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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직 展
내 마음의 양_40.9x53.0cm_Oil on Canvas_2012
갤러리 제이원
2015. 1. 6(화) ▶ 2015. 1. 17(토) 대구시 중구 봉산동 217-9 | T.053-252-0614
비닐하우스와 심상의 양떼들
85년 무렵 시작한 ‘해바라기’ 시리즈, 87년부터 시작한 ‘수녀’ 시리즈, 89년의 ‘소녀’ 시리즈, 그리고 90년대 들어서 시작한 ‘양’ 시리즈 등 문 선생은 흐르는 물처럼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작품세계를 심화시켜 왔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변신에는 특별한 계기가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흑백의 대비로 성스러운 이미지를 담아낸 ‘수녀’ 시리즈의 경우, 수녀는 선생이 추도자로 낚시를 갔다가 뱃머리에 말없이 앉아있던 수녀의 인상적인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양’ 시리즈는 선산 도리사 산 능선에서 바라본 풍경이 계기가 된다. 그때 가는 빗발 사이로 멀리 낙동강이 흐르고 들판에는 한 무리의 양떼가 모여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양떼가 아니라 낙동강 주변에 시설된 비닐하우스였다고 한다. 착시현상이었다. 그러니까 문 선생은 실제로 양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이처럼 작품의 변신 계기는 우연히 생겨난다. 그래서 문 선생은 언제까지 양떼를 그릴지 자신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기억의 힘’이다. 선생은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스케치해 두지 않는다. 자신을 감전시켰던 수녀도, 양떼도 스케치하지 않고 마음속에 저장해 두었기에 오랫동안 작품의 에너지로 활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 때 수녀를 스케치해 두었더라면, 그 이상의 풍부한 느낌을 얻지 못 했을 것이라고 한다. 소재가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었기에, 곰삭은 느낌은 더 절실하게 작가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다. 양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그림 속의 양은 현실의 양이 아니라 일종의 심상일 뿐이다. 잘 보면 선생의 양은 뿔도, 암수 구별도 없고, 디테일하지도 않다. 선생의 입장에서는 양의 세부묘사는 별 의미가 없다. 심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그림은 양떼의 군집 상태나 후경의 풍경에 따라 사뭇 표정이 달라진다. 부산하게 움직이며 무언가 찾아 헤매는 양들, 무언가에 홀린 듯 전진하는 양들... 선생의 양은 형태보다 프레임 속에서 전체적인 배치와 배합, 흐름 등을 중시하고 있다. 문 선생의 그림이 밀도 있게 조율된 마음의 풍경인 만큼 양 그림은 한없이 부드럽다. 그것은 배경의 색과 양이 주는 이미지 덕분이지만 선생의 체험적인 이론 탓이기도 하다. 선생은 “모든 형체는 면이고 공간이지 선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조형예술의 중심은 선들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문 선생은 면이 더 중요한 요소가 아니겠는가 하고 반문을 한다. 선은 너무 작위적이고, 면은 자연스럽고 부드럽다는 것이다. 사실, 양을 비롯한 소재들이 면으로 처리되어 있어서 더 정감이 가는 것 같다. 면은 푸근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양이 주는 손하고 유연한 인상은 면, 그것도 곡면으로 하여 더 강화된다. 직선으로 표현되었던 선생의 80년대 그림과는 달리 곡면은 곡선의 강함과 부드러움을 겸비한 넉넉함을 함께 가지고 있다. 면은 작품의 정적인 분위기를 더해준다. 모든 형체는 면으로 되어 있다는 선생의 지론은 체험적인 것이기에 확고하다. 면으로 된 그림, 그것이 문 선생 그림의 특징이다.
