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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원 展
문신한 여인_227.3x181.8cm_Acrylic on Canvas_2014
가나인사아트센터
2014. 12. 3(수) ▶ 2014. 12. 8(월) Opening 2014. 12. 3(수) PM 5:00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88 | T.02-736-1020
문신한 여인, 227.3x181.8cm, Acrylic on Canvas, 2014
1. 우리 민초의 삶을 특유의 민중적 정감과 품위어린 익살스러움으로 담아내면서도 자신만의 색깔과 작품성을 잃지 않아온 작가 이홍원의 변신은 언제나 흥미롭다. 언제, 어느 곳으로 용수철처럼 튀어나갈지 알 수 없기에 그에 따른 기대도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작가 이홍원이 주목받는 건 무엇보다 시장전체주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자본주의로 점철된 미술계에서 철학과 소신을 유지한 채 예술적 가치를 상정하며 신념의 언어를 펼쳐오고 있다는 점이 크다. 유행에 부초처럼 흔들리는 동시대 예술 흐름에 있어 남다른 고집 아래 특유의 화업을 생성하고, 고유한 회화세계에 충실하게 전진하는 특유의 태도 역시 그의 가치를 올리는 분동이 되어 왔음이 사실이다. 물론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들에서도 그 유의미성은 증명되며 연장된다. ‘그림에 그림을 더하다’라는 주제로 펼쳐지는 이번 전시의 주요 화두는 ‘문신(文身)’이다. <문신-그 이야기의 시작>이라는 소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출품작 모두 몸에 새긴 글이나 이미지의 향연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면서 하나같이 작가 이홍원의 필력과 색깔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사실 과거만 해도 ‘문신’은 인간이 사회학적인 존재로 재탄생하는 표시에 가까웠다. 신앙, 의례, 몸단장 따위를 위한 신체변공에 부수적으로 행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역사도 오래되어, 기원전 14세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대 국가 이전까지 문신습속이 성행하였고, 국가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주술종교적인 의례의 일부로, 계급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액땜을 위한 용도로, 결혼이나 출산 때 호적(戶籍) 대용으로 사용되며 근대까지 은밀하게 전승되어 왔다고 문헌은 기록하고 있다. 다만 중국의 유가적 신체관이 도입되면서 부정적인 인식이 지배하게 되었고,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이 엄격한 신체관은 ‘문신’에 대한 비긍정적인 인식을 확고하게 고착시켰다. 그렇기에 지금도 ‘문신’을 한 이를 불량스럽게 여기며, 미디어에서는 모자이크로 처리하는 방식으로 접근을 차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신’에 대한 시각은 점차 달라지고 있다. 서서히 과거의 기준으로는 해석하기 힘든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뿐더러, 인식에서도 간극이 생기고 있다. 그만큼 ‘문신’을 하는 이유와 형식이 사회?문화적 그리고 법 제도적 규제 면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문신’은 이제 예술에 있어 하나의 비유적 소재로써 활용되고 있음 또한 틀림없다. 이홍원의 그림처럼 미학적인 방향에서 안착되는 예도 있다.
