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예술창작센터 3기 입주작가 결과 展

 

'유연한 경계(Unlimited limit)'

 

전시작가 | 박염지 | 이지호 | 이칠효 | 정상섭 | 조형섭

 

 

 

경남문화예술회관 제2전시실

 

2013. 12. 5(목) ▶ 2013. 12. 10(화)

Opening : 2013. 12. 5(목) PM 6:30

경남 진주시 강남로 215(칠암동 500-15) | T.1544-6711

 

www.gncac.com

 

 

『유연한 경계(Unlimited limit)』-경남예술창작센터 3기 입주작가 결과전

 

유연한 경계 넘기

 

  『유연한 경계(Unlimited limit)』展 은 경남예술창작센터의 3기 입주작가들의 결과보고전 의미의 전시이다. ‘유연’ 와 ‘경계’ 라는 두 가지 상충되는 개념의 결합으로 보여 질 수 있으나 오히려 이 둘의 결합에서 확장되는 의미에 주목해 보고자 하였다.

 

  창작센터의 입주작가들은 다양한 현대미술 작업을 하는 젊은 작가들로서 낯선 환경인 창작공간에서 만나 같이 생활하며 작업과 교류의 여정을 공유하였다. 입주기간동안 그들은 자신의 영역(경계)를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타자, 또는 자신 안에 내재한 또 다른 경계 어디쯤과 유연한 넘나들기를 끊임없이 시도하였다.

 

  이번 전시는 동시대 현대미술 담론 속에서 이미 ‘경계 짓기’ 는 사실상 무의미함을 인식하고, 예술에 있어 형식과 내용의 경계, 인식과 사유의 경계를 보다 개방적이고 유연하게 경계 넘기를 제안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 유연한 경계넘기란 단순히 표현 형식적 측면에서의 융합, 탈경계적 측면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는 경계를 완전히 벗어난 아방가르드이거나 무경계적인 하이브리드 같은 아주 혁신적인 형식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고정적이고 이분법적인 프레임에 갇히면 결코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없음을 말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창조성은 경계에서 발생한다’ 라는 말처럼 경계와 경계의 접점에서 ‘탈경계적 상상력’이 촉발된다. 작가적 창의성과 상상력의 확장은 바로 이러한 유연한 경계넘기 에서 시작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남예술창작센터

 

 

박염지_도구존재자_130.3×324.4cm_mixed media_2013

 

박염지_도구존재자_97.0x215.0cm_2013

 

도구존재자

나의 그림은 도구가 등장한다. 화면속의 형상은 단순한 재현이 아닌 그것의 ‘존재망각’ 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도구’ 란 자연에서 사회로 이행하는 통과지점, 양자를 연결하는 결정지점 위에 서 있는 존재라는 것을, 도구란 그저 쓰고 버리는 물건이 아니라 대지에 속하고 세계 속에 보존되면서 그 대지 위에서 세계가 형성되고, 말하자면 자연의 터전 위에서 인간적 삶이 솟아오르게 해주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이처럼 도구로 인하여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생활하면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얼마나 도구를 실제와 똑같이 재현했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의 본질이 무엇인가’ 의 문제이다.

나의 그림과 마주 했을 때 ‘도구 존재자’ 가 진정으로 무엇인지, 존재자의 재현이 아닌 존재 체험 그 자체를 깨닫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박염지

 

 

이지호_Scattering space#1_72.7×60.6cm_oil on canvas_2013

Scattering space#2_72.7×90.9cm_oil on canvas_2013 | Scattering space#4_116.8×91cm_oil on canvas_2013

 

 

 

나는 과거, 현재, 미래 어딘가의 모호한 경계에 위치하여 모순적이고도 생경한 풍경을 판타지로 구성한다. 화면 위에 땅과 물, 숲, 동굴, 상공 등의 공간을 흩뜨려 배치해 놓고 수많은 변종생물들을 심어 놓았다. 물결이 서로 엉켜 흘러내리고 또 그것들이 몽글몽글 뭉쳐져 다시 올라가고 거대한 수풀더미가 부유하는 이곳에서 여러 유기생물이 나타나 꿈틀꿈틀 원초적인 에너지를 뿜어낸다. 여기는 생성과 소멸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모든 것이 경계 없이 뒤섞여 진화하는 유기적이고 아나키적인 곳이다.

 

Scattering Space 시리즈는 ‘땅’ 이미지에서 시작된 공간이다. 각각의 화면에 하나의 생장사건이 제시되고, 그 화면은 옆 화면과 연결되어 또 다른 상황, 사건들과 엇갈리고 중첩되고 결합되는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다. 견고한 땅 이미지가 흩어져서 또 다른 공간으로 흐르며 이를 통해 새로운 세계가 확장된다.

