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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철 사진展
꽃과의 交感 Communion with Flower
Flower #18_Digital Inkjet-Print_50.8x73.7cm_2013
갤러리 이즈
2014. 6. 4(수) ▶ 2014. 6. 10(화) Opening 2014. 6. 4(수) 오후 5시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00-5 | T.02-736-6669
Flower #01_Digital Inkjet-Print_92.5x76.2cm_2014
전시작품을 위해 다양한 꽃과 조우하며 마치 그의 이름을 불러 주듯이 사진을 찍는 동안 자기의 존재를 알리려 하는 꽃들의 몸짓에 매료되었으며, 생명과의 교감으로 황홀히 빛나는 찰나를 포착할 수 있었다. 다만 꽃과 물방울을 이용한 회화적 분위기의 촬영으로 내안의 감정들을 표현하고자 하였으며, 꽃에게도 있을지 모를 꽃의 내면을 읽으려 애썼다. 그렇게 시작한 작업으로 부터 나는, 꽃과 꽃잎 위에 맺힌 동그란 물방울 앞에서 나의 유년기를 만나고 '젊음의 때'를 추억하고 조우한다 - 작업노트 中에서
Flower #08_Digital Inkjet-Print_61.0x50.8cm_2013
Flower #09_Digital Inkjet-Print_50.8x72.4cm_2014
Flower #10_Digital Inkjet-Print_50.8x72.4cm_2013
Flower #14_Digital Inkjet-Print_72.4x50.8cm_2014
Flower #21_Digital Inkjet-Print_50.8x72.4cm_2013
Flower #23_Digital Inkjet-Print_101.6x66.4cm_2014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최건수 (사진 평론가) 미래는 알 수 없다. 그러니 ‘지금, 여기’ 가 삶의 승부처이고 행복의 근원일 수밖에 없다. 행복의 샘은 호라티우스의 시를 인용하지 않더라고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오늘’을 잡고 즐기는 것이리라. 그 즐김은 개개인이 살아 온 시간의 무게마다 다르겠으나, 나이든 노장의 그것은 젊은이들의 즐김과는 여러모로 다르다.
낙출허(樂出虛)! 이 동양식 즐거움은 무엇에 욕심을 내는 것에서 찾아오지 않는다. 아니 모든 것을 버릴 때 즐거움이 찾아온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한가를 벗으로 삼고, 분수에 넘치는 욕심 하나 둘 접어갈 때, 즐거움이 생기는 것이다. 젊은 청춘이 결코 얻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이 사진들을 찍은 이태철의 꽃을 보며 느낀 첫 감정이 그것이었다. 나이테 팔십을 넘긴 한 사내의 사진이 정녕 젊을 수 있다는 것은 욕심이라기보다는 비움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닌가 싶다. 꽃들의 세상에서는 하나하나의 꽃들은 제 꽃만 피우지 다른 꽃을 시새움 하거나 다투지 않듯이, 자신의 사진을 할 때 스스로의 아름다움이 생기는 것이다. 좌고우면(左顧右眄)하며 사진 찍지 않는 이태철의 사진 찍기는 왜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에 대한 본인의 분명한 철학을 보여준다.
사진 찍기가 쉬어진 세상이다. 카메라가 쥐어지면 누구나가 사진을 쉽게 찍는다. 간혹 쓸 만한 사진이 우연찮게 얻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연속적으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의미 있는 사진을 찍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다. 이는 사진의 덕목이 찍는 자의 관점과 일관성이 요구되어지기 때문이다. 이게 좀 까다롭다. 생각해 보자. 벽돌 한 장은 그냥 벽돌 한 장일 뿐이다. 아무리 벽돌 한 장이 아름다워도 그것이 집이 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담장이나 집 혹은 높은 성채는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 벽돌을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올릴 때 가능하다. 그 때 벽돌은 하나의 ‘세계’로 재탄생한다. 이태철의 사진은 바로 그 세계를 향한 긴 여정으로 보인다. 이미 드러낸 모습만 가지고도 그 아름다움이 눈에 그려진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야 할 것이 있다. 이런 노고가 고통인가? 아니다. 예술행위로서의 사진 찍기는 일로서 찍는 사진과 다르다. 목적 없는 사진 찍기인 것이다. 따라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 전에 스스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천지창조 후의 하느님 마음이 이럴 것이다. 그 때 하느님은 홀로 다음처럼 독백을 했던 것이다. ‘보기에 좋았더라.’ 이 점이 무 목적성 사진이 재밋는 까닭인 것이다. 그것은 그냥 몸이 움직이는 궤적이고, 시선이 머무는 것이고, 대상이 말을 거는 것에 대한 겸손한 응답인 것이다. 사진에 갇혀있지 않고 즐기다보면 어느 듯 존구자명(存久自明) 즉 스스로 밝아지는 경지에 오르는 것이니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누구의 눈과 평가를 의식해서가 아니다. 바람은 그물에 걸리지 않고, 진흙밭의 연꽃은 더러움을 몸에 묻히지 않으면서 홀로 아름답다. 적어도 나이든 사람의 사진 찍기는 이래야 한다는 생각을 나는 가지고 있다.