쩐이 곧 신이요 하늘이니, 162.2x130.3cm, Acrylic on Canvas, 2014
사군자 문신 여인-梅, 90.9x72.7cm, Acrylic on Canvas, 2014
2. 이홍원의 ‘문신’ 그림의 특징은 첫 번째, 국가권력에 의한 법 제도적 측면에서의 규제와 통제대상으로서의 형벌문신의 개념을 포박한다.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마냥 형벌문신제도와 유사한 일이 잦아진 당대, 다양한 인권침해 사례를 비롯해 제약과 검열이 남발되는 동시대의 초상을 해학적으로 다루고 풍자하는, 일종의 ‘완장’찬 이들에 대한 이홍원식 발언으로 채워져 있다. 일례로 근작 <조직 블루스> 연작은 ‘문신’하면 떠오르는 조폭이나 동네 건달들의 이미지를 동시대 국가조직, 종교조직, 검찰조직, 법원 조직 등의 권력과 대등한 선상에 맞춰 풍자한 작업이다. 권력을 따르고 지향하는 괴이한 이들과 그 추종자들에게 진리란 단지 억압을 위해 사용된 수사학적 기제일 뿐임을 인체와 민화적 차용을 통해 형상화 하고 있다. 이는 흡사 도미에나 게오르그 그로츠의 그림들을 연상케 한다. 그러면서도 위선과 모순을 그 어떤 글보다 명확하게 통찰하고 있으며 현상의 뒷면에 자리한 진실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냉소적 진술을 통해 198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억압적 규율 권력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시선만은 변함없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이들 그림 속엔 특정인에 해당하는 기표를 통해 불특정 대중들을 세대론의 주체로 호출하는 서사의 전략이 숨어 있다. 풍자라는 장치를 이용한 권력자들의 부정성, 그야말로 “니들이 양아치다”라는 메시지를 심어놓으면서도 해학이라는 또 하나의 장치로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다수의 민심을 부각시키고 있다. 겉보기완 달리 매우 전략적인 조형언어다. 이 중 인상적인 작업은 덩치 좋은 인물 등에 새겨진 프란치스코 교황과 이스라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얼굴이 각인된 그림이다. 이들 사이엔 비교와 대상의 전후가 존재한다. 사랑과 평화의 전령으로 지정되는 인물과 무고한 아이들의 목숨까지 앗아간 이-팔 분쟁의 주역인 총리의 얼굴이 지닌 의미를 상기한다면 작가의 의중이 어디에 있는지 확연하게 알 수 있다 그건 일종의 ‘이매진(Imagine)’이다.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라는 구절에서 처럼 탈국경, 탈영토, 탈자본, 탈국가, 탈종교가 그것이다. 죽이지 않고 죽을 일도 없고 종교도 없는,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삶에 대한, 평화와 희망을 갈구하는 비장한 상상의 표상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반기문 총장의 얼굴과 일본 아베 총리의 얼굴, 중국 시진핑의 얼굴과 김정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조나 교차 또한 동일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정치, 종교를 넘나드는 조직문화의 단면을 맛깔스럽게 표출한 작품이 첫 번째를 장식한다면, 두 번째는 ‘쩐이 신이요 하늘이니’와 같은 익살맞은 문구가 삽입된 그림들, 또는 ‘성조기’ 와 ‘일장기’를 나란히 놓고 ‘추-웅성’을 외치는 장면의 작업들, ‘유전무죄 무전유죄’ 등의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새겨진 작품들이 다음 섹션을 차지한다. 이 가운데 국회의원 배지 아래로 흐르는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자’라는 문구가 새겨진 그림에선 민생을 외면한 채 당리당략에 치우치고 있는 국회의원들을 향한 독설이 적나라하게 엿보인다. 위정자들에 대한 작가의 시니컬한 시선이 꼿꼿하다. 이와 같은 그림들은 금전만능주의, 패권주의, 보신주의, 이기주의에 젖어있는 동시대의 상황을 전통적인 민화풍의 그림과 함께 현대적인 문자로 적시함으로써 시공을 넘어선 자본과 국가 권력의 메커니즘, 문화적 자본이 물질적 자본과 상징적 자본에 의해 계급적 지배를 받는 실태를 지적하고 있다. 결국 제국주의화란 독점자본과 국가폭력이 결부된 것이라는 작가의 조용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인 셈이다. 마지막은 여성들의 본능을 우회적으로 언급한 그림들이다. 현대여성의 당당한 모습을 기호 아래 묘출하거나, 현대인들의 고뇌를 담은 작업까지 다양하다. 작가는 이들을‘문신’이라는 범주 내에서 표현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낮은 자각과 나약함을 숨기고 사회적 상징으로서의 자아와 정체성에 의존하는 실상의 문제를 ‘문신’속 여러 그림을 통해 반추해내고 있다. 그러나 이홍원은 젊은이들의 고민과 번민을, 당당함에 관한 조언 역시 잊지 않은 채 민화적 형식을 빌려 곁들인다. 유머의 감칠맛과 웃음의 멋을 동반한 풍자의 예를 다시 한번 보여준다.