투명한 시심(詩心), 목가적인 서정성
화가에게 있어 화폭에 담은 소재는 화가의 은밀한 마음의 그릇이 될 것이다. 그것은 주술적이거나 종교적인 영감과도 직결된다. 혹은 자연적인 소재에 있어서는 자연과의 교감을 통하여 자연에 대한 숭고사상 내지 일체감을 진작시킨다. 회화의 소재적 세계는 외부로 향한 마음의 창이며 화가가 자연과 하나 되는 길이다. 문상직의 작품에 있어서도 특별히 강조되는 것은 자연 친화적인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속에 표출된 자연은 실재적 대상 세계라기보다는 자연적 형상을 임의로 차용하여 상징적 심상형태로 전환시킨 그림이다. 화가 문상직 특유의 독자적인 이상경이라고 할 수 있다. 화가의 근작 작품에서 주소재로 등장하는 것은 자연 가운데의 인물이 아닌 양(면양)이라는 점에서 특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포유동물로서 가축으로 길들여져 온 양은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오래 전, 즉 인간이 정주하여 농경생활에 들어선 신석기시대 이전부터 인간의 생활에 있어서 깊은 유대관계를 맺어 온 순화된 동반자였다. 인류가 등장한 초기부터 양은 인간의 의식주와 연관을 가졌고, 따라서 양은 일찍부터 야생공간을 떠나 인류에 공헌하였다. 구석기시대에 조성된 동굴벽화나 고대 이집트의 분묘벽화에도 양의 형상이 그려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인류가 신적 존재를 경배함에 있어 인간과 가장 친밀한 양이라는 신성동물을 매개로 이용하였음을 의미한다. 양은 때때로 사람 대신 신탁의 희생물로 바쳐지기도 했었다. 서양 초기 기독교 미술이 형성되던 비잔틴시대 카타콤브(catacomb)의 도상회화를 보더라도 기독교의 입장에서 상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양이나 포도 그림이 그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목자가 양을 어깨에 멘 ‘선량한 자’ 상은 길 잃은 자를 구원하여 인도하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또한 동양에서 아름다움을 뜻하는 상형문자인 한자어의 미(美)자도 양(羊)을 걸치고 있음은 그 상관관계를 일깨우게 한다. 양은 무리지어 다니는 군생(群生)동물이다. 그것은 화합 평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다. 문상직의 ‘양떼’ 연작은 양떼를 전경으로 부각시키고 단조롭게 생략된 자연풍광 - 예컨대 산 그림자, 구름, 강 빛이 배경으로 함께 어우러진 그야말로 목가적인 가상적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꿈결에서나 보았을 법한 몽환적 영상을 섬세하나 유연한 필치의 실루엣으로 처리했다. 단순한 동물화로 받아들이기에는 거기에 내재되었을 모종의 심상적 메시지가 가닥이 잡혀진 그림이라 할까, 종교적 여운이 그 언저리에서 형상을 압도하는 형이상학적 영감을 다가선다. 이 그림들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사원 내의 성상 앞에 앉아 있을 때처럼 휴식과 안도감에 잠기게 한다. 관조하는 자만이 휴식과 안도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자연에 대한 정관적 태도, 순응하는 심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마음의 평정에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이러한 미적 체험을 화가는 그림을 통해 표백한다. 밀레의 <만종>에서와 같은 고전적 품격이나 신앙적 엄숙성을 화가는 결코 작품에서 배제하지 않는다. 문상직의 양 그림이 너무 문학적인 순정주의로 빠져든 것은 아닐까 여겨질 만큼 투명한 시심(詩心)과 목가적인 서정성이 우선된다. 1980년대 중반부터 화가는 단일한 주제의 연작에 매달렸다고 하는데 순차적으로 ‘수녀’ ‘소녀’ ‘꽃’ 그리고 ‘양’으로까지 연결된다. 종래 사대부 계층이 선호했던 고품격한 문인화적 정취, 혹은 절대자에 대한 외경심이 내면적으로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색채나 형태가 지극히 절제되어 있으면서 안으로 잦아드는 듯한 침정감과 결코 역동적이지 않은 정태적 무위자연의 세계관이 담겨져 있다. 오늘날과 같은 번잡한 세상에서 그것은 얼마나 소중한 이상형인가, 무리지어 다니면서도 주변의 어떠한 흐름이나 현상에도 거역하는 법을 모르고 순종하는 양이라는 동물은 형상 자체가 온화한 자연의 선경(仙境)을 은유한다. 화가는 우리의 선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가장 경이 높은 달관의 경지인 ‘노경(老境)’의 문턱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정중동(靜中動)과 명상의 공간
문 선생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대구 팔공산의 컨테이너 작업실에 도착하면 해질녘이고, 다음 날 출근할 때는 푸르스름한 여명 무렵이다. 그런 가운데 선생은 자연의 장엄함과 그 속에 깃든 인간의 비소(卑小)를 동시에 느끼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특유의 정제된 색감과 단순화된 형체를 양떼와 접목시킨다. 황혼녘인 듯, 새벽의 안개속인 듯 신비한 풍경은 이 같은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배경은 동양화의 여백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진지한 명상의 세계로 이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문 선생의 양들은 화면에서 돌출하는 법이 없다. 자연의 일부분으로서, 대자연의 품에 안겨 있듯이 표현되어 있다. 자연과의 합일 내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 만져진다. 사실, 선생은 양들을 통해서 ‘우리의 이웃을 발견’하고, ‘반세기 동안 내 삶의 해로애락이 한순간 정지된 필름 속의 영상처럼 화폭에 담겨 있음’을 깨닫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양은 선생의 분신이기도 하고 인간의 은유이기도 하다. 이런 그림의 힘은 정중동(靜中動)의 원리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배경의 정적(靜的)인 산과 강줄기, 전경의 동적(動的) 생명체인 양떼, 즉 정(靜)과 동(動)의 조화가 그것이다. 그러나 양떼의 동적인 요소는 다시 그림 전체의 정적인 분위기 속에 흡수됨으로 해서, 동은 없는 듯 존재하며 그림에 생기를 돋운다. 또 그림의 정적인 아름다움은 산과 양떼가 빚어내는 안정감 있는 구도에서 찾을 수 있다. 화면 위쪽은 명도 계열 밝게 처리하고 아래쪽은 채도를 높임으로써 그림의 조형미는 한층 견고해진다. 게다가 이런 구도의 명당자리에 양떼를 배치함으로써 안정감을 감화한다. 그러므로 감상자들이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이런 정과 동의 길항관계이다. 길항관계를 통해 선생의 그림은 비로소 숨을 쉬기 때문이다.
갤러리 제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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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50106-문상직 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