한다. 세대별, 신분을 드러내는 여러 인물들의 형상들을 모이고 흩어지게 함으로서 현실세계의 단면과 시간적 층위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들은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 중심과 주변의 구별이 없이 배열되고, 삶의 불화들을 잊은 것처럼 물끄러미 서로를 바라보고 혹은 휴식처럼 한가하게 노닐고 있다. 과거의 의미로서 정자나 가옥과 불교적인 상징으로 불상들, 그리고 현재적 입장에서의 교회, 이들은 통시적으로 압축된 이미지일 뿐만 아니라 현시대에 공존하고 있는 우리 의식의(제의) 단면들이다. 대나무, 매화 등이 자연을 상징하듯이 강아지. 새, 기타 사물들은 우리의 생활과 깊이 연관된 것들로서 나의 의식을 거치면서 상징적 의미를 드러내게 된다. 우리의 삶과 세계는 단편적인 것이 아니라 순환하는 여러 층들의 복합적인 조합이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므로 반복적 혹은 병렬적으로 배치된다. 이러한 모든 인물들과 사물들은 점경으로서 다소 추상적인 바탕과 조화를 이루어 기억과 현실이라는 두 개의 측면을 드러내게 된다.
새벽 혹은 해거름, 그 사이의 지점에서 마당을 쓴다. 무엇인가를 쓸고 씻어낸다는 의미는 그 속에 묻혀 있는 희미하고 불투명한 삶의 층들을 반추하는 행위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붓질의 재현이 비질이며, 붓질과 비질은 모든 존재와 과정들에 대한 성찰의 표현인 것이다. 또한 욕망과 사건으로부터 균형과 휴식을 이룰 수 있는 마음의 행위이다. 무엇인가를 쓸고 씻어 낼수록 삶은 조금 더 투명하게 이해되어지며 어두움은 조금 사라지게 된다(모든 것들이 완전하게 투명하다는 것은 결코 좋은 게 아닐 수도 있으며 내가 지향하는 바도 아니다). 이것은 작은 바램이다. 거의 모든 작품의 바탕이 빗자루로 그어놓은 선들과 추상적인 붓질로 채워져 있다. 이는 대나무와 매화의 이미지로 그 자체를 묘사하기위한 목적보다는 추상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대상이 드러내는 리듬감과 소리와 색들에 대한 정서적 반응을 위해 선택된 방법이다. 즉 최소한의 형태로 사유적인 면을 드러내기 위함 혹은 그 사이를 탐구하기 위한 것이다. 화면에 홈을 만들고 홈 사이를 메워놓은 후 다시 그 일부를 지워나가며 이전의 행위들을 드러내게 하는 방식은(이러한 방식은 청자, 분청사기의 상감기법을 응용한 것으로 평면성과 함께 균형의 감각이다) 흐릿한 기억의 일부와 시간의 흐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문명과 삶의 방식에 대한 사유들을 포함한 것이다.
이만수
|
||
■ 이만수 | LEE MAN SOO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졸업 및 동대학원 동양화과 졸업
개인전 | 2014 - LA Artcore art center (U.S.A) | 2013 - 홍보재(중국,하문) | 2013 - 그림손갤러리(서울) | 2011 - 장은선갤러리 (서울) | 2009 - 담 갤러리 | 2007 - 모란 갤러리(서울) | 2005 - UTAH state University NORA ECCLES HARRISON Museum (U.S.A) | 2005 - Julie Nester Gallery (U.S.A) | 2002 - 공평아트센타 | 1998 - 덕원갤러리 | 1996 - 공평아트센타 | 1995 - 갤러리동문당 | 1994 - 부산한성화랑 | 1991 - 공평아트센타 | 1991 - 문예진흥원 미술회관 | 1990 - 금호미술관 | 1989 - 관훈 미술관
주요그룹 및 초대전 | 느린걸음과 난상토론 (한원미술관) | 살아가는 이야기 (강릉시립미술관) | 생성 (양평군립미술관) | 힘있는 강원 (국립 춘천박물관) | 마니프2011(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 Things Within, Things Beyond(Kwai Fung Hin Gallery) | 우리안의 신화 (토탈미술관) | 서울 미술 대전 (서울시립 미술관) | 그리스 화필 기행전 (사비나 미술관) | 한국 미술의 자화상전(세종문화회관 미술관) | 고전의 지혜 현대인의 삶(공평아트센타) | 한국화의 위상과 전망전(대전시립미술관) | 한국화의 오늘과 내일' 97(워커힐미술관) | 대상수상작가전(국립현대미술관) | 한.중미술교류전 (북경, 민족문화궁) | 현대한국화전 (호암갤러리) | 젊은 모색 90전 (국립현대미술관) | 43인 초대전(조선일보미술관)
현재 | 성신여자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
|
||
Vol.20150325-이만수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