문신한 두 여인, 130.3x162.2cm, Acrylic on Canvas, 2014
산-夏, 60.6×72.7cm, Acrylic on Canvas, 2014
3. 이홍원의 ‘문신’ 연작들은 일차적으론 우리 내외부에 부유하는 실제를 자기만의 시각언어로 치환한 이미지이지만, 이차적으론 당대를 살아가며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문신처럼 깊숙이 새겨놓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는 기표이다. 하지만 언뜻 보면 이 같은 속 깊은 의미를 잘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눈으로만 훑는다면 민중적 일상생활의 반영, 원류로 삼는 순진무구하고 유머러스한 여운, 조형 그 자체를 위한 형태가 아닌 심층적인 문화적 의미성과 일상성의 결합으로 새로운 예술세계를 구현해 온 특유의 몸짓을 독해하긴 더욱 어렵다. 그렇기에 그의 그림은 되레 고찰하면 할수록 맛이 깊다.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솔직하고 소박한 심정이 기교 없이 들어 있기에 음미의 공명도 짙다. 특히 현대인들에 대한 애정과 친근감이 전통과 현대라는 호흡 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으며, 소박한 형태 아래 한국적 미의식이란 무엇인가라는 되물음은 그의 그림 속 중심에 안착된 핵심이다. 더불어 새로운 조형성을 쌓아가려는 노력의 쉼 없음 또한 그의 그림에서 찾을 수 있는 매력이다. ‘문신’시리즈에서도 그의 그림 특유의 맥락은 고스란히 전이된다. 군더더기 없는 형상, 강렬하면서도 청명한 색, 그 사이를 뚫고 일어서는 여백까지 이홍원의 그림이라는 명제는 겉돌지 않는다. 더구나 날카로움을 희석시켜주는 유머러스한 동물들(호랑이, 까치, 용, 얼룩말, 닭, 뱀, 공룡, 사자 등)과, 4대강이 흐르는 배경 위에 쥐로 의인화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삽을 들고 있는 그림 등은 작품의 균형을 맞추는 저울이면서 동시에 작가만의 해학과 풍자의 의미를 더욱 배가시키는 수단이 된다. 심지어 군데군데 놓인 ‘으리’, ‘선(善)’, ‘기춘파’, ‘무성파’ 단어들은 그 자체만으로 해학의 절정을 선사하고, 묘사된 상황이 곧 우리들이 매순간 느끼며 살아가는 현실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공감은 저절로 잉태된다. 과연 이홍원의 그림, 이홍원다운 그림이다. 이홍원다운 그림, 그렇다면 이홍원은 누구인가. 지난 전시에서도 피력한 부분을 재인용하면 이렇다. 작가 이홍원은 젊은 시절 민중미술 작가로서 정치적 격변기였던 80년대의 폭력적인 사회현실 속에서 미술가의 역할을 재정립하고, 미술계의 세속적 세력다툼을 타파하며, 사회현실을 직시하여 현실과 괴리되지 않은 발언으로 미술의 기능을 회복하고자 했던 미술인 가운데 위치했다. 화실을 벗어나 시대적 아픔과 고민을 함께 하기 위해 현장에 열정적으로 참여했으며,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전 미술이 지닌 자기 안위적인 것에서 탈피해 정치사회적 흐름에 발맞추어 전개된 민중미술을 통해 자본주의 소득분배에서 열악한 위치에 있는 도시빈민, 농민, 노동자들의 어두운 삶을 조명하는 등의 활동들을 실천해 나가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나 지금이나, 예나 현재나 삶과 사람에 대한 희망, 나와 우리를 보듬는 인본주의를 놓지 않고 있다. 또한 우리 민족 생활문화의 한 부분을 전통 오브제와 단순성, 표현성과 같은 조형적 특징을 차용하거나 색채감 등을 응용하는 시도를 통해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확립해가려는 노력 역시 잇고 있다. 그런 까닭에 많은 이들은 지금도 우리시대 기억해야 할 작가로 이홍원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예술의 무게에 작가의 중량을 덧대는데 망설이지 않는다.
홍경한(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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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41203-이홍원 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