 

나는 작품에서 ‘횡단으로 사고’ 하는 새로운 인식을 불러들여 보고자 한다. 크기도 장소도 가늠이 되지 않는 이곳의 정체불명의 생명체들은 낯선 감정으로 다가와 교묘하게 인식의 교란을 일으키며 관객의 세계를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 작은 교란에서 관객의 카타르시스를 유도하고 서로의 욕망을 소통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이지호

 

 

이칠효_still-life_162.2×130.3cm_oil on canvas_2013

 

이칠효_still-life_145.5x97cm_oil on canvas_2013

 

         

데칼코마니 기법을 통한 데칼코마니적 삶에 대한 표현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뉴스에서, 또는 인터넷에서 우리는 매순간 자신의 모습을, 혹은 그것을 표상하는 것들을 보고 또 보고 있다. 그렇지만, 빠르게 생산되어 확산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그 많은 이미지들 속에서 우리는 좀체 진정한 자기의 모습을 산출해 낼 수가 없다. 아울러, 사이버공간에서의 ‘아바타’ 경우처럼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분열시키기에 이른다. 다시 말해,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현대인들은 더 많은 역할의 수행을 강요받을 뿐더러, 생활의 저변으로 들어온 다양한 미디어는 심지어 자아의 층위를 여러 개로 벌려놓기까지 하는듯하다. 그래서  나는 데칼코마니의 기법적 특징, 이를테면 하나의 대상을 다수로 ‘복제’ 가능함을 이용하여  전통사회와는 판이하게 ‘주체’의 의식이 다중화 되어가는 지금 이 시대 우리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요컨대, 나는 태생적으로 데칼코마니적인 우리의 존재를, 한편으로 복잡다난한 현대 사회에서 데칼코마니적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을 데칼코마니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시각화하려한다.

-이칠효

 

 

 정상섭_code-yuri_90×165cm_acylic on MDF pannel_2013

 

정상섭_code-wrestling 88 (side view)_90×165cm_acylic on MDF pannel_2013

 

나의 작업은 우리 사회에 내재되는 인식의 코드를 통하여 사회 구성원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만들어진 소통의 체계를 확인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집단이 개인에게 요구하는 집단화의 수직성(또는 폭력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여기서 말하는 코드(code)는 그 사회 안에서의 약속이며, 예를 들어 횡단보도에서 빨간불에 서는 것, 그리고 파란불에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왼편을 확인하는 것은 우리가 이 사회의 약속에 의해 코드화(codification)되어 있는 작은 예이다. 이렇듯 코드는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인식의 구조이다.

 

코드시리즈(code series)는 작가가 우리사회의 구성원의 하나로서 공유하는 순간 순간을 하나의 코드로 인지하여 이를 풀어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사회 구조의 한 단면 이야기한다. 또한, 한 치 오차 없이 맞춰져 있는 오와열과 표정이 없는 군중의 모습은 개성적 개인은 사라지고 집단의 부속물로서 기능하길 요구하는 사회 구조(코드)의 수직적 힘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정상섭

 

조형섭_부흥상회_가변설치_자개농,이동식 테이블쏘, 클램프_2013

 

조형섭_부흥상회(detail)_가변설치_자개농,이동식 테이블쏘, 클램프_2013

 

부흥상회_1+1

지금은 일상에서도 흔히 쓰지 않는 부흥이란 단어는 몇 십 년 전까지 그 의미 하는 내용처럼 사업이 번창하길 원하는 모든 사업주들이 즐겨 쓰던 상호 명 이었다. 부흥교회, 부흥가든, 부흥상회....아마도 개발을 모든 가치에 최우선으로 두던 그 시대에 그만큼 잘 맞아 떨어지는 이름도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 시골의 한 작은 상점에서 받침 몇 개가 떨어져 나간 부흥간판을 본적이 있다.  2013년 어느 날의 그때, 나는 오지 않을 손님과 부흥을 기다리는 텅 빈 상점에서 80년대의 모호한 감수성을 느꼈다. 그 80년대의 감성은 내게 부흥이란 단어처럼 과도한 욕망이 낳은 파괴와 개발이라는 이중의 이미지로 스쳐 지나지만, 아직도 재개발이 한창인 곳에는 현재 진행의 상태로 과거의 모습이 흔적처럼 남아있다. 그래서 부흥은 과거의 모습이면서 현재의 모습이기도도 하다.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지만 실체가 없는 시뮬라크르처럼, 그리고 부흥이 없는 부흥상회의 간판처럼

 

‘부흥상회’ 는 현실과 마주하는 욕망과 실현 되지 않을 이상의 경계 위에서 출발한다. 잘 사는 것에 대한 의미는 뒤로 하고 잘 살겠다는 의지만 앞세우던 칼날 위, 결코 부흥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지점에서 다양한 의미를 생산해내는 부흥의 공간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나는 이 공간이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사회적 현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해내는 결과로 이어지길 기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실과 이상, 실재하는 것과 의미하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전시 공간과 작업 공간, 감상자와 제작자의 경계 혹은 그 중간지점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노력으로 비춰 지길 기대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식의 영역이 넓혀지며, 소박하게나마 풍요에 대한 의미와 물질적 부흥 이상의 또 다른 차원의 풍요를 가져갔으면 한다. 어쩌면 그것이 풍요라는 단어가 될 수도, 예술이라는 형태의 그 무엇이 되어도 좋다. 사고도 존재도 둘로 쪼개지고 의미 하는 것과 의미 되어질 것의 모호한 결합을 바탕으로 만든 경계, 그 위에서의 경험을 명백하게 보여준다는 계획은 그렇게 모순처럼 보이면서도 어렵게 진행되고 있어서 아직은 미완성의 작품처럼, 어려운 숙제처럼 오래 동안 남겨질 것 같다.

-조형섭

 

 
 

 

 

 
 

vol.20131205-경남예술창작센터 3기 입주작가 결과展