이 태철의 사진에서 느낀 두 번째 감정은 이렇다. 그의 작품은 꽃을 소재로 한다. 사진가들이 가장 즐기는 소재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꽃 사진은 그만큼 변별성을 가지기 어려운 영역의 사진이다. 개성을 드러내기 어렵다는 말이다. 철마다 바뀌며 피는 꽃을 따라 다니며 찍는 꽃 사진은 참으로 어렵다. 좋은 촬영 조건을 만나기도 어렵고 하나의 일관성을 갖기도 어렵다. 촬영 조건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을 해결하는 방법은 스스로 촬영 조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태철의 사진은 밖의 꽃이 스튜디오에서 사진가의 연출로 새로운 미를 얻는 것으로 재탄생 한다. 그는 꽃을 화병에 꽂고, 배경을 고려하고 조명을 비추어 다시 찍는 것이다. 이 때, 자칫하면 어설퍼지기 십상이다. 현장에서 찍느니만 못한 사진으로 끝날 수 있다. 당연히 연출 시에, 사진가의 세련 된 미의식이 요구되어 지는 것이다. 사진가만의 독특한 특성을 보여주는 잇(it)이 요구되지는 순간이다.
이 사진들 속에서 그 잇(it)의 역할을 꽃 앞에 투명 유리를 세우고 분무기로 물을 뿌려 만든 물방울들이 담당한다. 우리의 시선은 물방울이라는 커튼을 통해서 꽃에 도달한다. 영롱한 물방울은 그것이 어떤 꽃이냐는 지시적 역할을 포기하게 만든다. 어떤 꽃인들 어떠랴. 투명한 물방울과 꽃들이 대동단결하여 새로운 제 삼의 아름다움을 생산시키는 것이다. 이러므로 이 꽃들은 식물 도록에 실린 어떤 꽃이 아니라 ‘나만의 꽃’으로, 하나의 의미로 재탄생하는 것이리라. 흔하디흔한 소재를 작품의 원료로 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꽃의 아름다움에 대한 재해석이고 어떤 아름다움을 위해 사진가 스스로 적극적 관여를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나는 이 태철의 작품에서 두 가지를 본 것을 기쁨으로 남긴다. 작업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와 소재를 다루는 적극적인 방법론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가 팔십을 넘긴 사진가가 가고자 하는 지향점이라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이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아마도 방하착(放下着)이 아닌가 싶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인생을 관조하는 힘에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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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철
(사)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 | 한국현대사진가협회 회원 | 단국대학교 사진예술아카데미 사진예술연구과정 3년 수료
Solo Exhibition | 2014. 06『 꽃과의 交感 』이즈갤러리 (한국 인사동) | 2014. 05『 신비의 시간과 遭遇하다 』Coohaus Gallery (미국 뉴욕) | 2014. 04『 꽃과의 交感 』Coohaus Gallery (미국 뉴욕) | 2010. 03『 온새미로 』공갤러리 (한국 인사동)
Group Exhibition | 2013. 12 대한민국국제포토페스티벌2013 사진 꽃 피다」인사아트센터(한국) | 2013. 06『심상풍경(心象風景)』사진전, 토포하우스아트센터(한국) | 2012. 08『자연(自然)을 품다』중국길림성 연변촬영가협회 초대전(중국) | 2012. 06『허락한 순간(The Moment Allowed)』갤러리토포하우스(한국) | 2011. 06『순간 그리고 시각』사진전, 단국대학교예술회관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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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40604-이태철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